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판관시대의 인물 [2]-② 룻.보아즈.나오미
룻기(RUTH/ΡΟΥΘ) 입문
룻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룻, 보아즈 그리고 나오미입니다. 책의 명칭은 룻기 인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나오미입니다. 룻기는 지혜로운 나오미와 착한 모압여인 룻에 대한 일종의 고부열전(姑婦列傳)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통한 구원역사를 보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룻기의 확실하고도 명료한 주제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가장 낮은 신분이라 여겼던 과부와 외국인을 당신의 직접적 보호아래 두시며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자신들의 열악한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신을 성실히 믿어온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보상이 참으로 큽니다. 룻기는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교훈적 측면이고 둘째는 신학적인 내용들입니다.
①교훈적 측면; 룻기를 연구하는 일부학자들은 이 책을 하가다 미드라쉬 문학형식(Haggada Midrash;교화에 목적을 둔 설교집)의 소설로 여기기도 합니다. 교훈의 핵심은
❶가족에 대한 룻의 성실함과 이에 대한 하느님의 보답
❷일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섭리하심
❸보아즈를 통한 자비의 실행
❹결혼의 신성한 의무
②신학적 측면; 룻기에는 신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❶구원의 보편성과 ❷나오미의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한 구원의 보편성과 섭리 안에서 나오미, 룻, 보아즈의 서로에 대한 자비의 실행이 중심을 이루며 전개됩니다.
1. 룻기의 배경
①룻기는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룻기 1,1)로 시작합니다.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판관시대입니다. 판관시대는 대략 BC 1200-1020까지 180년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말합니다.
②이집트를 탈출한 후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정착하여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12지파는 계약의 궤를 ‘실로’에 안치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연합체를 형성하였는데 서로간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각 지파를 한데 모을 만한 지도자가 없었고 사태가 급박해지면 하나의 카리스마적인 영웅, 즉 판관 아래 다시 집결하고는 했습니다. 판관들은 첫 판관 오트니엘 등 12명이며, 마지막 판관이 사무엘입니다.
③이스라엘민족은 선조들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觀은 확실히 있었지만 가나안의 신 바알과 하느님을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주셨고 바알은 풍작을 해 주는 추수의 神이라고 믿음으로써 종교 혼합주의(混合主義)를 초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관은 점차 다신적 우상 숭배로 기울어졌고 퇴폐적인 이교적 종교 의식으로 인하여 신앙의 위기는 그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모두 자기 좋을 대로 살았습니다(판관 17,6 ; 18,1; 19,1; 21,25).
④룻기는 암담한 절망에서 희망을 이끌어낸 아름다운 책입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베들레헴을 찾아온 룻의 마음을 눈여겨보는 보아즈의 인품은, 결혼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는 모든 시대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룻기는 姑婦간의 삶과, 남녀 간의 사랑의 신의를 그린 암울한 판관기를 매듭짓는 아름다운이야기입니다.
2. 이 책의 명칭과 성경의 위치
룻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등은 여성의 이름을 따서 지은 책입니다. 유딧기와 에스테르기는 이스라엘의 위기 때에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한 여성들입니다. 유딧은 출중한 미모로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 페르네스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한 여성이며, 에스테르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의 왕비가 되어 모르도카이와 이스라엘을 구하는 이야기입니. 이에 비해 룻기는 그 내용이 한 가족의 이야기에 한정된 듯 보이지만, 폭넓게는 하느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 그리고 보편주의(普遍主義) 라는 큰 주제가 이 책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 책들은 보통 전통에 근거하는 역사소설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가다 미드라쉬 문학형식에 가깝다고 봅니다.
판관시대와 이스라엘 왕정시대를 시작하는 사무엘기 사이에 룻기가 놓여있습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룻의 이야기는 ‘커투빔(성문서)’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말 번역본인 칠십인역과 라틴말 성서가 룻기를 판관기 다음에 배열하는 것은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에 관한 언급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룻기를 고대의 히브리어로 된 정경 중 판관기의 한 부분으로 봅니다.
3. 저자와 저작시기
탈무드 전승은 저자를 사무엘이라고 하나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판관시대 말기의 일화로 구전되어 오던 것을 유배시대 이후 유다공동체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정신을 힐책하기 위해 편집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유배 이전 즉, 솔로몬시대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유다 왕국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에 이은 바빌론 유배 이전에 저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에서 서술되는 법적 관습들은(‘구원자’의 권리와 의무, ‘역연혼’(逆緣婚) 신명기 법전 이전의 입법을 반영하고(신명 25,5-10 참조), 이 이야기의 문체는 구약 성경의 고전적 산문에 가까우며, 아울러 사람 이름들에 대한 연구는 이 작품이 오래된 것임을 시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배 이후가 저작 시기로서 더 타당하다는 설이 적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선 저자는 사울-다윗과 함께 시작한 왕정 이전의 판관 시대를 먼 옛날로 이야기합니다(“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1,1). 그리고 저자의 시대에는 이미 폐기된 지 오래된 것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합니다(“옛날 이스라엘에는 …….” 4,7). 또한 언어상 특징적인 사항들이 늦은 시대를 시사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책의 신학은(보편주의, 보상에 관한 개념과 고통의 의미) 유배 이후 시대의 환경에서 더 잘 이해됩니다. 에즈라서 9장과 느헤미야서 13장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한 개혁에 반대하여, 외국인들과의 혼인에 호의적인 이 룻의 이야기에는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가 적합하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룻기는 논쟁적인 책이 아닙니다. 저자는 신앙심과 효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외국 여자인 룻을 상기시킵니다. ‘역연혼’(逆緣婚)으로써 주님에게서 섭리적으로 인도된 이 부인은 완전히 합법적으로 이스라엘의 한 가문, 더군다나 다윗의 가문에 맞아들여집니다. 그리고 1사무 22,3-4는 다윗과, 룻의 고향인 모압 사이의 호의적인 관계를 지적합니다.
4. 룻기의 구분과 내용
추후에 첨가된 것으로 여겨지는 4,18-22의 족보(1역대 2,5-15에 다시 나온다)를 빼고서는, 이 책의 문학적 통일성은 흠이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전개됩니다. 이렇게 예술적인 룻기의 구체적인 구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음과 같이 그 구성을 짜 맞추어 볼 수 있겠습니다. 룻기는 네 개의 장(場)으로 되어있고 도입 부분과(1,1-5),결론 부분이 첨부됩니다(4,13-17). 네 개의 장들 사이에는 세 개의 짧은 에피소드가 연결 고리 구실을 합니다(1,19-22; 2,18-23; 3,16-18). 번역된 작품을 보는 우리는 책 전체에 퍼져 있는 수많은 대구법, 조화를 이루는 운율들, 낱말들 사이에 동일 또는 유사 모음이 되풀이되는 모음운(母音韻)과 자음이 되풀이되는 자음운(子音韻), 그리고 두운법(頭韻法) 등 이 작품의 돋보이는 문학성을 볼 수 없지만, 룻기는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 예술의 걸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또한 사람 이름들에 담긴 의미에서 보이는 언어유희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곧 이야기의 줄기를 이어갑니다. 엘리멜렉(나의 하느님은 임금님)과 나오미([나의] 사랑스러움, 또는, [나의] 사랑스러운 여자)는, 때 이른 죽음을 암시하는 그 아들들의 이름인 마흘론(질병), 킬욘(허약)과 대립됩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버리고 친정으로 돌아간 둘째 며느리 오르파는 그 이름의 어원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상대방을 두고 떠나면서 얼굴을 돌릴 때의 ‘목덜미’를 연상하게 함으로써 ‘변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오미와 함께 시집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온 첫째 며느리의 이름인 룻 역시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여자 친구’로 이해되어 왔고 요즈음에는 ‘원기가 회복된 여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애정’ 또는 ‘원기 회복’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가 보아즈(그에게 힘이)의 이름은 희망을 갖게 하고, 마라(쓰라린 여자)는 ‘비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룻의 아들 오벳은 ‘시중드는 사람, 하인, 종’을 뜻하는데, 어떤 특정한 신,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하인 또는 종을 암시합니다. 1,20에서 나오미가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사람 이름들에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마지막 계보 부분(4,8-22)은 룻기 전체와 비교해 볼 때 그 문체가 독특해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라면, 보아즈와 룻의 아들 오벳이 다윗의 조상임을 밝히는 4,17이 원래의 끝 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후에 다윗의 계보가 삽입될 때에 부분적으로 변형되었을 것입니다.
◉줄거리 요약
베들레헴사람 엘리멜렉(나의 하느님께서는 임금님)은 가뭄으로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간다. 나오미(사랑스러움, 사랑스런 여자)와의 사이에 마흘론(질병)과 킬욘(허약)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고 모압여인 오르파(변절)와 룻(여자 친구, 애정, 원기 회복)두 며느리를 맞이한다.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자 두 며느리를 그들의 땅에 남겨두고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쓰라린 여자,비탄)라고 부르면서 혼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룻이 동행하게 된다. 룻은 베들레헴의 유력가 보아즈(그에게 힘이)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하는데 보아즈가 룻에게 친절을 베푼다. 보아즈가 룻에게 친절하게 대했다는 말을 들은 나오미는 보아즈가 엘리멜렉의 가문인 것을 알고 수숙혼제도를 이용하여 룻을 보아즈와 혼인시키려한다. 나오미의 지략으로 보아즈와 룻의 결혼은 성사되고 베들레헴의 원로들은 이 결혼을 축복한다. 보아즈와 룻의 아들은 오벳(시중드는 사람, 하인, 종), 오벳의 아들은 이사이, 이사이의 아들이 다윗이다.
5.룻기의 신학적 의미
룻기에는 신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첫째는 구원의 보편성과 둘째는 나오미의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한 구원의 보편성과 섭리 안에서 나오미, 룻, 보아즈의 서로에 대한 자비의 실행이 중심을 이루며 전개됩니다.
①룻기는 기원후 시대에 유다인들의 주요 축제 때 봉독되었던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 곧 축제 오경(룻기.아가.코헬렛.애가.에스테르)가운데 하나로서 오순절(또는 수확절. 레위 23, 15- 21; 신명 16,9-11; 사도 2,1 참조)에 봉독되었습니다. 룻기의 이야기가 보리 수확 때로부터 시작하고, 오순절 역시 이 시기에 거행되었기 때문이거나, 이 책이 룻을 통하여 율법의 선물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도록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 또 책 끝머리에 있는 족보로써(4,18-12) 다윗과 그를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의 선조로 외국 여자를 내세우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랍비들의 전통은 모압 여인 룻을 개종자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오다’(2,12)라는 표현이 유다교로 개종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②신명기에서 전해지는 수숙혼(嫂叔婚 또는 역연혼 逆緣婚)제도와 과부들과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는 율법의 실행이 강조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룻기의 신학적 의미는 ⑴보편주의 ⑵일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섭리 ⑶룻,나오미,보아즈의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드러내는 자비의 실행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수숙혼은 신명 25,5-10에 근거하는 형수(兄嫂)가 남편의 형제 숙부(叔父)와 결혼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제도의 목적은 한 집안을 지속시키고 죽은 이에게 상속인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후에는 딸도 상속자가 될 수 있어서(민수 36장) 이 제도의 중요성이 부분적으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③외국인들과의 결혼에 호의적인 룻의 이야기는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배타적유다이즘에 대항하는 작품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기원전 515년 성전은 완공되었고 성전례도 거행되었으나 공동체의 도덕성은 과히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 중대한 일은 유다인과 이교인의 벽이 이교적 문화의 흡수로 무너진 것입니다. 이방인과의 혼인이 늘어가고 유다의 공동체는 보전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조만간 공동체의 성격을 상실할 위험이 실제로 있었으므로 이 위기를 극복할 강력한 대책이 요구되었습니다.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이방 여자들과의 혼인으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려고(에즈 10; 느헤 13,23-29)가혹한 조치들을 취하는데 곧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자는 이혼을 하거나 아니면 축출(逐出)하는 조치였습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혼합종교 근절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의 종교생활의 일부로서,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고려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한 가지 면은 종교생활을 너무 약하고 예사롭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대 논쟁이었습니다. 경계를 분명히 긋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결국 이민족들의 여러 종교와 타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종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 여자들과 한 혼인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혹독하기까지 한 조처들을 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혼인이 큰 죄악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죄를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이 아니오?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그만한 임금이 없었소. 그는 자기의 하느님께 사랑을 받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셨소. 그러한 그를 이민족 여자들이 죄짓게 한 것이오”(느헤 13,26 ).
여기에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 721년) 이후 사마리아로 이주한 이민족들이 섞여서 형성된 백성입니다. 자연히 이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이방 종교들이 뒤섞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혼합 종교 생활을 하는 사마리아인들과 종교 및 혈통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다인들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 말엽에 이 두 백성은 완전히 분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에즈라의 개혁이 자기 중심적 배타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스켐의 계약(여호 24,25)은 하느님을 선택한 주변 국가들의 민족이 자의로 계약의 백성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다교는 열려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이교도의 개종을 원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것이지만 이교도의 개종을 열망하면서도 이교도와의 상종을 금하는 긴장 상태는 평행선이 될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자기중심적 배타주의가 우세하였던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에즈라 - 느헤미야의 개혁(에즈 9장;느헤 13장)을 통해, 유다공동체의 상당수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하느님백성으로서 치명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귀향을 위해 이방인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를 선택하셨다면, 보아즈와 룻의 결혼도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룻기를 통해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에즈라와 율법이 파기한 결혼을 하느님께서 인정하시어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현재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친구로 바뀌어야할 이웃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6. 룻기의 교훈적 의미
룻기를 역사서에서 볼 때, 이 책의 집필 목적은 다윗의 조상이 모압인과 연결된다는 전승을 알려 주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망명 시절에 모압왕에게 부모를 위탁함으로써(1사무 22,3) 다윗과 모압 사이에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룻기는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제시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 문체를 이용한 지혜설화이기 때문에 다윗의 기원을 밝혀 주는 것만이 유일한 집필 목적이라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보다는 룻 나오미, 보아즈 등의 인물을 통해 가정에 대한 룻의 충실성과 이에 대한 하느님의 보답을 강조합니다. 룻기를 연구하는 일부학자들은 이 책을 하가다 미드라쉬 문학형식(Haggada Midrash;교화에 목적을 둔 설교집)의 소설로 여기기도 합니다.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❶가족에 대한 룻의 성실함과 이에 대한 하느님의 보답
❷일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섭리하심
❸보아즈를 통한 자비의 실행
❹결혼의 신성한 의무
룻기의 인물들
나오미 (Noemin ; Νωεμὶν)
①룻기에는 삶의 실제적인 문제, 그중에서도 특히 억압당하는 과부들의 처지와 투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그 아들에게 의지했고 자식이 없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창세 38,11; 레위 22,13 참조). 자식도 친정도 없으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전염병이나 감기, 식중독 등으로도 많이 죽었고 또한 소국가들의 잦은 전쟁으로 과부가 많았습니다.
②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가족은 기근 때문에 유다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갑니다. 그러나 모압 땅으로의 이주가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나오미는 룻과 베들레헴으로 귀향합니다. 사실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나오미로서는 금의환향을 하고 싶었겠지만 마을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친구들은 나오미를 친절하게 맞아줍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다다랐을 때에 온 마을이 그들 때문에 떠들썩해지며, “저 사람 나오미 아니야?” 하고 아낙네들이 소리 질렀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1,19-20)
본디 나오미 였는데(사랑스러움, 사랑스런 여자, 즐거움)이제는 마라(쓰라린, 비탄, 괴로움)입니다. 전능자께서 자기를 내치셨다고 말합니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자신의 운명임을 안 나오미는 하느님께서 내치시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나오미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사실 이러한 역설(逆說)적인 표현들은 구약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역시 그의 소망이 바로 이 하느님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리라. 야곱 집안에서 당신 얼굴을 감추신 분 나는 그분을 고대하리라.”(이사 8,17). (하느님의 내치시는 손에 대해서는 ‘주님의 손이 치실 것이다’탈출 9,3; 신명 2,15; 판관 2,15; 1사무 12,15; 2사무 24,17; 에제 13,9 참조)
③고향 사람들이 나오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나오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나오미는 빈손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녀에게는 룻(애정 또는 원기 회복)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위기가 기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희망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④나오미의 인생역전(逆轉)
룻과 보아즈의 혼인으로 다윗가문의 조상이 등장하는 것만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닌 듯합니다. 룻기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인물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의 인생역전이 장황하게 서술되기 때문입니다(룻기 4,13-17). 빈손으로 시작되었던 나오미의 불행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짐을 제시합니다. 먹을 것이 없던 그들에게 음식이 보장되었고, 보호자가 없던 그들에게 배우자도 생겼으며, 무엇보다도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나오미는 이제 자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상실감과 절망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 늙고 초라한 나오미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축복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위로해주고 이름 그대로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룻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려는 나오미의 노력의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입니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4,17)
이제 이 아기가 나오미의 생기를 북돋우고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룻 (Ruth ; Ῥοὺθ)
①랍비들의 전통은 모압여인 룻을 개종자의 전형으로 간주합니다. 모압여인 룻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구원의 보편성을 시사합니다.
“주님께서 네가 행한 바를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2,12)
②모압은 근친상간의 후예들입니다. 히브리어 모압(Moab ; Μωάβ)의 의미는 from father(아버지에게서)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롯은 초아르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서 자기의 두 딸과 함께 살았다...이렇게 해서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맏딸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모압족의 조상이다.작은딸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벤 암미라 하였으니,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암몬인들의 조상이다.”(창세 29-38)
하느님께서 새로운 삶을 위하여 주신 땅에서의 삶은 하느님의 섭리와 관련되나 아버지를 통하여서라도 대를 잇고자하는 것은 인간적인 욕망입니다.
모압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고(민수 22,1-21;모압 임금 발락은 예언자 발라암에게 복채를 주며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청탁한다 ),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한 이들(민수 25,1-18; 모압여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그들의 신 바알에게 경배하다)입니다. 또한 모압족은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제외되었고 하느님 앞에 모이는 집회에 나올 수 없는 이들입니다(신명 23,3-6).
③이 모압 여인 룻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였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공경하면서 성실한 자녀의 의무를 다합니다. 룻은 자신의 미래를 나오미와 공동운명으로 여깁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깊은 상실감을 경험한 룻은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나오미를 끌어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의(義)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겨레 모압족과의 법적, 종교적 인연을 끊고 유다인으로 귀화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에서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땅-민족공동체-신앙-죽음이 언급됩니다. 선언을 강조하려고 바로 뒤에 맹세가 더해집니다.
④룻은 보아즈의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즈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즈는 많은 일꾼들 틈에서 룻을 눈여겨 보고 룻이 나오미의 집안 사람인 것을 알고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룻은 보아즈의 선처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의를 빌미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그러한 룻의 근면성실함이 보아즈의 호감을 사게 됩니다. 룻이 보아즈를 만나는 부분은 2장에 해당됩니다.
‘보아즈가 수확꾼들을 감독하는 종에게 물었다. “저 젊은 여자는 뉘 댁인가?”수확꾼들을 감독하는 종이 대답하였다.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출신의 젊은 여자입니다....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하는데 조금밖에는 쉬지 않습니다.”.......시어머니가 그에게 말하였다. “오늘 어디에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에서 일을 했느냐? 너를 생각해 준 이는 복을 받을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에게 누구네 밭에서 일했는지 말하였다. “오늘 제가 일한 밭의 주인 이름은 보아즈입니다.”’(2,5-19)
⑤3,10에서 룻이 보인 효성은 1,8과 2,20에서 하느님의 “자애”로 옮긴 같은 낱말(히브리말 헤세드;그리스말은 엘레에몬 ἐλεήμον. 히브리말 chesedh는 쉽게 번역되기는 어려운 단어인데 타인의 마음에 들어가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공감, 동감의 의미가 있다)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신의와 연대감을 표현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말에서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리 옮겨지는데, 1,8과 2,20에서는 인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주체이시기 때문에 “자애”로, 여기서는 나오미에 대하여 룻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효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룻의 첫째 효성은 부모와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와 시가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온 것이고, 지금의 것은 보아즈와 혼인하여 시가에 후손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가정이든 계약 집단이든, 생명 공동체 안에서의 성실성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성실성은 약속에 따라 짊어지게 되는 어떤 ‘의무 조항’이 아닙니다. 사실 룻은 아무런 의무도 없이 자유로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보아즈 (Booz ; Βοόζ)
①마태오복음서 1,7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와같이 모두 보아즈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예리코에 살고 있던 가나안 여자로 여호수아가 파견한 정탐꾼 두 명을 숨겨주었는데(여호 2,1) 이 인연으로 예리코가 함락될 때 가족과 함께 보호를 받게됩니다. 살몬은 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유다인들의 전승입니다.
②지주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밭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않았었는데 이는 율법의 규정들입니다(레위 19,9-10; 23,22; 룻 2,8-16). 하지만 실천하는 지주들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보아즈는 이삭줍기를 허용했기에 룻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③보아즈는 자식 없이 죽은 마흘론의 아내인 룻과 결혼하여 마흘론에게 후손을 마련해 주는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친족입니다. 이를 알고 있는 나오미는 보리와 밀 추수 기간동안 보아즈의 사랑을 얻도록 룻을 준비시킵니다. ‘구원자’(히브리 말로는, 고엘)는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 가정의 가족들을 보호하고(경제적 이유로 가족 중 누군가 종으로 팔렸으면 그를 속량한다), 그 가정과 가문의 재산이 남이나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며(토지 등이 다른 가문에 팔렸으면 이를 도로 사들인다), 누가 살해되었을 경우에는 복수를 대신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람입니다(레위 25,25-26.47-49; 민수 35,19; 신명 25,5-10).
④타작 마당은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고 타작 때 보아즈는 곡식을 지키기 위해 그 곳에서 잠을 잘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계획대로 보아즈의 천막으로 갑니다. 이것은 역연혼-수숙혼제도를 성사시키려는 인간적인 노력입니다. 그 밤에 자기의 발치에 룻이 떨면서 앉아있을 때 보아즈는 말합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이 보아즈에게 경망스럽고 부도덕한 여인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그녀의 마음도 보아즈는 알았던 것입니다. 보아즈는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기 전에 그러므로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너는 주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 네가 가난뱅이든 부자든 젊은이들을 쫓아가지 않았으니, 네 효성을 전보다 더 훌륭하게 드러낸 것이다. 자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말하는 대로 다 해 주마. 온 마을 사람들이 네가 훌륭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룻기 3,10-11).
내가 인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네가 훌륭한 여인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말하면서 룻을 안심시킵니다. 마태 6,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랑하거나 떠벌리지 말고 비밀스럽게 하라는 뜻도 있겠지만, 자선을 베풀 때에도 상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⑤나오미의 계획대로 결혼은 성사됩니다. 룻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이방 여인이 아니라 지방의 유지, 보아즈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⑥상실감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측은히 여겨 뒤를 따라온 룻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보아즈는“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 (2,12)고 말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에 룻은“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이 하녀를 위로해 주시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시다니요.”(2,13)직역: “저를 위로해 주시고 당신 하녀의 마음에(와 닿게) 말씀해 주시다니요.” “마음”은 이성과 결정의 주체로서 인간 존재의 중심입니다. 생명력 전체가 마음에 들어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아즈가 한 말은 단순히 위로의 말이 아니라 실존의 복구를 이끌어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보아즈였습니다.
룻기의 인물 묵상
마태오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43명의 남성 외에 네 명의 이방여인이 등장합니다. 타마르(창세 38장), 룻(룻기), 라합(여호 2장; 6,17-18.22-25), 우리야의 아내(밧 세바, 2사무 11장)입니다. 구약의 네 여인들은 이민족이지만,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이들입니다. 이 네 명의 이방여인들 또는 창세기의 요셉이나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보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正道)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펴시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기본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보아즈와 베들레헴 주민들의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이방지역 모압으로) 되돌아온 나오미를 고향사람들은 반갑게 맞아줍니다. 루카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는(루카 10,29-37)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개념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이웃을 다른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둘은 같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차원이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고귀함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의 개념에는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해당 되어야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의 이웃에는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은 제외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피차에 동일할 것이지만 비유의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유다인에게 완벽한 선행을 베풀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난 이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고, 율법 교사는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이웃의 개념을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민족적, 종교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유다인들에게 이 비유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웃은 가족과 이스라엘동포였기 때문입니다.
룻기 1,16-17은 룻이 모압 땅에 남으라는 나오미의 말에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답합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주님께 맹세하건대 오직 죽음만이 저와 어머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사망한 남편과의 사랑이 각별했던 것이 분명하고, 남편의 어머니 나오미 역시 인간적으로 ‘오직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그러한 어머니의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부탁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나오미는 ‘하느님께 얻어맞은 나’ 라고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욥기와 달리(“학대하시는 것이 당신께는 좋습니까? 악인들의 책략에는 빛을 주시면서 당신 손의 작품을 멸시하시는 것이 좋습니까? 당신께서는 살덩이의 눈을 지니셨습니까? 당신께서는 사람이 보듯 보십니까?”욥기 10,3-4) 하느님께 얻어맞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일상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룻과 보아즈의 결혼성사를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께 얻어맞을 때도, 보아즈와 룻의 아기 오벳을 품에 않았을 때도 나오미에게 하느님은 늘 같은 하느님이셨습니다.
룻기는 다윗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판관기에 이어 왕정(王政)시대의 중심 인물은 다윗 임금입니다. 마지막 판관 사무엘은 사울을, 하느님께서는 오벳의 손자인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선택하십니다.
<판관시대의 인물 2-②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