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왕정시대의 인물 [3]-① 사무엘과 사울
Ⅰ.사무엘기입문 Ⅱ.사무엘 Ⅲ.초대임금 사울 Ⅳ.사울과 다윗
Ⅰ. 사무엘기記 입문(SAMUEL;ΒΑΣΙΛΕΙΩΝ;KINGS)
1.책 이름
사무엘記는 예언자이며 이스라엘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의 이름으로, 사무엘기 상.하권의 주요인물이며 출생시기는 대략 BC1120년입니다. 내용은 대사제 사무엘과 사무엘에 의해 추대된 초대임금 사울, 그리고 다윗의 왕국 건립기의 내용으로 솔로몬이 출현하기 직전 다윗의 노년기까지의 역사입니다.왕정시대 초기의 역사는 사무엘기에 기록되는데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열왕기로 이어집니다. 왕정시대의 성경부분은 사무엘기상.하권/열왕기상권 1⎯11장/역대기상권/역대기하권1⎯9장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70인역(70人譯,LXX;Septuaginta)은 사무엘기부터 열왕기까지 이 네 권의 책을 묶어 I.Ⅱ.Ⅲ.Ⅳ 왕국기라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그리스말 번역자들은 사무엘기를 두 개의 두루마리에 옮기면서 제1 왕국기(ΒΑΣΙΛΕΙΩΝ Ⅰ;KINGSⅠ)와 제2 왕국기(ΒΑΣΙΛΕΙΩΝ Ⅱ;KINGSⅡ)라는 이름을 붙였고, 우리가 열왕기 상권과 하권으로 부르는 책들은 각각 제3 왕국기와 제4 왕국기로 불립니다. 15-16세기부터 히브리 말 성경 사무엘기도 두 권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사무엘기라는 책 제목은 이 책의 저자를 사무엘 예언자로 돌린 옛 랍비 전승을 반영합니다. 후대의 랍비들은 1역대 29,29-30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다윗 임금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무엘 선견자의 기록과 나탄 예언자의 기록과 가드 환시가의 기록에 쓰여 있는데...”) 사무엘의 위업이 그가 죽은 다음에 나탄 예언자와 가드 예언자를 통하여 지속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사무엘서의 본 내용인 다윗 왕가의 이야기는 이 왕가의 급변하는 내부 사정을 다루는데 솔로몬의 즉위에 관한 보고로 끝을 맺습니다. 이 구도에 따르면 열왕기 상권의 처음 두 장은 2사무 21―24장으로 중단된 다윗 왕가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사무엘기의 내용
사무엘기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엮어놓은 기록이 아닙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자료들을 한데 모은 문학 작품입니다. 이 책은 아마도 솔로몬의 치세 아래 편집되고, 587년 유다왕국이 무너진 다음 신명기 계열(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이라 불리는 역사학파의 손에서 수정과 보충을 거쳐 재편집되었을 것입니다.
제1부(1사무 1―7장) 사무엘의 생애
1부는 사무엘이 태어날 때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위대한 판관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를 다룹니다. 첫 부분은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둡니다. 그는 성소(聖所)와 연결되면서 예언적 사명을 받습니다. 이 부분의 저자는 사무엘 안에서 그 시대를 위한 구원자의 참모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11의 ‘면도칼을 대지 않는다’는 한나의 서원은 삼손의 경우처럼 주님께 바친다는 뜻인데 나지르인의 서약에 같은 말이 있습니다. 2장 한나의 노래는 루카복음 마니피캇에 영감을 준 것입니다. 사무엘이 늙어가자 필리스티아의 위협으로 불안해진 백성은 그에게 임금을 요구합니다. 7장(7,15-17)마지막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관심사와 문체가 나오는데, 이 역사가가 판관들의 역사를 매듭지으려는 뜻에서 7장을 재편집하였을 것입니다.
제2부 사무엘과 왕정제도(8―12장)
왕정에 대한 논란과 사울과의 얽힌 이야기들이 제2부의 내용입니다. 일단 임금을 내세운 다음, 사무엘은 뒤로 물러납니다.
제3부 사울 왕(1사무 13―15장)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아말렉족과 벌인 전쟁을 다루는 장들은 여러 사료를 한데 모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사울시대에 필리스티아인들과 치른 전쟁들에 관한 옛 전승들이 발견됩니다. 사울은 싸움에서는 이기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그의 생애에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말렉과의 싸움 이야기는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탓으로 사울 왕조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문학 기법으로 처리된 서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느님께 두 가지 불순종을 저지르는데,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대신 다윗이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무엘이 암시적인 말로 그에게 알립니다. 사울의 폐위는 그를 직접 계승한 다윗의 이야기에 꼭 필요한 서막입니다.
제4부 다윗의 등극과 사울의 몰락(1사무 16장―2사무 5장)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 전반부]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의 이야기를 다윗이 왕위에 등극하기까지와 등극한 이후로 나누어 이부작처럼 소개하는데, 이 부분은 전반부에 해당합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에 사무엘에게서 성별을 받고 사울을 섬기게 되는데, 필리스티아의 거인 장수를 쓰러뜨리면서 주목을 받게됩니다. 그는 곧 위대한 장군이 되고 사울의 아들 요나탄을 비롯하여 모든 이의 호감과 애정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사울에게 병적인 시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는 사울을 피하여 방랑생활을 시작합니다. 사울과 요나탄이 길보아 전투에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하여 죽은 다음, 다윗은 사울의 추종자들과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고 승리에 승리를 거듭합니다.
제5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다(2사무 6―8)
[다윗의 왕위등극 설화 후반부]
다윗은 예루살렘에 계약궤를 안치시킴으로써 자신이 정복한 이 성읍을 왕국의 수도로 성별합니다. 나탄의 예언은 다윗 왕조에게 호의를 보이며 이 왕조를 왕정 계승의 핵으로 확고히 다집니다. 8장의 전쟁 기록은 예루살렘의 왕정 창시자가 실제 왕국의 정복자였음을 증언합니다.
제6부 다윗왕(2사무 9―20장; 1열왕 1―2장)
열왕기상권 2장까지 이어지는 다윗왕의 여러 사건들이 나오는데 솔로몬의 등극에 귀결됩니다. 솔로몬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와,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장애가 되는 다윗의 두 아들, 암논과 압살롬(그리고 아도니야)이 제거되는 이야기가 이 후반부에 속합니다.
3.사무엘기記와 이스라엘의 역사
①사무엘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기간을 다루는데, 적어도 그 마지막 시기는 정확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사무엘기는 기원전 970년 솔로몬이 출현하기 직전 다윗의 노년기까지 우리를 안내합니다. 초기 역사에 속하는 사무엘서의 몇몇 전승 사료들은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둡니다. 필리스티아의 지배에 관한 정보, 특히 그들이 쇠 다루는 일을 독점했다는 정보(1사무 13,19-21), 세밀하고 정확하게 장소를 표기하면서 여러 가지 싸움을 묘사하는 이야기들(1사무 13; 17; 31), 도망자 다윗의 파란만장한 편력기 등이 이런 전승 요소들입니다. 또한 다윗과 사울 집안 사이에 얽힌 이야기, 2사무 8장 다윗의 전투, 압살롬의 반역 등은 순도 높은 전승 사료입니다. 기원전 천년기 초기의 다윗 제국에 대한 정보는 솔로몬의 전성기 통치를 잘 설명해 줍니다. 다윗 신하들의 직책에 관한 기록(2사무 8,15-18; 20,23-26)과 2사무 24장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통치구역의 조직을 확정지으려는 의지를 잘 드러냅니다. 또한 이 인구조사는 왕홀이나 궁궐도 없이 한평생 전사로 살다가 죽은 사울의 시대 이래 중대한 변화를 가리켜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②다윗이 실시한 인구조사는 군사적 목적, 일종의 군대개편에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 조치는 하나의 거대한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즉 드보라의 노래 여호수아의 聖戰등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옛성전(聖戰)에서 전력적인 전쟁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나라에 대한 어떤 조치로서 확실한 군대의 수를 손에 쥐고 싶어 했습니다. 왕으로서는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주도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기름부음은자로서는 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가지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느님의 징벌을 요청합니다(2사무 24,11-14).
③사무엘기에서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의 위협이 원로들에게 사무엘을 찾아가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을 암몬인들의 정복자이자 야베스 길앗의 구원자로 소개하는 1사무 11장의 전승을 잘 살펴보면 왕정 시작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승이 사울의 즉위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과 역사적으로 일치하는지는 의문입니다.
4. 전승사료와 편집 요소들
①주석가들은 “다윗 왕위 계승사”(2사무 9─20과 1열왕 1─2)가 비교적 일관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창조 이야기로(창세 2) 시작하는 옛 민족사를 전해 주는 오경의 “비사제계”(J;야훼계) 전승과 거의 같은 문학적 특성을 보여 준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압살롬의 반란 이야기를 보면 구체적이고 생생한 세부 묘사로 가득한데, 이 사실로 미루어 이 이야기는 후대에 편집되었다기보다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쓴 작품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전체적으로 객관적 상황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저자의 개인적 성향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계승사”의 핵심을 이루는데, 솔로몬의 탄생 이야기로(2사무 9─12) 시작하여 아도니야의 패배 이야기로(1열왕 1─2)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솔로몬 등극사”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궁정의 묘사는 이미 다윗 임금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굳어진 구두 전승에서 그 내용을 추출하였고 다윗 임금의 이상화(理想化) 과정은 후대의 편집에까지 연장됩니다.
②다윗의 왕위 등극사가 생각보다 더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볼 때, 중복 기사들은 매우 특이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섬기기 위하여 입궐하고, 다윗을 해치려는 사울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며, 요나탄이 다윗의 편을 들고,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피신하는 이야기, 또 지프 주민들이 다윗의 피신처를 밀고하고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 주는 일화 등은 모두 중복되어 나옵니다. 이런 중복 기사가 있지만, 다윗 왕위 등극사와 다윗 왕위 계승사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아서 두 저자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 곧 예루살렘 궁궐 서기들이 다윗 임금을 찬양하는 구두 전승들을 뽑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다윗 임금의 이상화(理想化) 과정은 편집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어집니다. 이 사실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1사무 16장의 의도가 이 두 번째 임금을 첫 번째 임금과 같은 차원에 놓고자 하는 데 있으며, 분명히 후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15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③사울이 벌인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들은 하나의 편집 작품입니다. 여기에서 사울 시대에 필리스티아인들과 치른 전쟁들에 관한 옛 전승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전승들에서 진짜 영웅은 다윗의 친구인 요나탄입니다. 그리고 이 전승들은 대체적으로 사울에게 적대적인 경향을 보입니다(1사무 13─14). 아말렉과의 전쟁 이야기가(1사무 15) 옛 전승에서 비롯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탓에 사울 왕가가 멸망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도입된 것으로, 문학적 손질 작업을 거쳤을 것입니다. 사울의 파멸은 다윗의 이야기에 꼭 필요한 서막입니다.
④왕정의 기원을 다루는 1사무 8─12장에도 다양한 기원을 가진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벤야민 지파의 설화에서 나와 각색된 것임에 틀림없는 암나귀 이야기(9,1─10,16), 미츠파에서 제비로 임금을 뽑은 전승(10,17-27), 사울을 적국 암몬을 물리친 영도력 있는 판관으로 그리는 11장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들입니다. 8장은 왕정의 제정과 함께 야기된 신학적 문제점을 곧바로 보여 줍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무엘이 동족들에게 경고한 임금들의 악습은 기원전 이천 년대 말기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행해졌던 임금들의 관행을 상기시킨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8장은 학계에서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옛 전승들일 것입니다. 12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고별사 역시 전형적인 신명기계 역사가의 작품입니다. 이 모든 작품에서 사울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라는 사실만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될 뿐입니다. 저자의 관심은 누가 첫 번째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왕정 제도 자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⑤사무엘기의 첫 부분에서(1사무 1─7) 중심인물은 사무엘입니다. 이 인물은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소개되는데, 때로는 성소와 관련지어지며 예언직의 사명을 받습니다. 동시에 저자는 그에게서 당대의 참된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1,27-28 참조). 이것은 사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가 사무엘의 선택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임금을 성별한 그가 진정 주님의 마음에 드는 심부름꾼임을 부각시키려는 것입니다. 1─7장의 다른 요소들은 사무엘기 전체의 주요 관심사들을 고려해야 그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일례로서 계약 궤에 얽힌 사건들이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이 사건들이, 다윗이 세운 도성의 보호자로 삼은 거룩한 궤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5.사무엘기의 주제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옛 역사의 한 부분이 가르쳐주는 것보다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겨줍니다. 그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① 왕정
가장 주목할 주제는 왕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이 제도의 모호함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십니다. 그런데 이 왕정 문제는 주님과 그분의 중재자인 사무엘이 사울의 선택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왕정제도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풀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요구하는 백성의 주장은 단호하게 단죄를 받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인간의 왕정 자체가 인간의 뜻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의 군주제도는 민주적이거나 전제적인 것이 아니라 신정(神政)에 예속된 채 남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② 사무엘의 권위와 사울의 몰락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전설담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한 종교인의 최상 권위를 드러냅니다.
③ 다윗
다윗 왕조는 문헌형식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강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문헌적으로 다윗왕조는 오경문헌전통인 탈출전통(계약전통,시나이전통)과 다윗전통의 큰 결부점이 됩니다. 탈출전통과 다윗전통은 구약의 역사를 이루는 두 가지 큰 전통입니다. 다윗왕조의 이야기는 가나안 점유 이후부터 신명기사가에 의해 첨부, 저술되었습니다. 다윗왕조로부터의 이야기는 721년부터 587년 이스라엘의 대 파멸에까지 이어집니다. 신명기사가의 반성적 문헌기록은 판관시대가 이미 다윗왕조를 향해 배열되었음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사가는 과거로부터의 회상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반역을 명백히 합니다. 초대왕 사울에 이어 한 군인이 전 이스라엘위에 군림하는 왕위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한 행로를 냉철하고 실사주의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④ 왕정에 관한 교훈
⑴사울은 그의 이름이 의미하듯 백성이 ‘요구하였기’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경건한 사람의 권위를 드높여 줍니다. 사무엘기는 사울의 파멸을 불러온 잘못들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사무엘기는 예배의 대상과 관습과 인물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만져서는 안 될 계약 궤와(2사무 6,7) 예루살렘의 제단에(2사무 24) 관한 일화는 그 좋은 예들입니다.
⑵사무엘기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임금은 다윗입니다. 저자는 다윗이 용맹한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음을 드러내고 그가 거둔 전공들,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호감, 그의 관대함과 겸손 등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애초부터 이상적 인물로 부각시킵니다. 나탄은 이스라엘에서 임금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윗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한편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후손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자식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리를 물려받으리라는 보장을 받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서서히 부상합니다.
⑶사무엘기는 결국 이스라엘 왕국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기록입니다. 나탄의 예언에 따라(2사무 7), 다윗 집안은 몇몇 임금들이 잘못을 저질렀으나 예루살렘의 왕좌를 영원히 차지해야 합니다. 이 예언의 골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편집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주제도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믿었던 시기에 나왔을 이 종교적 이념은 사무엘기를 구원의 역사 가운데 자리 잡게 하는 특별한 행운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날 왕국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패하고 왕족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사건이 바로 이를 결정적으로 증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 허락하신 영원한 보증을 계속 믿으면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약속된 인물이 나오기를 고대합니다. 그분이 바로 이상적 임금인 메시아인데, 인성으로 볼 때 그분은 기원전 천년 경에 주님께서 뽑으신 이의 후손입니다.
Ⅱ. 사무엘(SAMUEL;Σαμουὴλ)
1.왕정의 동기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스라엘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지파들과 종교적인관계를 설정하고 위험이 처할 때마다 각 지파간에 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판관시대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부족 동맹이 사람마다 제 멋대로 살던 판관시대를(판관 21,25) 180년 가까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게 정의된 규정 외에는 지파간의 상호 행동을 제한하지 않았고 달리 표현하면 서로 내버려둔 상태로 존속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동맹 조직이 계약의 근본을 나름대로 꾸준히 지켜갔기 때문인데 이는 초기 이스라엘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판관시대의 이스라엘은 지파들 사이의 과열경쟁을 막을 수도 없었고(판관 12,1-6) 지파간의 범죄에도 시정 방법이 없었습니다.(판관 19―20) 그러나 판관 기드온이 그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옹립하려는 왕을 거절했듯이(판관 8,22) 이스라엘은 이 200년의 기간동안 누구도 왕정국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아직은 오직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었고 그들은 당시의 카리스마적인 인물인 판관들이 하느님의 대행자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구원해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지파들의 집결로는 역부족인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족동맹 종국의 시기는 기원전11세기 후반에 왔고 그 후 한 세기도 안 되어 이스라엘은 당대의 두드러진 강국(다윗왕조)으로 부상하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 전역사를 통하여 가장 의미 깊은 시기입니다.
기원전 1050년에 필리스티아와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실로에 있는 하느님의 궤를 싸움터로 옮겨(에벤에제르;도움의 바위) 하느님의 현존이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을 믿었지만 결과는 참패였고 이스라엘이 목숨보다 귀하게 모셨던 계약의 궤는 그 까닭으로 오히려 필리스티아에게 빼았기고 말았습니다(1사무 4장).필리스티아는 전염병이 만연하자 계약의 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 보냈는데(1사무 5―7) 그 후 하느님의 궤는 다윗이 찾을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키르얏 여아림에 방치 되어있었습니다.
왕정제는 한때 그 위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이 왕국도 남북분단의 비극을 맞게됩니다. 이러한 왕정시대 안에 사무엘이 포함된 것은 그가 부족동맹체제에서 왕정제도로 넘어가는 시기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을 왕국으로 변환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이스라엘의 특성을 고수한 인물입니다.
2. 마지막 판관 사무엘
사무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지르인으로 서약 되었으며 그는 젊은 시절을 노 사제 엘리의 보호아래서 부족 동맹의 중앙 성소에서 보냈습니다. 대사제 엘리의 사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판관의 자격으로 중요한 성소를 옮겨 다니며 순회지도 한듯합니다(1사무 7,15-17). 사무엘은 모세와 흡사하고 이스라엘은 사무엘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신뢰하고 존경해마지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으로,예언자로,판관으로,정치인으로 다양하게 결합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사무엘이 이스라엘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한 것은 그가 두 시대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판관시대가 끝나고 그와 함께 왕정시대가 시작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자 사무엘은 자신의 두 아들을 판관으로 임명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고향 라마로 은퇴하여 성자로서, 예언자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사무엘의 막강한 지도력이 내 외의 위협으로부터 백성들을 안정시키기는 했으나 라마를 찾아온 원로들은 사무엘의 두 아들은 능력이 없고 사무엘 자신은 늙고 병약하니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우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1사무 8,5).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이제로부터 육적인 욕망으로 빚어지게 될 모든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이라는 경고를 한 후,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예언자이며 이스라엘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한 종교인의 최상 권위를 드러냅니다.
3.사무엘의 고별사
백성들의 왕정(王政) 도입운동은 신정(神政)제도를 옹호하는 사무엘의 반대에 부딪치는데 에프라임지파와 몇몇 지파들도 왕정제도를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이민족들이 채택한 왕정제도의 폐단을 알려주면서 백성들을 설득하려합니다. 사무엘은 이제로부터 육적인 욕망으로 빚어지게 될 모든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이라는 경고를 한 후,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사무엘은 살아있는 동안 백성의 존경을 받았고 라마에서 운명합니다(1사무 25,1). 그는 이스라엘의 부족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을 기울인 인물입니다.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뒤 일선에서 물러날 때 한 사무엘의 고별사입니다.
◉사무엘의 고별사 [1사무 12,2-4]
“나는 젊어서부터 이날까지 여러분을 이끌어 왔소.여기 내가 있으니 나를 고발할 일이 있거든, 주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 앞에서 하시오.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거나 누구의 나귀를 빼앗은 일이 있소? 내가 누구를 학대하거나 억압한 일이 있소? 누구에게 뇌물을 받고 눈감아 준 일이 있소?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여러분에게 갚아 주겠소.”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를 학대하거나 억압하신 일도 없고, 누구의 손에서 무엇 하나 빼앗으신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였고 찾아내라고 자신을 백성들 앞에 내어놓은 지도자로서의 사무엘의 청렴과 당당함이 보입니다. 사무엘에 의해 첫 왕이 옹립되고 다시 사무엘에 의해 다음 왕이 기름부음을 받게됩니다. 사무엘은 왕정제도를 원하지 않았지만 필리스티아의 세력이 확장되어 위협적인 상황이 되자 사무엘도 왕국설립에 다소 능동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무엘의 생각에는 왕권역시 하느님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민족역사의 전환점에서 모든 문제들을 경험하였던 역사적인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Ⅲ. 초대(初代) 임금 사울 (SAUL;Σαούλ)
1. 왕위 옹립의 배경
왕정이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마음에는 있지도 않은 것 이었지만 대체로 백성은 이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백성들은 벤야민 출신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사울의 왕위 옹립에는 몇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⑴하나는 전격적으로 라마에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고(1사무 9,1-10,16), ⑵하나는 사울이 암몬과 싸워 이기고 길갈에서 백성들에게 임금으로 지지와 환영을 받는 것이며(11장), ⑶다른 하나는 사무엘이 왕위 옹립을 분노하면서도 양보하고 미츠바에서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는 일을 주재하는 것으로(1사무 8; 10,17-27;12),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한데 묶어 편집했기 때문에 순차적인 이해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아무튼 옛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하는 왕정(王政)이라는 이스라엘의 비상대책이 처음부터 완전 호응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사무엘의 개인적 감정은 자세히 기술되어있지 않으나 아무튼 민중의 요구에 직면하여 이 일을 실행한 것은 확실하며(1사무 8,4,) 사무엘은 이 모든 과정의 지도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사울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2. 초대 왕 사울
사울은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백성의 요구로 희생양이 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요구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벤야민 지파 키스의 아들로 1사무 9,2의 표현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 만큼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 겸손하고 솔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암몬족이 야베스 길르앗을 포위하고 치욕적인 승복 조건을 내세우자(조건은 야베스 길르앗사람의 오른쪽 눈알을 뽑는 것이었음) 이 말을 전해 듣고 주님의 영이 임하여 크게 분기가 치솟은 사울은(1사무 11,6-7) 소를 잡아 잘게 썰어 이스라엘 전 지파에게 보내며 사무엘과 사울을 따라 나서지 않으면 이 모양이 되리라는 선고를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일제히 따라나섰습니다. 이 싸움은 대승이었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백성들은 하느님의 영이 사울에게 내렸음을 믿고 길갈의 성소에서 엄숙히 왕으로 옹립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곧 사울에게 쏠리었습니다.사울의 초기 활약은 성공적이었고 백성들도 그를 신뢰하였습니다. 성서 본문이 복잡하게 뒤얽혀있어 교전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마침내 필리스티아 점령군은 쫓겨나고 이스라엘에 희망이 돌아왔습니다. 사울은 그의 통치 전 기간 동안 전쟁을 하며 보냈습니다(1사무 14,47). 사울은 관례에 따라 기름부음을 받고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등장한 임금이었으나, 12지파의 부족동맹체제는 과거와 같이 남아있었습니다. 사울은 호화로운 궁전도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유다의 지지를 받았고 전국적으로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사울의 통치는 순조롭게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에게는 기사회생의 휴식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울의 통치기간은 대략 기원전 1020-1010년의 10년간이었을 것입니다.
3.버림받는 사울 왕
사울은 비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외모도 준수하고 겸손했고 전성기에도 도량이 넘치며 기꺼이 자기 과오를 고백하기도 하고 언제나 대담하고 용감했지만 정서 불안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번번이 흥분하고, 자신이 적대시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압박감을 받으며 잠깐씩 평정을 찾다가는 이내 암울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으니 그는 지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고 종국에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사울은 카리스마적인 초기의 능력을 무수히 보여달라는 백성들의 말없는 요구가 무서운 긴장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필리스티아는 계속 침략해왔고 부족 동맹들은 암암리에 독립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사울 왕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백성의 신뢰를 받고 있는 사무엘과의 결별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은데 사무엘이 새로운 체제를 처음부터 불신했기 때문에 그것을 배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음직 합니다.
①사울은 전쟁에서는 승리하지만 하느님께 저지른 두 가지 불순종으로 사무엘에게 버림을 받게 됩니다.
⑴13,7-14는 사무엘이 사울을 버린 내용으로 10,8과 관련된 것입니다.
“당신은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시오. 나도 뒤따라 당신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을 드리겠소. 내가 당신에게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시오. 그때에 가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소.”(1사무 10,8)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라는 것은 사울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말고 사무엘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의지에 모든 것을 맡기라는 명령입니다. 이레가 지나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군사들은 사울을 떠나기 시작하고 사울은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가져오게 하여 번제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은聖戰에 나가기 전에 먼저 주님께 제사를 지내고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임금이 아니라 사제의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사제의 고유권한을 침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2사무 6,17(2사무 24,25; 1열왕 3,4.15;8,63-64 등 같은 경우 참조)에서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1사무 13장은 옛 전통에서 나온 임금의 특권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⑵두 번째 15,1-30은 헤렘(herem)의 법을 어겼다는 것이 결정적일 것입니다. 1사무 15,3 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족을 전멸하고 남자와 여자,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취할 것은 취합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15,21-23)
헤렘(herem)은 히브리말로 바친다,근절하다,금한다의 뜻으로 헤렘의 법은 성전(聖戰)에서 취할 행위를 규정한 성스러운 법을 말하는데 이교신앙을 가진 적이란 하느님께 반대되는 민족이므로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다 파괴하여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전멸의 사상은(신명7,1-6)이교의 의식에 빠져들 위험을 예방하려는 종교적차원에서 실행된 것입니다.
②사울 왕에 관한 전승 자료들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사울의 승리가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이며 자신의 광기로 이리저리 쫓기다가 암흑으로 빠져든 절망의 사람으로서 입니다. 이 불행한 왕의 설화를 통해 인간의 비극을 열어 보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어두운 운명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사울은 이 과제에서 좌초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 역시 하느님에 의해 지배된다는 위대한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의 원의로 기름부음 받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의 소원대로 그를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 어떤 전통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사울도 삼손처럼 카리스마와 욕망사이에서 좌절하며 결국 멸망합니다.
③사무엘은 왕정이라는 새 체제가 옛 질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나 사울이 전래된 규율을 분수에 맞게 지켜나갈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왕으로서의 권한을 장악하려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울의 선임을 공적으로 취소해버렸습니다. 이 처지는 사울의 몰락을 가속화 시켰으니 그의 지위가 온 이스라엘의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왕으로 선임된 카리스마가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카리스마적 열정대신 극심한 우울증이 그를 사로잡았고(1사무 16,14-23) 음악을 들어야 겨우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성을 그 한계에 달하도록 몰아친 것은 젊은 영웅 다윗의 인기였습니다. 이제 사울은 그의 여력을 다윗을 추격하는데 쏟게됩니다.
Ⅳ. 사울과 다윗
1.사울의 몰락
①1사무 16장부터 2사무 5장까지는 전체적으로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성장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전개됩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이 기름부음은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임금으로서)사울을 치료하기 위하여 음악가로서 사울에게 옵니다. 다윗의 비파를 들으면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지다가 어느날은 비파연주를 하는 다윗을 죽이려고도 합니다.
1사무 16,13 ‘하느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1사무 16,14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악령이 차지합니다. 사울 왕이 보여준 증세들은 분노(1사무 17,9; 18,29 참조), 발작(1사무 18,10; 28,20 참조), 살인(1사무 19,9; 22,19 참조), 불안(1사무 16,23 참조), 그리고 자살(1사무 31,4 참조)이었습니다.
②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장군 골리앗을 죽인 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사무 18장은 다윗이 백성들 뿐 아니라 사울의 아들 요나탄과 딸 미칼에게도 사랑을 받았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사울의 질투심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18,25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 다윗을 죽게할 생각으로 필리스티아인의 포피 백개를 가져오면 미칼과의 혼인을 약속합니다. 다윗은 미칼을 얻기 위해 포피 200을 사울에게 바칩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1사무 18,8) 광기어린 질투심으로 그를 죽이려 했으므로 다윗은 도주하여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③1사무 28,3 사울은 영매와 점쟁이들을 나라에서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28,8 사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부하 둘을 데리고 밤에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자신이 금지한 악습에 의지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내었고 사무엘로부터 자신의 죽음을 전해 듣습니다. 사울은 불리하기 짝이 없는 길보아 전을 비통한 심정으로 임했고 그의 세 아들은 살해되고 사울은 중상을 입고 자결하였습니다(1사무 31,4). 필리스티아는 이들의 시신을 벳 산의 성벽에 매달았으며 야베스 길앗 사람들이 보은의 정으로 이 시신을 거두어 정중한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1사무 31,13).
2.사울을 사로잡은 질투
사울은 사무엘과의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불같은 열정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울은 사무엘에게 버림받고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가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 것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홀로남고 주위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에서 왔을 것으로 봅니다. 그가 본디 정열적인사람이었기에 사무엘과 백성에게 버림받은 상처도 컸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 일생을 불안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주변사람들을 의심하고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종국에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다윗이 자신을 축출하고 왕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현실로 믿게 되면서 그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울의 이러한 예측은 맞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아무래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것을 인정지만 질투의 악이 이미 그를 사로잡아버렸습니다. 사울은 멈추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도록 악마에게 메어버렸습니다. 그토록 선하고 겸허했으며 왕 같은 것은 꿈꾸지도 않았었는데 무엇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는가? 몇 가지 제의적 규정들 정도는 자신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그 마음 안에 왕으로서 가진 권력의 위험이 도사렸던 것입니다.
3.사울과 다윗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의 젊은이로 음악에 능했고 사울이 측근에 두고 있던 장래성 있는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다윗의 공훈이 자신의 인기를 무색케 하자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광기어린 질투심으로 종종 그를 죽이려 했으니 다윗은 마침내 도주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다윗은 유다 광야로 도망했고 이때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을 통해 다윗은 400의 정예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기회 있는 대로 필리스티아를 공격하고 사울을 피해 다니는 생활을 계속했으며 이 기간 동안 두 번 결혼 했는데 자신의 입지를 위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다윗은 600으로 늘어난 부하들을 데리고 갓의 왕 아키스에게 몸을 의탁하였습니다(27,1-4). 필리스티아왕은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치클락이라는 성읍을 유다의 영지로 주었습니다. 다윗은 유다를 침공한다는 거짓 보고를 하며 아말렉과 남부의 다른 부족들을 유린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다윗은 유다의 네겝 지방의 지파들에게 전리품을 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동포들에게 자신이 충실한 친구라는 것을 믿게 했고 다윗의 군사력은 증대해갔습니다.
4. 헤브론의 유다왕 다윗 (DAVID;Δαυὶδ)
사울 가문의 살아남은 아들 이스 보셋은 왕권을 주장했고 트란스요르단 마하나임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 되었는데(2사무 2,8), 필리스티아의 손에 미치지 않는 일종의 망명 정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왕이 되었습니다(2사무 2,1-4).다윗은 헤브론지역의 유다 왕이었지만 여러 부족을 포함한 넓은 지역에 그 힘을 미치고 있었으니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이 스스로 왕임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옆에 유다라는 별개의 실재국가가 출현한 것입니다. 이스 보셋은 무력했고 다윗은 그수르, 암몬족과 우호관계를 맺어갔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했습니다(2사무 3,17).이스 보셋의 왕권 회복의 공신 아브네르와 그 지지자들이 사라지자 이스 보셋은 두 명의 군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5.통일 이스라엘의 왕 다윗(대략 기원전1010-971년)
백성들은 헤브론의 다윗에게 몰려가 장엄한 계약 의식을 거행하고 환호하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2사무 5,1-3). 단순히 사울 왕권의 이스 보셋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다윗을 왕으로 옹립한 결정적인 요인은, 백성들이 다윗을 하느님의 영이 내린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새 왕국은 옛 질서에 비하면 크게 다른 특색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세력 기반이 부족 동맹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파의 체제는 이미 눈에 띄지도 않았고 남부 헤브론에서 다윗에 의해 통치되던 나라와, 이스 보셋의 북부가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막강한 나라로 통합된 것입니다. 다윗은 키르얐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고(2사무 6장), 에브야타르와 차독을 새 사제로 임명하였습니다.
6.다윗 왕국
다윗은 공적인 국가의 성소에 계약의 궤를 안치하고 아울러 제관직도 확립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뛰어난 수완이었으니 이러한 조치는 우리가 상상한 것 보다 더, 각 지파의 민심을 예루살렘으로 쏠리게 하는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곧 자신의 궁전을 세웠는데(2사무 5,11), 계약의 궤를 안장할 성전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계약의 궤는 원래 운반할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고(탈출 37,1-9; 민수 10,3), 그러므로 왕실의 후원 하에 영구적인 성전을 세운다면 전통과의 단절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지파의 원로들이 옹립한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권의 지배 하에 조직적으로 다스려지는 제국 안에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은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새 수도는 다윗 개인의 영지였으며 이스라엘에 합병된 가나안 부족들은 지파의 소속이 아니라 다윗의 신하였던 것입니다. 이방 제국들과의 승전도 12지파의 소집에 의한 군대가 아니라 다윗 개인의 군대였으며 굴복 된 모든 나라들은 다윗에게 충성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왕권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계약의 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소를 국가의 공식적인 기구로 육성하였습니다. 종교문제는 두 명의 사제에게 일임했고 다윗은 성전례를 아낌없이 후원하고 다채롭게 했으며 음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왕정시대의 인물 3-①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