성령과 은사

성령과 은사

써니리버 2024. 7. 4. 11:15

                                                                                      성령과 은사
1부 성령
1.성령은 누구이신가?  2.구약성경에서의 성령  3.우리에게 오시는 성령
2부 은사
Ⅰ.은총
1.은총의 어원적 정의  2.은총-무상의 선물  3.은총의 신학적 개념
Ⅱ.은사
1.은사의정의  2.은사와 관련한 코린토교회의 문제   3.공동선을 위한 은사  4.영적선물에 대한 바오로사도의 지침   5.성령칠은  6.성령의 아홉 열매   7.은사와 그 사용에 관한 원칙

1부 성령

1.성령(聖靈; Spiritus; πνεῦμα)은 누구이신가? 
1)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①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밝히 알게 해주시고 진리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요한 15,26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보호자(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advocate),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영’을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프네우마 테스 아레쎄이아)’이라고 하십니다. 
②‘하느님의 프네우마’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 1,2 ‘땅은 비어 있었고 어둠의 심연 위를 하느님의 영(카이 프네우마 데오καὶ πνεῦμα θεοῦ)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③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의 영’이 삼위일체(trinitas)의 한 위격이신 ‘성령’의 개념으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령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부터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고백하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에너지 곧 창조의 영이신데 이 하느님의 영은 한 처음부터 우주와 인간 안에 현존하셨으며 요한복음에 이르러서는 한 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고,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약속하십니다. 
④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을 가리키는 히브리단어는 ‘루아흐’인데  그리스어 70인역은 프네우마πνεῦμα로, 예로니무스의 라틴어번역 불가타는(405년완역)스피리투스(Spiritus)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숨, 숨결, 바람, 영혼, 영, 정신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하느님의 영’으로 창조 되었고(창세 1,26우리의 모습; 창세 2,7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프네우마’에 의해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인류 구원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바람의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요한 3장).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실 때 그분을 ‘파라클레토스’(Paracletos;παράκλητος)라고 부르는데, 이는 ‘곁으로 불려 온 분’ 곧 변호자라는 뜻이며(요한 14,16.26; 15,26; 16,7 참조), 일반적으로 위로자, 협조자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2)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성령
①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지만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표현되는 과정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곧 성령은 성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길을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안내자이고 협조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되신 하느님의 말씀의 결정체라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파라클레토스가 한다고 할 때, 삼위일체의 교의는 분명해집니다. 이것을 제외하는 경우  어떠한 성령론이든 비 그리스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코린토1서 에서 가장 오래된 삼위 일체적 정식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12,3-6)
②성령자신이 바로 탁월한 선물이며 우리가 성령을 인식한다면 그 선물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삼위일체(Trinitas)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하는 신앙교리로서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바대로,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세 위격, 즉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계심을 말합니다. 세 위격은 동일하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십니다.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本性), 하나의 하느님 본질(本質), 하나의 하느님 실체(實體)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신비(絶對神秘, mysterium absolutum)로서 이성(理性)에 의해 온전히 간파될 수 없습니다. 
③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로 구별되어 파악됩니다. 
성령의 위치에 대해서 하느님이라는 호칭은 부여하지 않았지만 삼위(三位)적 정식은 성서 안에 나타나있습니다(마태 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④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관계를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하느님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들의 구별을, 한 인간의 영혼(anima)속에 깃든 세 가지 속성에 견주어 설명합니다. 즉,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입니다. 이브콩가르(Yves Congar)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에 근거하여, 성부 하느님은 기억에 관계되고, 성자 하느님은 지성에 관계되며, 성령 하느님은 의지 및 사랑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실제로 구별되면서 하느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자립적 관계(自立的 關係)라고 설명합니다. 즉, 
⒜성부(聖父)는 모든 존재 사물이 흘러나오는 원천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엮어져 있고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계시는 그런 분으로서 기억이라고 하는 의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자(聖子)는 지성과 관련 되는데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알고 그것을 보여주는 의미의 지성입니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의지이며 사랑입니다. 사랑의 작용은 분석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끈이면서 동시에, 성자가 성부를 온전히 알고 따르는 데 유용한 하나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인식 합니다. 그리고 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생기는 인격적인 사랑, 곧 이 두 분으로부터 발출해 나오는 사랑이 성령이십니다. 
⑤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는 계시의 형식을 사용하여 당신이 위격의 근원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러한 계시 형식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 하였을 때(요한 8,24.28 참조), 예수님은 위격의 근원이신 아버지의 모상(模像) 또는 형상(形象)으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콜로 1,15 참조).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며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요한 17,21 참조). 
⑥예수님께서 ‘우리’ 라는 어휘를 사용할 때(요한 14,23; 17,21 참조), 그것은 아버지와 당신 자신만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 즉 아버지와 아드님에게서 발(發)하시며 두 위격 안에 계신 한 위격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의 통교의 최종적 행동이십니다. 사실상 교회는 이 세 위격의 통교(通交)와 관련하여 정의(定義)됩니다. 성령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발(發)하고 아들 하느님에게서도 發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성부의 시대이고, 신약은 성자의 시대이며, 교회는 성령의 시대이다’라는 구분 또한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각 시대의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고유한 위격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는 지금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의 결정체, 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파라클레토스가 한다고 이해할 때 삼위일체의 교의는 분명해집니다. 

❋삼위일체교리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잘 알려진 일화. 히포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교부들 가운데서 사상으로나 필력으로나 빼어난 분이시다. 그는 20여년(399~420년) 「삼위일체론」을 썼는데, 어느날 삼위일체론을 쓰다가 히포 바다를 거닐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붓고 있었다. 아이는 그 구덩이에 지중해 물을 다 담을 작정이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치도 않다고 하니까, ‘주교님께서 궁리하시는 삼위일체 신비는 더 어렵지요’라고.
 
3) 가톨릭교회교리서의 삼위의 관계와 역할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말씀’을 계시해 주시고 신앙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만 성령을 알 수 있는데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 안에서, 전통 안에서,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성사의 전례 안에서 말씀과 상징을 통하여, 기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은사와 직무 안에서,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의 표징들 안에서, 성인들의 증거 안에서 우리는 성령을 만날 수 있다. 성부께서 당신의 ‘말씀’을 보내실 때 언제나 당신의 ‘성령’도 보내신다.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고 함께 파견되신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볼 수 있는 모습인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지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교회교리서 688 참조)

2.구약성경의 성령
1) 탈출시대
구약시대의 ‘하느님의 프네우마’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창세기 성조사의 인물들은 각 시대가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한 처음 어둠의 심연을 감돌던 하느님의 영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인도하는 영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하느님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계시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탈출 3,12) 
 “그때에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그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민수 11, 25)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신명 34,9)  
 “네가 사는 동안 내내 아무도 너에게 맞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주었듯이 너와 함께 있어 주며,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 여호 1,5) 

2) 판관시대
①판관시대에는 난세를 평정할 영웅들을 선택하시고 12명의 카리스마적 인물들이 성전(聖戰)을 지휘하여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로부터 구하였습니다. 
판관 3,10 주님의 영(숨)이 오트니엘에게 내리니... 
판관 6,34 주님의 영(숨)이 기드온을 사로잡았다. 
판관 14,19 그때에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들이닥쳤다. 
②구약에서 말하는 판관(判官)이란 재판정에서 법을 판결하는 법관의 직무 수행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특은을 받은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백성들을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판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느님의 영이 자신에게 내렸다는 확신으로 행동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③판관기 13⎯16장에 등장하는 삼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는 다른 판관처럼 군사를 동원시켜 적을 무찌르지 않고 현명한 판결을 내린 일도 없습니다. 사자를 찢어 죽이거나, 성문을 뿌리채 뽑거나, 당나귀뼈로 혼자 천명을 죽이거나, 황소를 집어 던지는 등 희귀한 모습의 판관입니다. 그는 단지파 출신의 나지르인이었으면서도 금욕적 생활을 못했지만 그의 최후에 혼자 적진에서 적의 심장부를 분쇄합니다. 삼손의 무절제한 욕망은 그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으나 두 눈이 뽑히고 놋쇠 사슬에 묶이어 필리스티아에서 홀로 연자 맷돌을 돌리고 있을 때 하느님은 이 참회하는 사나이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16,28)” 사실 눈멀고 사슬에 묶인 삼손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하느님 외에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3) 다윗왕정시대
마지막 판관 사무엘시대에 사무엘이 이사이의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축복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1사무16,13).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이사 11,1-2). 

4) 남북왕조시대 ~ 유배시대 ; 예언자 (프로페테스 προΦητηs) 시대
솔로몬이후 이스라엘은 남(유다왕국)과 북(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남북왕조시대에 각 시대를 다스리는 임금이 있었지만 이 시대에 백성들을 인도한 것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는 사람들 앞에서 또는 사람들보다 앞서서(영적 예지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입니다. 예언자의 예언은 고대로부터 제2차공의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느님의 백성을 교육-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언자가 부름 받을 때는 하느님께로부터 당신“말씀”을 입에 담아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예레 1,9). 
이사야, 예레미아,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3대 예언자입니다. 성경의 목록에 18권의 대.소 예언서들이 있는데 아모스와 호세아를 필두로 자신의 이름으로 저술을 남긴 이른바 저술예언자들 이전에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두 예언자의 예언활동은 문서로 남겨지지 않아서 예언서 목록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엘리아는 모세와 함께 살아있는 전통입니다. 엘리야로부터 이스라엘 안에 전통적인 예언 운동이 시작됩니다. 모든 시대에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아가야만 한다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여기에서는 3대예언자만 언급합니다.
①예언자 이사야
❶제1이사야 (740-735): 716년 히즈키야 임금이 아하즈를 계승할 때의 예언자로 이사야의 선포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거대한 신학적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통하여 배출한 인물 가운데 이사야만한 위대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이사야서는 탈출전통과 다윗전통의 뿌리를 합류시켜 구약 전체의 일관된 흐름인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라는 새 신학을 이루었습니다. 이사야서는 66장전체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제1이사야서는 이사야 본인의 글로 1-39장까지입니다(제1부 1-39, 제2부 40-55, 제3부 56-66). 
❷역사상, 이사야서보다 계시를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신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 책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이사야예언서 6,2의 사랍(하느님을 섬기는 천상적인존재)들의 ‘거룩하시다’의 세 번 반복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고 오늘날까지 개인적으로든 전례적으로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앞에서 취해야할 자세를 결정하는 신학의 근본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이사 6,9-10은 마태 13,13;마르 4,12;루카 8,9;요한 12,40에서 인용되는 부분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 말은 각 시대뿐 아니라 인간들 자신의 마음 가장 은밀한 영역에서도 심판을 일으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부름을 거부하며 말씀을 듣고 깨닫기에 무디고 둔하다는 ‘완미(頑迷)’함이 이사야에게서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완고한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면서 ‘하느님께서 그의 얼굴을 숨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이 바로 이 하느님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리라. 야곱 집안에서 당신 얼굴을 감추신 분 나는 그분을 고대하리라”(이사 8,17). 우리 역시, 지금은 그 얼굴을 숨기신 듯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걸어야할 존재가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을 이사야는 말해줍니다. 
❸유배지의예언자 제2이사야(BC550~539년 사이) 이사야 예언서 2부(40⎯55) ; 이 비범한 인물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체험하게 될 구원사상을 우주적인 시야로 이끌어낸 인물입니다.구약성경과 예언서의 두드러진 세 선택전통(탈출전통,다윗전통,시온전통=예루살렘)에 지금까지 어떤 예언자도 인용한 일이 없는 창조전통이 포함됩니다. 제2이사야의 ‘주님의 종’의 노래(첫째노래 42,1-9 ;둘째노래 49,1-7 ;셋째노래 50,4-11 ;넷째노래 52,13-53,12)는 이스라엘의 숙명적 사명과 수난을 가장 심오하게 해석한 문장입니다. 
②예언자 예레미야
❶유다 역사의 마지막 50년, 요시야왕 13년인 627년부터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인 588년까지의 인물입니다.예레미야에 의하면 새 계약은,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의 마음과 교통하십니다. 예언자가 부름 받을 때는 하느님께로부터 당신“말씀”을 입에 담아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데(예레 1,9) 예레미야의 경우는 말씀을 쉬 주시지 않아서 며칠씩 기도 단식하면서 고통을 받고 말씀이 다시 그에게 내릴 때까지 형벌처럼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듭니다(예레 42,7).예레미야는 내내 거부당했고 투옥되고 종국에는 돌에 맞아 운명합니다. 
옛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고통으로 인지하는 영적인 교감의 측면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직에 대한 인간성, 그가 받은 상처,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는 처절한 고독 등은 영적인 길에서 성숙하려는 열망을 가진 현대인들과 공감되기에 충분합니다. 예레미야시대에 유다의 마지막임금 치드키야는 친이집트파와 신바빌론 세력 사이에서 고심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바빌론의 시대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고 그는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입장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자녀로 남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유다가 독립된 강국으로서 정치와 종교의 이중 통치 질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성적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백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③예언자 에제키엘
❶BC 597년 첫 유배시(2차 바빌론 유배;587년 8월)바빌론에 와서 약571년까지 예언활동을 했습니다.하느님께서 단체로 살려주시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숙명론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유명한 개별화의 설교의 18장은 집단적 속박과 숙명론적인 감정에서 개인을 해방하여 성전례 없이도 개인이 성의를 다하여 하느님을 찾는다면 하느님이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❷에제키엘은 탈혼 상태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면서,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이기도합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환상적,영감적인 것과 함께 합리적인 반성에도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드는 것이 이집트탈출사건입니다(20장). 이스라엘인들의 이집트 체류는 탈출 후에도 그 무엇으로도 포기시킬 수 없는, 우상숭배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아프다고 부르짖으면서도 이집트적 문화에 빠져버렸습니다. 유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은 백성,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납니다. 
36,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28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6,24-28)  
❸구원을 받는 자들은 마지막순간에라도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구원사의 결정적인 것을 사람들의 내부에서 성취시킬 것입니다. 하느님 구원행위의 목표는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입니다. 이 창조는 지금까지의 범죄를 씻고 용서하는 제거작업과 연결되어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관여함으로서 순종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영의 수여가 첨가됩니다. 이러한 개인 성결은 단순히 내적인 것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에 의해 인지되어야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5)이스라엘의 마지막 시대-요엘 
①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통하여 선택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내리던 하느님의 영이 최종적으로, 유배이후 기원전 400년을 전후하여 요엘 예언자에 의해 이제는 모든 백성 위에 내릴 것이라고 예고됩니다. 
②성령강림의 현상 사도 2,1-13
2,1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13 그러나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기도하였고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 첫 번째 공동체-교회-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이끄는 근본적 원동력은 바로 약속 되어진 그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에서(창세 11,1-9) 설화적 기능을 뛰어넘는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망의 탑을 쌓던 바벨탑의 사람들은 본래 하나의 언어를 가졌는데, 같은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사로 다른 언어를 서로 알아듣는 영적일치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깨진 바벨탑 사건과의 연관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새로운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열림을 통해 새 창조가 시작됨을 장엄하게 선포하는데, 이 새로운 창조를 여는 힘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③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 14-42)와 요엘 예언의 성취 
 2,14  그때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15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16  이 일은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전체를 보여주는 베드로의 이 설교는 회개➜세례➜용서➜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로 맺고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성령강림의 현상이 언어폭발로 드러난 표징을 베드로는 옛 예언의 성취로서 요엘서 3,1-2를 제시 합니다.“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1-2)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로 다른 언어를 서로 알아듣는 영적일치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힘으로 젊은이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며 성령의 은사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노인들은 모든 사라지는 것 안에서 미래를 희망하면서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무력감을 느끼는 노인들이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3.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 
인간은 어느 순간 한계가 있는 자신을 인식합니다. 인간은 믿음의 인간일 뿐 아니라 갈등하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돌아서고 싶을 때 살아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안아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찾아온 예수님에게서 인생의 평화를 돌려받은 여인을 기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의존의 상태에 도달할 때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때로는 이러저러한 일상의 고통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부수어버립니다. 하느님이 나를 보호해 주지도 않고 내 일상의 고통와 모순에 개입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은 나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의 일상에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참으로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소망하게 하며,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낙천주의의 압티미즘 optimism 은 최선이라는 뜻의 라틴어 옵티뭄 optimum 에서 나온 말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내편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존재하는 모든 것 선으로 보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 최선의 삶일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희망으로, 환난 중 에도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 그 모습은 그러므로 수심에 찬 비장함으로 언젠가 좋은 날 오겠지 하며 이를 악물고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의연하고 선선한 모습으로, 어렵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만병을 물리치는 복이며 삶의 긴장감 우울증 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르 1,10 하늘이 갈라지면서(또는 찢어지면서)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이사 63,19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산들이 뒤흔들리리.
하늘을 찢고 내려올 만큼 성령은 역동적인 막강한 힘으로, 강력하고 힘차게 이 세상으로 하강하십니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성령. 엠마오의 제자들이 경험한 마음 안에 타오르는 성령. 그렇게 성령은 강력한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바오로사도 역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말 위에서 떨어지면서 믿음을 한 보따리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승화하였고 그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았습니다. 그러한 사도에게 성령께서 해주시는 일이라고는 사도 20,22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그저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그것도 가는 곳마다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사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판관들에게 들이닥치는 성령,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는 성령, 이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으로만 고백이 가능한 바오로 서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절을 남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7-39) 

2부 은총과 은사

Ⅰ.은총(恩寵;Gratia; grace;χάρις)

1. 은총의 어원적 정의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사용한 ‘은총(Gratia; grace;χάρις)’이라는 의미의 카리스(χάρις; charis)는 본래 우아함, 매력, 은혜, 호의, 선의 등의 의미로 번역됩니다. 카리스는 ‘기뻐하다’라는 동사 카이로(χαίρω)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카리스’, 즉 ‘은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은사’(카리스마;χάρισμα)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어 헤세드(chêcçêd)는 은총,사랑 또는 자비로 함께 번역됩니다. 
로마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2장 6절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 공동체를 동일시하는 바오로적 해석과 연관하여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분배되는 은총의 선물을 서술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이 단어가 현대적인 용례에 접근하는 은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한 직무적인 은사들과(1코린 12―14)개인의 영적생활을 성장시켜주고 견고하게 하는 견진성사를 통해 받는 성령칠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5,19-22의 말씀에서와 같이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좋은 것은 꼭 붙들고 악한 것을 물리치는 힘을 줍니다. 
성경이 은총이라는 테마에 관하여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을 모두 취급하고자한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은총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지 않는 부분에도 은총이 의미되기 때문입니다. 구세사 전반에 나타나는 선택과 계약은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은총입니다. 인간이 불충실 할 때도 과오는 용서되고 새로운 시작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현존자로 제시하셨습니다(탈출 3,14;  “나는 있는 나다.”;히브리어 에흐예 아쉘 에흐예 'Ehyeh- ‘Asher-'Ehyeh;영어 I am THE BEING; 70인역Septuaginta; 에이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당신을 향한 모든 여정 위에 모든 실재의 근거와 목표로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실존 자체가 은총입니다.  

2. 은총-하느님의 선물
1) 은총에 대한 이해
 ‘은총’은 신학 분야의 토대가 되는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에서 은총에 대한 왜곡된 이해 때문에 이단의 길로 접어든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면에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비단 역사 안에서 드러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사고와 실천적인 삶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오류의 덫이기도 합니다. 특히 지나친 인간중심적 전망 속에서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의 본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이와 반대로 세속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에 맞서서 극단적인 보수로 회귀(回歸)하는 경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도하게 ‘은총’만을 강조한 채 구세사에서 차지하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의 자유로운 협력이 갖는 소중함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물론 은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 이전에 하느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간의 여정에는 그 진보(進步) 정도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2) 성경에서의 은총
은총은 종교의 영역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면서, 틀림없이 가장 많이 남용된 단어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거의 매사의 종교적모임, 강의, 강론 등에 은총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은총의 사전적 정의는 “높은 이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입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기본사상과 들어맞는 말이며(탈출 33,12 참조)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은혜입니다. 
   은총은 분배정의와는 관계없이 하느님의 순수한 호의와 자비로서 거저 베풀어진 혜택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세사(救世史)를 이루는 계시와 계약덕분에 순종의 개념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일단 은총을 베푸시면 쉽게 거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은총은 견고성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는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은총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통교이자 건넴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당신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은총에는 증여(贈與)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레샤케(Gisbert Greshake)에 의하면 은총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선사된 자유’이며 이 은총에 힘입어 인간 본성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으로’ 자신의 충만을 발견합니다. 은총은 어떤 강요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말할 때 함께 드러나는 인간학적인 개념이 바로 자유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사된 선물’ 은총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이 빠져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인간에게 무의미할 뿐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4세기 무렵 인간의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이단이 펠라지우스(Pelagius, 360~422년)사상입니다. 교회는 “은총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공로(功勞)를 쌓아 은총과 구원을 상으로 얻는다”는 펠라지우스의 의견을 단죄하면서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업적은 은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받은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원리에 따라 은총의 무상성(無償性)과 실재성(實在性)을 강조해야합니다. 신앙조차도 은총의 선행(先行)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하느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3.은총의 신학적 개념
1) 늘 있는 은총(常存恩寵, gratia habitualis; 영어 sanctifying grace) 
상존은총(常存恩寵)은 “늘 있는 은총”, “언제나 은총” 으로 쓸 수 있으며, 이를 설명하는 용어로서“성화은총(聖化恩寵)”, “생명은총(生命恩寵)”등을 씁니다. 이 은총은 신화은총(神化恩寵, gratia deificans)으로도 지칭되고 있습니다. 상존은총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성화은총 덕분에 우리는‘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은총은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항상 머물러 계시며 그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상존하는 은총이며, 지속적이고 초자연적인 성향(超性恩惠)의 불변의 구원은총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23.2024 참조). 

2) 조력은총(助力恩寵;gratia actualis;gratia cooperans; 영어 actual grace )
현행은총(現行恩寵)이라고도 합니다. 조력은총은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믿음을 통해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은총이며 인간에게 의화(義化)를 일으키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조력은총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작용하고 성화은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은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총들은 ‘상존 은총’과는 구별 되며 이러한 도움 은총을 공동체 또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9.2000. 2024 항 참조).

Ⅱ.은사 (恩賜;Charisma;χάρισμα)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빌라도는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그리고 빌라도는 군중에게 말합니다. "에체호모"(Ecce Homo, 요한 19,5), 번역하면 ‘보라 이 사람을’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빛으로 오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류를 향하여 요한복음사가는 진리를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를 알아듣고 실행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성령 체험과 같은 용어들은 비록 그 이해의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제 모든 신자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성령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을 뿐 아니라 관심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발생되는 교회의 식별이 필요한 여러 현상들입니다. 성령과 그 은사들에 관한 바른 인식의 부족, 더러는 무지함이 코린토교회 이래로 교회 안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켜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은사의 목적과 규정에 관하여 여러 차례 다루면서, 은사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는 다만 하느님의 은총일 뿐이라고 사도 자신의 믿음에 의한 확신을 서간편 곳곳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수에넨스(Cardinal L.J.Suenens,벨기에 브뤼셀 마린의 대주교)는“성령의 은사는 전에 없었던 새롭고 특별한 무엇은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며 그것은 - 활동은 -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은사를 임의로 청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임의로 청하기에 은사는 너무 신비롭고, 아름답고 귀한 그 무엇입니다. 은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며 하느님적인 특성으로부터 다만 내려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1. 은사의 정의
1)은사-무상의 선물(恩賜, spiritual gift)
은사의 그리이스 말 ‘카리스마(χάρισμα, Charisma;영어 카리즘 Charism)는 ‘은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카리스(Charis,χάρις)’에서 유래하는데 우아함, 매력, 은혜, 호의, 선의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카리스는 ‘기뻐하다’라는 동사 카이로(χαίρω, chairō)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Charis 라는 어간에 접미사 ma 가 첨가됨으로써 그 기본의미가 ‘성령의 은총’을 의미하는 한 단어를 형성합니다.  ‘카리스’, 즉 ‘은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은사’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①코린토 1서 12장 1절의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의 은사는 프뉴마티코스 (pneumatikos) 로 사용되었습니다. ‘영적인’ 또는 ‘신령한 것’의 의미로 은사의 원천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②코린토 1서 1장 4절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신 은총(카리스,Charis,χάρις)을 생각하며...”, 
③코린토 1서 1장 7절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카리스마,χάρισμα, Charisma)도 부족함이 없이...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④코린토 1서 12장 9절 “그 한 성령(프네우마티,πνεύματι)안에서” 이러 저러한 “은사 (카리스마,χαρίσμα)가 주어집니다”. 
⑤코린토 1서 12장 4절의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에서 사용한 charisma라는 단어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카리스는 보통 은총을 의미하는데 은혜의 결과가 카리스마 즉 선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독일어는 그나데가베(Gnadegabe, grace-gift)라고 합니다. 즉, ‘은총의 선물’입니다. 
⑥로마서 12장 6절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카리스,Charis,χάρις)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들(카리스마타,χαρίσματα)을 가지고 있습니다”. 
⑦그리스 말에는 주다라는 동사의 도(do) 에서온 도레아, 도레마가 있습니다. 도레아(δωρεά, dōrĕa)는 명사 도론에서 온 ‘위로부터 오는 하사품’이라는 의미의 ‘선물’이며(로마 5,17; 2코린 9,15 참조), 도레마(δώρημα, dōrēma)는 도레오마이 즉 ‘선물하다’에서 온 명사로서 ‘선물’입니다. 그리스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와 같이 도레아와 도레마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⑧이 무상의 선물에는 책임이 따르며 개인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능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은사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탁월한 교수법을 가진 교수라 해도 지식은 줄 수 있지만 영적인 신비를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정의하면 은사는 공동선을 위하여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⑨신약성경에 이 단어가 17번이나 언급되는데, 한 번을 제외한(1베드 4,10 참조) 나머지는 모두 바오로의 서간에서 발견됩니다. 사도 바오로가 적용하는 카리스마를 세 가지 종류의 ‘은총의 선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⑴로마서 5장 15절과 6장 23절의 예에서, 바오로는 카리스마란 단어를 그리스도의 구원과 영생의 본질적 은총을 서술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카리스마가 ‘거저 받는 은총’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⑵카리스마를 그것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든(2코린 1,10 참조),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든 간에(로마 11,29 참조),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⑶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 공동체를 동일시하는 바오로적 해석과 연관하여 발견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단어는 복수형으로 나타나며 공동체의 회원 각 사람이 수행해야 할 역할 혹은 기능을 예상하여,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분배되는 은총의 선물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카리스마는 이 세 번째에 해당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세 번째의 의미로 카리스마를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은사를 그리스도의 구원이나 영생과 같은 기본 은총과 구별해 주고 또 믿음과 소망과 사랑 등의 은총과 구별하게 해 주는 것은 은사의 다양성에 있으며 또한 그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배되는 방법 등이 그렇습니다. 

2) 다양한 은사들
① 한 성령과 여러 은사
은사는 무한하고 다양하며 인간 편에서 규정할 수 있는 선물의 목록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은사는 초대교회에서 특별히 대두되었을 뿐 그것만이 은사의 전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은사가 그것만이라면 하느님의 선물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분에 필요하기에 은사를 임의로 청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가 처한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적절한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은사의 소유가 곧 도덕적인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코린토 1서 1장 7절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라고 시작하면서 1장 11절에서는 “여러분 가운데 일어난 분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라는 말로 코린토 신자들의 은사사용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더욱 좋은 길을 은사 설명의 한 복판인 코린토 1서 13장에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은사의 분배
사도는 각 은사의 분배를 확신 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전부가 주어지지 않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가질 수 없고, 공동체를 위하여 성령께서 선택하여 개인에게 알 맞는 것을 분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을 원하시지만 다양성이 무질서는 아니기 때문에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야말로 공동체의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이교인들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서로 경쟁하고 서로 질투하고 전쟁을 합니다. 그에 비하여 일치와 풍요로움을 가져 오는 다양성이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일치는 어느 한 사람 손에 달려있지 않고 의견의 통합도 아니며 오직 성령의 활동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통로는 다양합니다. 또한 은사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며 서로 협력하여 놀라운 결과를 이루도록 각 개인에게 주는 것이므로 협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분열하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비유한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로마 12,1-5 참조) 
저마다 다른 은총을 받고 저마다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의 바른 사용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위임되어져있고 모든 은사는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명심해야합니다. 우리 안에는 무한의 영적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거나 또는 전혀 감각하지 못할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 갈등이 생깁니다. 

2.은사와 관련한 코린토교회의 문제
코린토의 자유주의적 진보파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령을 받았으며 그 은혜의 잔치를 이미 나누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구원은 이미 확정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과 함께 사는 그들에게는 모든 자유가, 즉 코린토식 모든 방종 방만한 생활방식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의 서간에서 사도가 편지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바른 지침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우는 비단 코린토, 갈라티아 등 특정 교회만이 아니라 아직 교의가 확립 되지 않은 시대의 모든 신생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었고 그것은 21세기의 오늘에도 별반 다름없이 반복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사도는 이 모든 가르침 위에, 그리고  그 바탕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성령의 은사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 이웃을 일으키는 무한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린토 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과 은사 사용의 문제, 분열 문제, 도덕성 문제 등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바오로사도가 체험한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코린토교회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우열을 놓고 분열이 일어나자 사도는 모든 은사에 앞서 가장 뛰어난 길 즉 사랑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부터 14장입니다. 사도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판단의 원칙을 공동체의 유익, 공동체의 성장, 공동체의 사랑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바탕은 예수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오늘날 우리의 미사나 기도공동체처럼 확정된 예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단히 자유롭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자유롭다는 면에서는 전공동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어떤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확정된 교의도 없는 초대교회시대에는 하느님의 성령에 관한 참 경험도 있지만 자기도취와 같은 거짓 경험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코린토 교회의 문제는 모든 신생공동체들이 함께 겪고 있었던 문제였을 것입니다. 
  현대의 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의 아홉 가지 은사의 목록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한정하는데 은사에 관한 이해의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한정적인 은사를 청하도록 격려하는데서 흔히는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공동체가 선호하는 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등을 추구하려는 데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더욱 교회의 식별이 필요해졌습니다. 사람은 모두 특별합니다. 그리고 그 특별함에 따라 고유의 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각자의 사랑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하느님께서 적절하게 분배하신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은사에 관하여 바오로사도의 은사 목록에 집중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은사는 당시 코린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났을 뿐 아니라 무질서한 은사의 사용으로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도는 편지로 그 규정을 알리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바오로는 구세사를 한눈에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최종적 계시인 예수그리스도, 율법과 신앙, 하느님의 은총, 죽음과 삶, 죄,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모든 사상의 전개, 자기자신의 십자가와 부활복음의 선포(갈라 1장), 교회, 성령의 은사,성찬례, 자유, 사랑,희망 등 모든 글을 기록하여 신생교회들에 보냈던 것입니다. 
코린토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과 은사사용의 문제, 분열문제, 도덕성문제 등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사랑에 있다고 가르치는 저 유명한 사랑찬가가 코린토 1서 12⎯14장의 은사에 대한 설명의 마지막 단락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은사에 대한 우월론 문제에 대한 결론인 것입니다.내가 천사의 말을 알아듣거나 또는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울리는 징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으로 볼 때 당시에 교회 내에서 은사와 관련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판단의 원칙은 공동체의 유익, 공동체의 성장, 공동체의 사랑에 그 바탕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코린토 1서 12⎯14장 하느님의 선물 은사에 관하여 쓴 것입니다.

3. 공동선을 위한 선물로서의 은사  코린토 1서 12⎯14장 

코린토 교회에서 드러나는 은사와 그 현상과 코린토 교회 내에서 예언과 신령한 언어 즉 방언에 관하여 이목을 끄는 이색적 성격의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사도 바오로는 그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로부터 은사들에 관한 질문을 받고 12~14장에서 길게 설명하게 됩니다. 당시의 코린토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들이 다양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은사도 성령께서 베푸신 은사가 있는 반면 자신이 은사라고 믿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⑴ 그리스도론적 기준입니다. 즉 12,3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⑵ 교회론적 기준입니다. 즉,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도모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은사입니다.
  
1)코린토 교회에서 드러난 은사와 그 현상에 관한 사도의 기준 12,1-3
사도는 본 서간 12장부터 14장에서 은사에 관하여 전체적인 맥락에서 말하고 있지만 모두 교회의 전례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오늘날 우리의 미사나 기도공동체처럼 확정된 예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단히 자유롭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자유롭다는 면에서는 전공동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어떤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코린토인들이 이교도였을 때 익숙했던 종교의식과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차원을 구별하려는 것이 사도가 은사를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①1절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의 은사는 그리스말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πνευματικῶν)로 사용되었습니다. ‘영적인’ 또는 ‘신령한 것’의 의미로 은사의 원천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200주년 성서는 ‘영적인 것들’로 직역했고 이전 공동번역은 ‘성령의 선물’,영문은 spiritual gift로 번역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에 의해서 외적으로 드러난 은사를 말합니다. 
②2절 ‘우상들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휩쓸렸다는 것’코린토의 다신교 의식 중 황홀경에 빠져 광적인 상태가 되는 것과 고귀한 은사를 구별하는 즉, 외적으로 드러나는 은사를 코린토인들에게 익숙한 신비스러움을 숭상하는 종교적 현상 즉 황홀경, 열광, 술잔치 등으로부터 구별하려는 것입니다. 
이교의 종교의식에서도 황홀경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을 코린토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과 동질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작용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필요한데 3절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는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주님이시다”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결합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러한 결합은 나 자신과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고백이 됩니다.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여러 현상들을 다루기 전에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고백할 수 없는 믿음을 성령의 활동으로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이 말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던 완전한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으로, 이교의 악습에서 오는 단순한 황홀경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인들은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하나인 성령과 여러 은사 12,4-7
①4절 은사는 χάρισμα, Charisma 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카리스는 보통 은총을 의미하는데 은혜의 결과가 카리스마 즉 선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독일어는 그나데가베(Gnadegabe, grace-gift)라고 합니다. 즉, ‘은총의 선물’입니다. 
②은사의 직분과 활동의 동일한 신적인 원천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다양한 은사와 같은 성령, 다양한 직분과 같은 주님, 다양한 활동과 같은 하느님 등의 표현은 다양성 안의 일치 또는 동일한 원천 안의 다양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며, 주님을 섬기는 직책도 여러 가지이지만 같은 하느님이며 같은 성령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③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④7절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 
드러남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내재하여 활동함으로써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러한 공동선을 위한 은사가 개인을 위한 것임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14,4에는 ‘어떤 이에게 주어진 신령한 언어의 은사는 개인을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반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성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의 은사는 개인의 성장을 위한 은사입니다. 은사는 공동의 선을 위해 주어지는 봉사적은사와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개인은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서 5장22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성실, 온유, 절제는 드러내야하는 각 개인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⑤공의회 문헌은 은사를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과 직무를 맡기기에 적합하도록 당신 백성을 준비시켜 주시는 성령의 특은”이라고 묘사합니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Lumen Gentium 2.12). 공의회 문헌이 은사를 “특은”이라 지칭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러한 "특은"이 주어지는 방법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특은"이 주어지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특별하다는 것은 "특은"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의 생활에서 성령의 직접적 개입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 "특은"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쇄신과 보다 폭넓은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과 직무를 맡기기에 적합하도록”그들을 준비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사는 특별한 종류의 봉사를 위해 사람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3)아홉 가지 은사
사도는 어떤 순서를 정하지 않고 단순히 아홉 가지 은사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각 사람 안에 내재하여 활동함으로써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라는 표현으로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성령의 활동을 가리키려는 것입니다. 

12,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❶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❷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❸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❹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❺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❻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❼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❽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❾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12,7-11)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은총’의 동일한 기본 선물을 받고 있는 반면(구원 으로서, 철회되지 않는), ‘은사’(은총의 결괴로서 주어지는 각각의 선물)는 다른 방식으로 분배됩니다. 은사는 하느님적인 특성으로부터 다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❶지혜의 말씀은사(로고스 소피아, λόγος σοφίας; preaching with wisdom)
지혜의 본질적인 의미는 인간으로 하여금 슬기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총체적인 능력 또는‘최상의 지성’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경은“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잠언 2,6)고 가르침으로써 참된 지혜의 원천이 하느님이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지혜의 은사’가 아니라 ‘지혜의 말씀’은사입니다.
영문으로 표기된 ‘preaching with wisdom’ 처럼 지혜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교에 필요한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리더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은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❷지식의 말씀 은사(로고스 그노쎄오스; λόγος γνώσεως; preaching instruction)
지혜와 지식(知識;knowledge;그노시스,ϒνώσιϛ)을 굳이 구별하자면 지혜는 하느님을 아는 깨달음, 깊은 인식을 말하며, 지식은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하는데 사전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하느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구분은 그다지 명확하지 못합니다. 지식은 배움과 경험으로 습득되는 것이지만‘지식의 말씀 은사’는 획득된 지식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선물입니다. 지식의 말씀은사는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설명할 때 설득력 있게 말하게 하는 은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객관적인 계시 자료를 파악하고 그것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적용하는 능력을 말할 것입니다.
❸믿음(피스티스;πιστις)의 은사
개인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 이끄는 은사적 믿음을 말합니다. 즉 산을 옮길만한 믿음입니다(1코린 13,2; 마태 17,20;마르 9,23).성령의 은사로서 주시는 이 믿음은 특수한 이적을 행하는 믿음으로서 ‘능력’이 포함됩니다. 다수의 학자들은 믿음의 은사를 기적의 은사부분에 포함시킵니다. 
❹병을 고치는 은사(카리스마타 아이오마톤;χαρίσματα ἰαμάτων;gifts of healing) 
①신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말 테라페우오(ϴεραπεύω;Therapy)는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 (마태 4,24; 8,7; 10,8; 마르 1,34; 루카 4,24 참조)의 뜻이며 영어의 힐(heal)도 같은 의미입니다.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후, 우리말 ‘구원’으로 번역된 그리스말 소조(σώζώ;sozo)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안전’에서 온 단어로 ‘구원하다’, ‘구출하다’ 라는 동사입니다. 마태오복음 9장 21절 ‘손만 대도 구원 받겠지’, 마태오복음 14장 30절 ‘저를 구해주십시오’는 소조로 사용되었고, 루카복음 4장 23절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는 테라페우오를 사용하였습니다. 병으로부터 회복하다’, ‘온전하게 되다’라는 동사 이아오마이는 ‘병을 고치는 은사’로서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②치유의 은사는 사도시대에 복음 선포의 힘을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실제로 당신 제자들과 초기 복음 선포자들에게 적절하게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마태 10,1.8 ; 루카 9,1;10,9 참조). 이러한 치유의 은사는 선교적 맥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에 의하면 치유의 은사는 몇몇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지며, 따라서 그 은사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지는 은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❺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에네르게마타 뒤나메온;ἐνεργήματα δυνάμεων; power of miracles)
신약성경에서 기적과 관련되어 주로 나타나는 두 단어는 뒤나미스(δυναμις;miracle능력, 기적), 세메이온(σημειον;signs;표징)입니다. 여기에서 ‘기적’은 뒤나미스입니다. 이 은사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는 은사입니다. 
❻예언(프로페테이아 προφητεία;prophecy)을 하는 은사
‘예언자’는 히브리어 나비(nabi),그리스어 프로페테스(προΦητηs;prophetes), 영어 프러핏(prophet), 라틴어 프로페따(propheta)입니다. 프로(προ)는 ‘앞’ ‘앞서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의 ‘앞’은 시간적인 ‘앞’도 될 수 있고 장소적인 ‘앞’도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언자는 사람들 앞에서 또는 사람들의 생각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영혼의 상태를 알게 해주는 은사로써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격려하는 힘을 말합니다. 
❼영들을 식별하는 은사(디아크리시스 프네우마톤; διακρίσεις πνευμάτων;recognising spirits) 
그리스어‘디아크리시스’(διάκρισεις;diacrisis)와 라틴어 ‘디세네레’(discernere)는 원래 ‘구분하다’, ‘가르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식별’이란 어떤 이의 혹은 어떤 것의 진정한 의도 혹은 본성을 밝히기 위해 구별하는 것,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올바르게 평가하고 가치를 매기기 위해 섞여 있는 것과 혼동된 것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는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21-22)”라고 말 합니다. 좋은 것과 무익한 것을 구분해내야 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식별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영적 성장 과정에서 식별 작업이 요청됩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식별은 교회 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❽신령한언어를 말하는 은사(글로손;γλωσσῶν; gift of tongues)
❾신령한언어를 해석하는 은사(헤르메네이아 그로손;ἑρμηνεία γλωσσῶν;ability to interpret them) 
‘글롯사’(γλωσσα)의 일반적인 의미는, 첫째, 신체적 기관인 ‘혀’이며(루카 1,64; 16,24; 마르 7,35; 사도 2,3; 야고 1,26; 3,5-12; 참조), 둘째, ‘말’과 ‘어법’ 및 ‘언어’입니다(사도 2,11 참조). 세 번째로는 ‘이상하거나 모호한’, ‘설명이 필요한 표현’, ‘고대 언어’ 혹은 ‘신비스런 말’을 가리키다가 성령을 통한 ‘천상 언어’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은사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그것을 분명한 말로 해석해주는 사람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해석하는 사람은 믿음 안에서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교도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은사는 14장에서 언급합니다.

4)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 12,12-27   
①사도는 몸과 지체들의 비유를 그리스도(몸)와 교회공동체(지체)에 적용하여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하나의 몸이 여러 지체의 집합체인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지체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것이 중심원리이듯이 그리스도역시 자신의 몸(인격체) 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생명체로 묶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중심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개인의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생명공동체임을 말해줍니다. 이 근거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둘러싸고 코린토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나 환상을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②이 모든 은사의 근원은 한 분인 성령이시며 이 은사는 공동체의 영적유익이 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코린토 공동체에 서신을 보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은사의 사용을 자신들의 이익과 자만의 충족, 또는 은사를 얻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과열 현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은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전부가 주어지지 않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가질 수 없고, 공동체를 위하여 성령께서 선택하여 개인에게 알 맞는 것을 분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을 원하시지만 다양성이 무질서는 아니기 때문에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야말로 공동체의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일치는 어느 한 사람 손에 달려있지 않고 의견의 통합도 아니며 오직 성령의 활동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③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통로는 다양합니다.(1코린7;7;12,8-11.28;14,26; 로마 12,6-8; 에페4,11; 1베드 4,10-11 참조). 또한 은사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며 서로 협력하여 놀라운 결과를 이루도록 각 개인에게 주는 것이므로 협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분열하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비유한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에페 4, 4-7 참조)

5) 직무의 은사 12,28-31(The  order  of  importance  in  spiritual  gifts)
12,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①사도,예언자,교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의 직무이며 칭호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순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및 은사자들입니다. 이는 활동으로 표현되는 성령의 여러 은사들입니다.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의 서열을 매기는 것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비중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가 첫째이어야 은사자들의 활동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12,31“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❶마이클 그리피스는(Michal Griffiths, Grace-Gifts Developing What God has Given the Church) 이 말의 의미를 은사를 받기위해 인간적인 노력을 하라는 것보다는 가장 큰 은사 즉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무례하지 않는 사랑은(1코린 13,4 참조) 공동체를 화합으로 이끌며 성장시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것을 세속적으로 이용하며 은사 앞에 하느님 대신 자신이 서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은사도 스스로 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❷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는 의미는 은사자체만을 갖고자 하는 열망을 책망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은사를 구하던 구하지 않던 전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도 은사를 주십니다.
❸또한 마이클 그리피스는 이 구절에 대하여 아직 받지 못한 은사를 받기위해 기도한다기보다는 이미 받은 은사들을 성장시키는 일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그리하여 은사를 온전히 소유하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이며 그러한 은사를 성장시키는 것은 개인의 의무이기도하다고 결론짓습니다. 

4. 영적선물에 대한 사도의 지침 13⎯14장

1)“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2,31
①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에 서신을 보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은사의 사용을 자신들의 이익과 자만의 충족, 또는 은사를 얻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과열 현상을 시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을 원하시지만 다양성이 무질서는 아니기 때문에 은사적 직무에 서열을 매기는 데 사도가 첫째입니다. 
②첫째로 거론한 사도들은 반드시 12제자들은 아니며 바르나바, 실라스, 아폴로 에게도 사용된 말입니다. 사도의 지위는 특별 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둘째 순위의 예언자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당당한 권위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신자들을 교화하고 용기를 주어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격려하는 힘이었습니다. 셋째의 가르치는 사람들은 신앙입문, 성서입문을 가르쳤을 것으로 봅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 서열의 마지막 순서가 여러 은사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③첫째서열 사도들, 둘째서열 예언자들, 셋째서열 교사들, 그리고 마지막 서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도가 보여주겠다는 이 뛰어난 길은 사도 자신이 걸어온 길이며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일치의 삶을 걷는 길입니다. 

2) 사랑 13장
분명히 사랑은 다른 이에게 베푸는 모든 순수 봉사의 저변에 깔려 있는 원동력이요 기본적인 은총입니다. 이 사랑이 사람을 움직여 특정의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은사는 은사활동을 시작하게 하는 은총의 인(因)입니다. 이 다양한 은사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숙고하여야 할 문제는 은사적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부재일 것입니다. 13장의 사랑 찬가는 유명한 구절로 특별히 오랫동안 알려져 왔습니다. 사도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문학 작품 중 굴지의 아름다운 구절이 되었습니다. 13장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연대성을 말하는 몸의 비유에 연결되는 사랑입니다. 공동선을 위하여 함께 일하도록 일치를 주는 사랑 즉,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 

①사랑의 본질 13,1-3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❶여기에서 ‘내가’로 시작되는 일인칭대명사는 사도 자신을 의미하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수사학적 표현 양식으로 가상의 인물을 의미합니다.
❷내가 …한다 하여도...천사의 말, 예언, 지식, 통찰, 완전한 믿음, 선행, 목숨을 바치는 것 까지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든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천사의 언어로 말하든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❸‘천사의 언어’는 황홀경에 빠져 말하는 언어 또는 성령의 은사인 신령한 언어를 의미할 것입니다.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받아 자랑하며 열광주의에 빠진 코린토교회 신자들을 겨냥하여 훈계하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❹예언의 은사,지식의 은사 등 다른 은사들도,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말은 사랑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②사랑의 행동 13,4-7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⑴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⑵뽐내지 않으며 ⑶교만하지 않습니다.5 ⑷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⑸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⑹성을 내지 않고 ⑺앙심을 품지 않습니다.6 ⑻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것을 견디어 냅니다.  
❶모든 선을 풍부하게 하는 힘을 지닌 사랑의 실천과 특성을 언급하는데 막연하게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랑을 의인화시켜 다양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과 특성에는 긍정적 표상과 부정적 표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❷‘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사랑은 친절합니다’에  이어서 ‘사랑은 …하지 않고’를 여덟 번 반복한 후 다시 ‘사랑은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긍정적 표상으로→⒜⒝ 
부정적 표상으로→[⑴⑵⑶⑷⑸⑹⑺⑻]
긍정적 표상으로→⒞⒟⒠⒡⒢
이러한 서술은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문학 기법이지만 사랑은 사실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입니다. 
❸긍정적 표상의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다’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말하는데 사용할 뿐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탈출 34,6;민수 14,18;느헤 9,17.....).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성령의 열매로 언급됩니다(갈라 5,22).이러한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로마 5,5-8;8,36-39)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❹4절의 ‘사랑은 ...합니다’는 표현은 사랑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달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는 사랑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를 기다리는 것이지 막연한 기다림은 아닙니다.
❺6절; 진실은 불의와 대조를 이루며 행위의 기준이 되어 진실한 행동을 강조합니다.
❻부정적 표상으로 표현된‘사랑은 …하지 않는다’의 여덟 번 반복은 코린토 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한 것으로 봅니다. 
❼7절; ‘덮어주다’는 ‘견디어내다’와 병행을 이루는데 침묵으로 상대방의 결점이나 실수를 덮어주고 참아주며 헐뜯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러한 긍정적인 행동과 특성은 7절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거듭하면서 강조하는데 오로지 사랑만이 모든 것을 풍부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놀랍게 행동 한다는 것입니다. 

③사랑의 영속성 13,8-13
❶종말론적 관점으로 표현된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를 직역하면 ‘거울을 통해서 수수께끼로 보듯이’입니다. 거울을 통해본다는 것은 직접 볼 수 없는 한계나 인식의 간접성을, 수수께끼로 본다는 것은 어떤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인식의 한계성이나 불확실성을 의미합니다. 
❷‘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다’는 종말에 하느님과 마주 대하는,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가 되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종말구원에 대한 은유적 표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❸거울은 13세기에 현대와 같은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당시의 금속 거울은 희미하게 보이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참 사랑 통하여 우리 수준으로 알고 싶었던 하느님에의 갈망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인 인식을 말합니다. 
13,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❹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만이 영원히 존속될 수 있다는 사랑의 영속성(불멸성)을 말하고 하느님을 향한 삶에서 근본적으로 실천해야하는 이른바 향주 삼덕 곧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 가운데 으뜸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만 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는 영원히 지속되나 그중 으뜸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는 몇 가지 해석이 제시 됩니다.
⑴이 모든 은사들과 부분적인 인식들,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남게 됩니다. 세상이 지속하는 동안 사람과 함께 있을 은사들과는 달리 사람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역으로 이끌어주는데 있어서 그중 사랑은 근본이요 원천이며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⑵믿음과 희망은 하느님을 향한 인간적인 차원의 미래지향적인 현재(인간의 시간)로서 그치거나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신적차원의 종말론적 현재와 미래(하느님의 시간)로서 불멸하고 영원하다는 해석을 통하여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⑶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믿음,희망,사랑이 다 영원합니다.   

3. 신령한 언어와 예언 14장
14장 1절도 사랑을 추구하라고 시작합니다. 12장에서 당시의 코린토 교회에서 드러났던 은사들을 중심으로 그러한 영적 선물에 대한 사도의 지침들, 그리고 그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랑을 가르친 후, 14장에서는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예언을 하는 은사들을 다시 언급하는데 14장은 이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지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은사들의 의미와 가치를 공동체 성장의 유용성과 효용성의 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밝히며 전하는 예언의 은사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보다 분명히 우월하다고 강조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공동체의 성장에 도움을 주지만 신령한 언어의 은사는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상당수의 신자들이 이성을 잃고 신령한 언어의 은사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열광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일 것입니다(14,23 참조). 그러므로 이 단락을 사랑을 추구하고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은사에 우선하는 덕목 사랑을 그처럼 훌륭하고 완벽하게 설명한 후 은사 사용의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바오로의 사목자로서의 사랑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논리를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당시의 은사자들에게 사도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제시를 합니다.  

1) 신령한 언어와 예언 14,1-12   
14,1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할 수 있는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①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예찬한 다음 1절 추구하라는 사랑은 바로 지금까지 말한 그러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념도 이상도 소유도 아닌 것이기에 언제나 새롭게 더욱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②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의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하면서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것 보다 예언이 우선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령한언어로 말하는 자체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익과 성장에 도움을 주는가에 역점을 두고 교회론적 관점과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③왜 예언의 은사가 신령한 언어에 비해 우선인가? 신령한 언어에 대한 바오로의 견해를 요약하면 
❶신령한 언어는 성령의 은사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가 아닌 무아지경과 같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14,2.14-16).
14,2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14,16그런데 그대가 영으로만 찬미하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초심자가 어떻게 그대의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❷신령한 언어는 마치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14,7-8
14,7피리나 수금처럼 생명 없는 것들도 소리를 내지만 분명한 가락을 내지 않으면, 피리로 불거나 수금으로 뜯는 곡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❸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경우 마치 뜻을 모르고 소리만 들리는 외국어와 같은 인상을 준다(14,11.21).
14,11그런데 내가 어떤 언어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언어를 말하는 이에게 외국인이 되고 그 언어를 말하는 이는 나에게 외국인이 됩니다.
❹신령한 언어는 개인에게 유익할 수 있으나 공동체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하고 초심자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목격한다면 마치 미친 사람들을 보듯 대한다는 것입니다. (14,4.16-19.23).
14,4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자기를 성장하게 하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성장하게 합니다.
17그대야 훌륭하게 감사를 드리지만 다른 사람은 성장에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23 온 교회가 한자리에 모여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데 초심자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④사도 자신도 신령한 언어를 할 수 있지만 이 은사를 은사가 아니라고는 안하지만 결코 추켜세울 의향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신령한 언어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받기 위해 지나치게 몰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안 된다고 울거나 실의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나만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신령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의 네 번에 걸쳐 코린토교회에 편지를 보낼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는 길을 이 신령한 언어의 기도를 기필코 해야만 한다는 광적인 분위기를 우려한 사도는 그보다 예언의 은사를 청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만이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도보다는 이웃을 위한 기도의 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⑤신령한 언어
❶‘글롯사’(γλωσσα)의 일반적인 의미는, 첫째, 신체적 기관인 ‘혀’이며(루카 1,64; 16,24; 마르 7,35; 사도 2,3; 야고 1,26; 3,5-12; 참조), 둘째, ‘말’과 ‘어법’ 및 ‘언어’입니다(사도 2,11 참조). 세 번째로는 ‘이상하거나 모호한’, ‘설명이 필요한 표현’, ‘고대 언어’ 혹은 ‘신비스런 말’을 가리키다가 성령을 통한 ‘천상 언어’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❷사도행전에도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언어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다른 언어들’로 말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  
‘다른 언어들(이떼레스 글로싸이스;ἑτέραις γλώσσαις)’은 ‘heteroglossolalia’즉,방언으로 번역되는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사도 2,6).”즉,모두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본서에서 말하는 ‘신령한언어’는 사도행전의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대로 말하는 ‘다른 언어들’과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❸우리는 신령한 언어가 성령의 활동이며 기도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고, 개인이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며 자신에게는 필요한 것이라고합니다.
❹신령한 언어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하느님께 드리는 성령의 언어 입니다. 신령한언어의 기도를 하고 싶을 때는 먼저 긴 시간 성령께서 이끌어 주심에 잠겨야합니다. 이 성령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내 기도가 바람처럼 허공에 날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확신이 드는 것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내 바람의 결과가 하느님과 꼭 같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유익한 것으로부터 떠나게 해달라는, 혹은 우리의 영혼에 해가되는 것을 갖으려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하느님의 뜻도 계획도 섭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한 탄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외칩니다. 그것은 환의의 외침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극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절규의 외침일 수도 있습니다. 아람어 압바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호칭 입니다.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기도의 근원이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 하느님의 영을 기도의 원리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할 수 있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⑥예언(프로페테이아 προφητεία;prophecy)을 하는 은사
‘예언자’는 히브리어 나비(nabi),히브리말 나비는 아카디아어 동사 나부(nabu)즉 “부르다”, “선포하다”를 어원으로 하며, “신에 의해 부름 받은 자”, “꿰뚫어 보는 자” “대변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탈출기의 아론은 모세의 입을 대신하는 대변인(Nabi)으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어 프로페테스(προΦητηs;prophetes), 영어 프러핏(prophet), 라틴어 프로페따(propheta)입니다. 프로(προ)는 ‘앞’ ‘앞서서’라는 뜻도 있는데 여기서의 ‘앞’은 시간적인 ‘앞’도 될 수 있고 장소적인 ‘앞’도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언자는 사람들 앞에서 또는 사람들의 생각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로부터 말라키에 이르기까지 예언서의 특징은 神託입니다. “...께서 말씀하신다”는 예언자들의 고정적인 선포방식으로서 위협적인 경고의 신탁에는 하느님의 책망이, 약속의 신탁에는 하느님의 권고가 틀림없이 따릅니다. 이러한 신탁들은 예언자의 하느님과의 靈的交感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언의 은사는 영혼의 상태를 알게 해주는 은사입니다.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격려하는 힘입니다. 

2)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14,13-25
① 13 그러므로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그것을 해석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이 은사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그것을 분명한 말로 해석해주는 사람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신령한 언어는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의 영 안에 성령께서 현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신 영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려면 이성의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해석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믿음 안에서 공동체를 강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교도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거절하거나 소홀히 다룰 필요는 없으나, 다만 해석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해석의 은사를 또 달라고 청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숨은 의미를 알 수 있는 힘을 얻도록 기도 하라는 의미입니다.
②15...나는 영으로 기도하면서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양하면서 이성으로도 찬양하겠습니다.....
❶14-19에서 사도는 영의 기도와 이성의 기도를 나누고 있습니다. 신령한 언어로 하는 영의 기도는 그 언어 안에 성령이 현존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능력을 말하고, 이성의 기도 안에도 역시 성령은 현존하지만 다소 자신의 의식을 가진 기도로 구분하는 듯합니다. 즉 신령한 언어의 기도가 인간의 의식보다 높은 수준이라 할지라도 자기만 알아듣는 기도보다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 둘이 함께 작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❷영으로 하는 기도와 이성으로 하는 기도는 여기에서 단순하게 황홀경에서 하는 기도와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나의 영과 나의 이성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영과 이성을 대비했을 뿐입니다.
③ 14,20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른이 되십시오.
❶이 모든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사도는 신령한 언어 또 다른 은사들에 대하여 아이들처럼 호기심을 갖거나 자랑거리를 삼기 위해 청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식별하여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❷14,22절, 신령한 언어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신비스러움과 놀라움을 일으킴으로써 다소나마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는 의미에서 표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믿음을 가지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표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이미 믿음을 가진자들) 예언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예언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예언자는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알려주는 예언의 말씀들입니다. 
  
3) 전례의 질서와 통일성에 관한 사도의 지침 14,26-40   
교회 안의 질서에 관한 실제적 결론으로서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① 해석하는 이가 없으면 혼자서 하느님께만 말한다. 14,27-28
사도는 신령한 언어를 막지는 말라고 하면서 함부로 사용하지는 말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 또는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을 때의 신령한 언어의 기도는 오히려 거부감을 줍니다(사도 2,13).
② 예언자는 스스로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14,29-32
서로서로 경청하는 사랑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모두 나서서 말하지 말고 자제해야합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은 영에 사로잡혀 자신을 주체 하지 못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은 교계 제도에 순종하고 절제된 자신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③14,33-35 여성신자들에대한 규정
34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하듯이 여자들은 순종해야 합니다.35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❶예언이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11,5)전례에서 소란스럽게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잡담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을 해도 여자들의 침묵에 관한 이 부분은 정말 어려운 부분이라서 난외(欄外) 해석으로 언급을 생략합니다. 
❷후대에 어느 필경사에 의해서 삽입된 것이 분명하다는 학설이 지지를 받습니다. 비슷한 문장이 1티모 2,10-12;3,11-12 에도 등장합니다. 
❸다른 해석은 본디 바오로의 말이 아니라 당시 코린토 교회공동체 일부신자들이 만든 규정이었고(피츠마이어의 첫 공동체 참조) 사도가 그것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신자들이 신령한언어의 기도를 많이 했고 상당수의 여성신자들이 신령한언어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절제 없는 무질서한 소리 지르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④ 교계제도의 질서-14,37 
“누구든지 자기가 예언자거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주님의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코린토인들은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을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그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걸고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명령을 언제 어디에서 받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이러한 길만이 주님이 원하는 길이라는 것을 사도는 확신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5.성령칠은 聖靈七恩
1)개인의 성장을 위한 선물 성령칠은
(聖靈七恩; 라틴어  donum septenarium; 영어  seven gifts of the Holy Spirit )
성령께서는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 희망, 사랑을 주실 뿐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시며 이는 특히 신자들이 견진성사를 통하여 받게 됩니다. 견진성사는 굳을 견堅과 떨칠 진振이 의미하는 대로 세례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과 그의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견진성사(堅振聖事, Sacramentum Confirmationis)의 집전자는 크리스마 성유를 도유하며 이사야 11장 1-2절에서 근거하는 특별한 성령의 일곱 은혜를 청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의 경외함이다”(이사 11,1-2).
칠은(七恩)의 '7'이라는 숫자는 성서상 숫자의(완전수) 상징적인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며. "성령 칠은”은 한자어와 우리말을 함께 씁니다. 성령의 7은은 개인의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작용하면서 영성 생활을 주도하는 특별한 은혜로서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합니다. 이러한 개인을 견고하게 하는 은사는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향합니다. 
⑴인간의 지성과 관련되는 은사
❶슬기(지혜)(sapientia;wisdom)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도록 도와주는 은사이다.
❷통달(intellectus;insight)구원의 진리를 인간 지력의 한계 내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사이다. 통찰(깨달음)로도 쓰는데 지성,이해력,사고력,통찰력, 간파력을 의미하고 있다.
❸의견(consilium ;counsel)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도와주는 은사이며 일깨움으로도 쓰는 이 말은 조언,권고,충고 등의 의미가 있다. 
❹지식(scientia; knowledge)영원한 생명과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게 하는 은사이다. 
⑵인간의 의지와 관련되는 은사 
우리의 감정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바른 이성과 의지로 드러날 때 도덕적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감정이 조절되는 것은 도덕적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효성과 경외심이 이러한 덕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❺용기(fortitudo; power)굳셈으로도 표현되는 이 은사는 신앙생활에 수반하는 장애를 극복 하는 힘을 주는 것으로 결단을 내리고 유혹에 저항하는 힘을 주는 은사이다.. 
❻효경(孝敬, pietas)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을 증진시키는 은사이다.
❼경외심(敬畏心, timor)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는 은사이다. 
하느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은 인간의 감각적 무절제를 피하게 하여 절제의 덕을 실천 하게합니다. '두려움' 은 무서운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탄, 존경이라는 의미의 두려움이며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온 경외심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행동을 주의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무서운 것이 있어야 통제불능의 인간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6. 성령의 아홉 열매
견진성사로 받는 성령의 七恩은 받는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갈라티아서 5,22에 열거된 아홉가지 덕목의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맺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들에게서 발견 되어야 하는, 성령에 따라서 사는 개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결실로서의 열매입니다. 
아홉 열매 중 먼저 열거한 사랑, 기쁨,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마음의 습관들을 말하며 성령과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바탕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인내, 호의, 선의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이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성찰과 함께, 성령의 보호를 받는 삶이 되려는 겸허한 의탁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령과 함께 걷는 우리 신앙의 여정입니다.  

① 아홉 열매 중 먼저 열거한 사랑, 기쁨,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마음의 습관들을 말하며 성령과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바탕이다. 
❶사랑(love, 아가페 ἀγάπη’)- 사랑은 모든 덕목의 기초이다. 사랑과 관련한 그리스어 세 단어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가운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아가페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적 사랑이야말로 아가페의 사랑이다.  
❷기쁨(joy, 카라 χαρά) - 하느님의 절대권에 근거하기 때문에 일상의 환경과 조건에 지배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내면의 기쁨이다.
❸평화(peace, 에이레네 εἰρήνη) -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예수님 자신이 지니셨던 평화(요한 14,27 참조).이 평화는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다. 
② 이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인내, 호의, 선의이다.                
❹인내(longsuffering, 마크로뒤미아 μακροθυμία) -실망, 분노, 중상, 모략 등 감정을 거스리는 일을 견디어내는 힘을 말한다. 이러한 덕을 잘 훈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겪는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
❺호의(gentleness,크레스토테스 χρηστότης)- 친절, 관대, 너그러움, 자비 등을 의미하는 단어.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받는 불편한 일들, 씁쓸한 일들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 
❻선의(goodness, 아가도쉬네 ἀγαθωσύνη) -양선함, 착함의 의미. 그러나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않는 소극적인 착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능력, 재물, 시간 등을 적극적으로 이웃을 위해 온전히 자의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③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이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❼성실(faith, 피스티스 πίστις) - 충성심, 믿음, 성실을 의미하는 단어.  이 덕은 개인의 진실한 모습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에게 정직하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서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진실하다.
❽온유(meekness,프라오테스 πρᾳότης) -영어는 미크네스,마일드로 번역되는데 부드럽고 순한.... 온유함은 온화한 성품이 아니라 온유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순한 것과는 다르다. 본래 ‘프라오테스’라는 이 단어는 주인의 명령에 순응하는 길들여진 동물에 사용하는 ‘프라우스’ 에서 유래한다.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의 인격을 드러내게 된다. 모든 상황에서 완전하게 자신을 자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유의 덕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❾절제(temperance, 엥크라테이아 ἐγκράτεια)-자제의 능력이며 모든 죄의 유형을 억제하는 능력이다(사도 24,25; 2베드 1,6 참조). 
이러한 아름다운 덕목인 성령의 열매는 ⑴에페소서 4-6장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열매이며 ⑵필리피서 2장 그리스도의 마음을 참으로 알 수 있는 성령의 열매이며 ⑶콜로새 3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이 되는 열매입니다.

7.성령의 은사와 그 사용에 관한 원칙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십시오”(로마12,3).

로마서의 내용에 따라 이 부분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덕을 단호히 단죄하며 각자가 옳다고 믿는 종교관에 대한 자부심과 야망 등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로마 12,4)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카리스 χάρις)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카리스마타 χαρίσματα)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예언(프로페테이아προφητεία)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로마 12,6), 봉사(디다코니아διακονία) 면 봉사하는 데에 쓰고(로마 12,7) 가르치는(디다스칼리아 διδασκαλίᾳ)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εῶ)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로마 12,8)만 힘쓰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내부의 악을 단호하게 근절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사도가 사용한 용어는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만드는 손, 보는 눈, 각각 역할이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은 서로에게 지체가 되어야합니다. 이 ‘한 몸의 지체’인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사도바오로는 코린토 1서 12장부터 14장을 통하여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각각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은사를 인간존재의 가장 결정적인, 개인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선물로 설명하였으며 로마서12장에서는 성령과 함께 사는 새로운 삶에 대한 지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존재가 육의 존재로 사는 법을 그분의 지상 전 삶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육의 존재로서 영의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 삶에 내 존재를 건다는 그것은 내 존재를 걸어도 될 만큼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입니다. 영적 자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의 선물로 받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람은 죄의 지배를 당하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자유는 철학적 의미도, 내적 자유도 아니라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는 하느님 선물인 자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무한하며 사도 바오로는 은사에 관하여 매우 자유롭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학자들 간에도 은사의 목록과 배분 또는 은사 자체에 관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그동안 남용하였고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은사의 목록을 바오로서간에 한정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코린토 1서 12장, 에페소서 4장 등에 비추어 자기 점검을 해본 다음 그중 원하는 은사나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은사를 청하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복음적영성이기보다는 현대인의 조직적 사고방식과 더 유사합니다. 이미 알아본 대로 바오로서간의 은사목록은 은사의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중 서간에 열거된 것에 기준하여 은사를 청한다는 것은 제한된 틀 속에 자신을 묶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혼란을 초래합니다. 

카리스마는 모든 은사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분명히 사도는 은총의 선물이 여러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코린 12,2-4 참조). 리차드 개핀(Richard B.Gaffin Jr)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과 청원기도에 따라 우리는 자신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게 되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배우기에 힘든 교훈은 영적 은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과 재능, 즉 우리가 받아서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서 항상 일하신다는 바로 그것 입니다. 이 말씀이 영적 은사 문제의 기본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존재하도록 돌보시는데, 이러한 창조주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현존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에게 언제나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인간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언제나 그렇게 하십니다. 한번 주시면 철회되지 않는 은총과,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사와 그 바른 사용에 대하여 바오로서간을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끝으로 수에넨스추기경의 은사에 대한 정의와 교황 바오로 6세의 은사에 관한 지침을 첨부합니다. 
은사에 대한 수에넨스의 정의(Cardinal  L.J. Suenens)
“성령의 은사는 전에 없었던 새롭고 특별한 무엇은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며 그것은 - 활동은 -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은사를 임의로 청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임의로 청하기에 은사는 너무 신비롭고, 아름답고 귀한 그 무엇입니다. 은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며 하느님적인 특성으로부터 다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탁월한 ‘선물’이십니다. 이 탁월한 선물이신 분은 당신 안에 다른 선물들을 모두 포함하고 계십니다. 내가 성령을 받는다면 나는 그분의 모든 선물도 가득히 받는 것입니다. 이 ‘가득히’라는 말에는 무슨 수량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역동적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을 뿐입니다. 성 바오로는 매우 자유롭게 은사들을 나열했으나 항상 똑같이 하지 않았고, 그 여러 가지 일람표 중의 어느 것도 결정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은총의 동일한 기본 선물을 받고 있는 반면, 은사는 다른 방식으로 분배됩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이런선물 저사람은 저런 선물을 받게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져야하고 똑같이 갖고자 기대되어야할 은사는 없다는 것입니다.”(Cardinal  L.J. Suenens, <성령은 나의 희망>)

교황 바오로 6세(1975년 5월19일) 성령의 은사와 그 사용에 관한 바오로사도의 원칙
❶ 그가 전개하는 첫째 원칙은 정통 신앙교의에 충실 하라는 것 입니다.(1코린 12,1-3).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들을 나누어 주시는 성령은 성서를 감도 하셨고 교회의 살아있는 교도권을 돕고 계시는 분과 동일한 분이며, 가톨릭 신앙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도권에 이들 성서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을 위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보다 더 심오한 교의적 형성,즉 성서적, 영성적, 신학적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그 진정성이 교계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와 같은 형성만이, 언제라도 가능할 수 있는 탈선에서 여러분을 보호해주며 ‘허공을 치지 않고‘(1코린 9,26) 복음의 대의(大義)에 봉사하였다는 확신과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❷둘째 원칙은 모든 성령의 선물은 감사의 정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은사의 목록이 길다는 것과(1코린 12,4-10.28-30)또 그것이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로마 12,6-8:에페 6,11 참조)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공동이익(1코린 12,7)을 위해서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모두가, 꼭 같은 정도로 공동이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 때문에 코린토인들은 ‘보다 큰 선물들’인 공동체에 가장 유익한 선물들(1코린 14,1-5)을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❸ 셋째 원칙은 사도 바오로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이 원칙은 그의 모든 서간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들 중 한 페이지를 그에게 착상(着想)하게 해주었는데, 최근 한 번역자는 여기에다 ‘사랑은 모든 것 위를 감돈다(E.Osty) 라는 무언가 일깨워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영성적 이익들이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바람직한 것들 입니다- 인애(仁愛)의 사랑인 아가페(agape)만이 그리스도신자들을 완전하게 해줍니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을 하느님께 맞갖게 해줍니다. 이 사랑은 성령의 선물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 신자들 마음  속에 당신 위격의 적극적인 현존을 함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 판단됩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갈라 5,22) -그가 사랑의 찬가에서 묘사한 바로 그런 사랑- 라고 말해줍니다. 성령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모든 선물은 바로 사랑으로 질서 지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강림 후 초대 그리스도 신자들을 형제애에 헌신하는 공동체로 만들어주고, ‘모든 이가 한마음 한 뜻’(사도 4,32)이 되게 해준 것이 사랑이었던 것 같이, 튼튼하게 세워주는 것(1코린 8,1)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사도의 지침들에 충실 하십시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