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서 [2] 1⎯3장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Ⅰ.탄생예고 Ⅱ.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Ⅲ.메시아시대의 시작
Ⅰ.탄생예고 [1장]
The birth and hidden life of John The Baptist and of JESUS
1. 우리가운데 이루어진 일
1⎯3장은 세례자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유년기 사건들을 전하는 특별한 이야기들인데 루카는 두 탄생 예고를 전함에 있어서 예고(豫告)와 소명(召命)이라는 두 가지 구약성경의 문학양식을 혼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면서 루카복음의 주제들 즉 기쁨,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특별한 사랑, 모든 민족에게 열린 복음의 선포 등 주요 주제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이방인이었고 유다인이 아닌 단 한 사람의 마케도니아 출신 신약성경 저자입니다. 루카는 미래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다림의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가 이미 우리 일상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전하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80년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루카복음서에는 마르코와는 다른 예수 어록과 자신의 특수사료(60개)를 종합하여 기록하였는데, 루카복음서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죄인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당시에는 주로 이방인이나 과부, 지도층들이 죄인이라고 분류한 창녀, 세리, 태생환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돋보이고 오늘날까지 많은 감동을 줍니다. 1장에서는 4명의 인물에게 나타난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인간역사 개입에 이어서, 복음서의 많은 치유와 만남의 사건들을 저자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계시가 ‘우리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1,1-4)
①루카의 서론은 저자가 무대 전면에 등장하는 일인칭단수를 사용합니다. 입문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저자는 죄인과 가난한자 그리고 이방인을 위해 열려있는 하느님 나라를 충분한 시간과 자료를 가지고 그의 신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서두에 이 글이 한 역사가의 용의주도한 조사의 산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루카는 자신 안의 어떤 큰 힘에 이끌려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와 동고동락하면서 그를 통해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살아있는 분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병든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매력(魅力;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을 느꼈습니다. 루카는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도 했지만 한편 죄악으로 곤란함에 빠져있는 영혼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문화권의 다신교숭배자들의 지역에 살던 저자는 그러한 열망을 마음에 품었음직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 있게 기록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②‘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은 하느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말합니다. 루카가 저술하려는 이 작품의 소재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명 수행을 둘러싼 모든 일입니다. ‘이루다’라는 동사의 수동태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일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복음서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③테오필로스(Θεόφιλε)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그리스어인데 헌사(獻詞)는 역사가들의 일반 집필 형식입니다. 어떤 해설은 두 권의 책을(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 출판해 줄 출판사 운영자라고 말하기도합니다. 테오필로스는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가상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라는 표현에 의하면 이 사람은 교회의 가르침을 이미 배운 사람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자한 것으로 보입니다.
④루카는 복음이라고 쓰지 않고 이야기라고 씁니다. 복음을 구원과 치유의 이야기로 오늘 우리에게 해석하려는 의도입니다. 루카는 목격증인들의 자료를 따라가면서 즉, 이 책의 모든 자료를 전통에서 이어받았음을 밝히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학작품을 창조합니다. 루카는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후 새롭게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순서대로 썼다고 말하는데 이 순서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문학적이고 교훈적인 순서라는 사실을, 이어지는 이 복음서 내용에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서문의 말들은 저자가 ‘이루어진 일들’대한 의미를 파악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1,5-17
성전에서 전례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동안,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요한의 출생과 사명을 예고합니다. 즈카르야에게 내린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하려고, 루카는 발현(판관 6,11-24), 기적적 탄생의 예고(창세 16; 17; 18; 판관 13), 예언자들의 신탁(말라 2,6; 31,1.23-24; 이사 40,3)이라는 전통적 주제와 함께 그리스 말 구약 성경의 언어를 이용합니다.
“유다 임금 헤로데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1,5-7)
①여기에서 유다는 유다지파가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부르는 것처럼 유다인들의 영토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3,1; 5,17; 사도 9,31에서는 유다인들의 방식에 따라 팔레스티나 땅의 남부 지역만 가리키는 데에 적용합니다.
②이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죽은 대(大)헤로데입니다. 마태오(2,19)복음서에서 아기예수를 쫓던 헤로데 안티파스 죽음을 전하는데 요세프스의 유다고대사에 의하면 기원전 4년의 일입니다. 이 임금은 유다의 대사제 히르카노스 2세의 시종장 안티파테르의 아들로서 기원전 73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41년 유다의 영주가 되고, 이듬해에는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 임금으로 임명을 받았고 기원전 4년에 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적어도 기원전 4년 이전에 탄생하셨습니다.
③이사악(창세 11,30), 야곱과 에사우(창세 25,21), 요셉과 벤야민(창세 29,31), 삼손(판관 13,2-3), 사무엘(1사무 1,5) 등 기적적으로 태어난 이들의 어머니처럼, 엘리사벳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본디 이 ‘불임’은 늘 수치로, 때로는 천벌로까지 여겨졌습니다(레위 20,20-21; 2사무 6,23).유다의 랍비들은 하느님 앞에 파문 당하는 일곱 유형 중의 하나를 자식 없는 자라고도 했습니다. 사제에게는 치명적 약점이었으나 그 때문에 즈카르야는 하느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었고 구원의 대역사에 동참하는 인물이 됩니다.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1,8)
사제들은 파스카축제, 초막절 등에는 모두 함께 참석했지만 일 년에 한 두 차례만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제들에게 분향은 일생에 한두 번 오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아마 2 만 명 정도의 대사제가 있었던 것 같고 대사제 밑에는 또 천 명 정도의 사제가 있었습니다. 성전 제사의 당번은 조 별 제비뽑기 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즈카르야는 사제단 24개조 중 아비야조에 속해있었습니다(1역대 24). 사제단의 각 조는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바칠 때에 분향 제단에서는 향도 피워 올렸습니다. 사제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소임을 맡는 것을 매우 드문 영광으로 여겼고 그 행운이 즈카르야에게 온 것입니다.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1,13-15
①술을 마시지 않음은 나지르인, 곧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때로는,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의 생활을 가리킵니다(민수 6,2). 삼손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러한 고행의 생활을 하리라고 예고됩니다(판관 13,4.7.14). 이러한 삼손, 그리고 예레미야나 ‘주님의 종’처럼 구약 성경의 여러 인물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 봉헌됩니다(판관 13,5; 16,17; 이사 49,1.5; 예레 1,5). 이는 그들이 특정 사명을 수행하도록 미리 선택되었음을 뜻합니다.
②즈카르야가 무엇을 청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부에서는, 그가 사제로서 공식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에는 온 백성의 관심사, 곧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해 주십사는 간청을 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사적으로는 아들을 청하는 기도를 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는 기도는 젊을 때부터 늘 바쳐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문맥도 이러한 사적 기도를 전제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사실 이 두 가지 기도가 다 받아들여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에게 태어날 아들이 메시아의 선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③요한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이름 요안네스(Ἰωάννης)는 히브리 말 이름 여호하난을 그리스 말식으로 옮긴 것으로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이는 이 아기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첫째 표징임을 시사합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1,17)
①“그분보다 먼저 와서”는 요한이 말라 3,1.24에 예고된 대로 주님의 선구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마태 11,14와 17,12-13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종말에 오리라고 고대되는(말라 3,23) 엘리야로 말해지며 마르 9,13에도 이러한 사실이 전제됩니다.
②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는 것은, 말라 3,24와 집회 48,10에 따르면, 장차 올 엘리야가 수행하게 되는 사명입니다. ‘준비하다’는 76절과 3,4(마르 1,3)에서 요한의 사명을 서술하는 데에서도 다시 쓰이는데, 이는 주님의 오심에 관한 (칠십인역에 따른) 이사 40,3의 말씀에서 빌려 온 표현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1,18-20)
①천사는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고 했는데 즈카르야는 반문합니다. 천사 가브리엘(Gabriel)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며 다니 8,16에서는 종말의 때를 알려줍니다. 즈카르야는 표징을 요구했고 천사는 때가 되면 이루어질 일을 믿지 않았으니 벙어리가 되어 있으라는 경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때’는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태어날 아기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②“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의 직역: “나는 (시중들려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 이는 페르시아 궁궐 안의 모습을 담은 표현으로, 임금 앞에 서 있는 이들은 최고위 관리들로서 이들만 어전에 들 수 있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들 가운데에서도, 영광 속에 계시는 주님의 면전까지 들 수 있는 고위 천사라는 것입니다(토빗 12,15). 다니 8,16-17과 9,21-27에서는 가브리엘이 구원의 시대를 예고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③요한이 태어나리라는 것이 인간의 구원을 알리시는 하느님의 메시지, 곧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그리스 말에서는 한 동사(에우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ομαι)가 됩니다. 이처럼 루카는 늘 “복음”(기쁜 소식; εὐαγγελίου)이라는 명사만 쓰는 마르코와 달리, 자기의 이 첫 작품에서는 항상 이 동사를 사용합니다(2,10; 3,18; 4,18.43).
④벙어리가 되라는 것은 의심으로 받은 벌이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수태를 믿게 하는 표징이며, 긴 침묵 속에서 세례자 탄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그의 불신에 대한 징벌이면서, 그가 믿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요청한 표징이기도 합니다.그리하여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는 그 깨달음으로 성령으로 가득 차 예언의 노래 부릅니다.
⑤백성들은 사제가 분향을 드리는 동안 성전 뜰에서 분향을 드린 사제의 축복을 받기 위해 기다립니다. 성전 밖으로 나온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가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밖에 있는 회중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대사제는 성소 안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향을 한 사제는 밖으로 나와, 보좌하는 네 명의 사제와 함께 백성에게 축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민수 6,23-26 참조).
⑥그는 배당된 2주간의 성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하느님의 메시지는 현실화 되어 아내 엘리사벳은 잉태의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3.예수님의 탄생 예고(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1,26-33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동네 나자렛에서 일어나는 이 이야기는, 요한의 탄생 예고와 문학 유형이 같을 뿐만 아니라, 둘이 매우 비슷하게 전개됩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을 먼저 31-33절에서 인용되는 이사 7,14; 9,6. 그리고 2사무 7,14.16의 신탁과 함께 전통적 메시아로 말하다가, 그다음에는 하느님의 아드님 그 자체로 말합니다(35절). 동정녀 잉태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유일하고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표징입니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우위성은 앞 이야기와의 대비로써 줄곧 부각됩니다. 즈카르야의 불신에 대립되는 마리아의 사려 깊은 신앙도 예수님의 우위성을 강조합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1,26-27)
즈카르야는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 요한탄생의 예고를 듣는데 이제 거룩한 성소가 아닌, 마리아의 일상 안으로 하느님의 천사가 찾아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1,28-29)
마리아는 즈카르야보다 더 놀랍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모습만 보고 놀라지만, 마리아는 천사가 한 말, 곧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어떤 깊은 뜻, 또는 자기의 독특한 소명을 짐작케 하는 말에 더 놀라는 것입니다.루카는 마리아가 12절의 즈카르야처럼 단순히 공포에 휩싸여 있지 않고, 천사가 한 말을 숙고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예기치 않은 이 계시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1,30)
직역: “너는 하느님에게서 총애(또는, ‘호의’)를 발견하였다.” 이는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느님/주님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하다’와 같은 표현으로(창세 6,8; 18,3 각주; 30,27 등), ‘호감을 사다’ 곧 ‘눈에 들다’를 뜻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1,31)
13절에서처럼, 천사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탄생에 관한 신탁의 표현을 이용합니다. 이와 가장 가까운 본문은 이사 7,14입니다(마태 1,23 참조).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마태 1,21에서처럼 바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2,11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로 불리십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1,32-33)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달리 절대적으로 “큰 인물”, 또는 “큰 인물” 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은 35절에서와는 달리 다윗의 자손 임금의 전통적 칭호로 쓰인 것입니다(2사무 7,14; 시편 2,7; 89,27). 헬레니즘과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 흔히 하느님의 칭호로 쓰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신약 성경에서 마르 5,7과 히브 7,1 외에는 루카만 사용합니다(루카 1,35.76; 6,35; 8,28; 사도 7,48; 16,17).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4-37)
①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을 하긴 하였지만, 다른 남자는 물론 요셉과도 관계를 맺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고 약혼 기간이 일 년씩 계속되면 결혼과 같은 구속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내용은 마태 1,18의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 둘 다 ‘동정 잉태’를 가리킵니다. 마리아도 18절의 즈카르야처럼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믿게 해 줄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여, 그의 물음은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마는 반면에, 마리아의 질문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38절 그리고 45절 참조).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물음은 예수님의 신비에 관한 더 완전한 계시를 끌어들이는 구실을 합니다.
②“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를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부여받는다는 17절과 비교할 때, 서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뚜렷해집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은 그분의 창조적이며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위업을 이룹니다(창세 1,2; 시편 104,30). 이 “영”은 또 메시아에게도 부여됩니다(이사 11,1-6).
③‘덮다’라는 표현은 탈출 40,35; 민수 9,18.22; 10,34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효력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④‘거룩하다’는 하느님께만 속함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⑤“하느님의 아드님”은 구약 성경에서처럼 루카에게서도 메시아를 일컫는 칭호입니다. 루카는 또한 이 칭호를, 예수님과 하느님을 일치시키는 신비로운 관계를 가리키는 표현 그 자체로 이용합니다. 가브리엘이 전하는 이 메시지에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32절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다는 내용의 새로운 충만성을 나타냅니다.
⑥여자가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룻 3,9; 1사무 25,41 참조. 마리아의 대답은 단순히 겸손이 아니라, 믿음과(45절) 사랑을 드러냅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서는“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로 옮기는데, 이 표현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천사의 말에 따라 모든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 단락은 동정녀 잉태의 신비를 전하려는 의도보다는 위대한 일을 이루기에 합당한, 주님을 맞기 위해 보존되고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핵심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소서”
이 부분은 가톨릭이 아닌 기독교 사상에 있어 최대 난점인 동정녀 탄생 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톨릭의 신조를 선택한 사람들은 <사도신경>으로 ‘전능하신 천주성부’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고 이 세상에 오심도 매우 특별한 방법이었다는 주장 또한 당연한 것이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의 잉태는 상황의 구체적인 기술이 모호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령의 작용하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또한 구약으로부터 예고된 것입니다(이사 7,14). 하느님의 성령이 보다 특별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작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 단락은 동정녀 잉태의 신비를 전하려는 의도보다는 위대한 일을 이루기에 합당한, 주님을 맞기 위해 보존되고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그 핵심입니다.
마리아의 침착하고 냉정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차분한 이성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평소에 준비 된 신앙이며,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는 경건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감수할 개인적인 희생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몸으로 받아들인 첫 신앙인이 되었고 하느님의 역사 개입이라는 막중한 고리에 자신이 놓여있음을 깨달아 품위와 의미를 갖추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은총은 마리아의 ‘피앗 Fiat’속에 포함되어있습니다(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은총이 확실하다면 그 안에 피앗 즉, ‘이루어지소서’ 라는 마리아의 순종에 대한우리의 관계도 포함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언덕에 성모마리아가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언급입니다. 아들의 기쁨과 고통과 영광의 순간에 마리아는 함께 있었습니다.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며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교회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신 어머니의 하느님을 향한 충실한 믿음을 우리는 본받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1,39-45
이 단락은 <가톨릭주요기도문> ‘성모송’전반부의 내용이 됩니다(1,42-45). 이 두 어머니의 만남은 사실 이들이 잉태한 아기들의 만남이고, 어머니들은 아기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협조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15절에서 예고된 대로 모태에서부터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배 속에 감추어진 메시아 앞에서 기뻐 뛰는 것으로 자기의 예언자적 사명 수행을 개시합니다. 엘리사벳은 바로 이러한 요한의 대변인이 됩니다(43절).
마리아의 노래(The Magnificat) 1,46-55
감사 시편의 전통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노래 또는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 성경의 언어를 이용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편이 팔레스티나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편을 루카가 마리아의 노래로 삼으려고 48절을 덧붙였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현재의 위치와 형태에서, 이 찬미가는 예수님 어머니의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을(46-50절), 그리고 계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신 데 대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을 노래합니다(51-55절).
1,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몇몇 고대 라틴 말 번역 수사본들과 교부들의 문헌에는 마리아 대신에 엘리사벳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학자들은 본디 마리아였는데, 특히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41절 때문에 일부 필경사들이 엘리사벳으로 바꾸었다고 해석하며, 오늘날에는 이 해석의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1,4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①불가타(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본)에서 "찬양한다(그리스말 메가뤼노 Μεγαλύνω) "를 뜻하는 마니피캇으로 시작되어 Magnificat으로 전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찬미가로 불렸고 사무엘서의 한나의 노래(1사무 2, 1-10)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⑴46-50은 하느님 찬양 부분 ⑵51-53은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하느님 은혜를 노래 ⑶54-55는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부분입니다.
②마니피캇은 세상의 일반적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 혁명적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심으로서 개혁이 시작될 것이며 이 개혁은 사회, 정치, 종교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❶1,51;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 도덕적인 혁명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교만을 죽이려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 교만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마지막 남은 가면을 철저히 벗겨내는 것입니다. 강렬한 빛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한계와 덧없음과 그리고 양심을 깊이 성찰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교만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입니다.
❷1,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이것은 사회적인 대 혁명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잘 것 없는 이들조차도 소중히 여기셨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람 사이에 더욱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귀천은 없는 것입니다.
❸1,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혁명입니다. 황금만능, 소비 일색,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주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움켜쥔 자신의 성에서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운 인간성으로 향하는 가르침이 이 노래에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마음에 대 전환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바꾸는 무서운 힘인 것입니다.
1,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의 체류 기간이 요한의 출생 때까지 이어져(36절 참조), 요한이 태어날 때 마리아가 곁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루카는 요한의 출생을 이야기하기 전에 마리아의 귀향을 언급함으로써, 먼저 마리아의 방문에 관한 단락을 끝맺습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는 예수님의 세례 전에 먼저 요한의 투옥을 이야기합니다(3,20). 이로써 그는 예수님과 요한이 관련된 장면들을 서로 구분하고, 요한의 때와 예수님의 때를 분리합니다.
4. 세례자 요한의 출생 1,57-79
이어지는 이야기는 요한의 이름이 신기한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기의 출생보다는 이름이 정해지는 할례식과 더 관련됩니다. 그리고 많은 이가 모인 가운데 기쁨 속에 일어나는 이 일의 소문이 온 지방에 두루 퍼집니다.
①팔레스틴 지역의 아이 이름은 아이의 출생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아이 자체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요한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이름 요안네스(Ἰωάννης)는 히브리 말 이름 여호하난을 그리스 말식으로 옮긴 것으로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이는 이 아기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첫째 표징임을 시사합니다.
②출산이 가까우면 근처의 친지들이 모여듭니다. 여자 아이가 출생하면 악사들과 친지들은 애석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1,66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아이가 될까?라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③세례자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 그리스도가 만날 수 있도록 그의 사명을 완수한 인물이며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긴 인물이 되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 1,67-79
①이 예언적 시편은 46-55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와 유사한 것으로, 메시아를 통하여 내린 구원에 대한 감사 노래입니다. 루카는 중간에서(76-77절) 요한의 사명을 명시합니다. 그리하여 이 노래를 예수님의 사명에 관한 시메온과 한나의 신탁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용합니다.
②‘찬미하여라,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베네딕투스 도미누스 데우스 이스라엘 Benedictus Dominus Deus Israhel)로 시작하는 이 시편은 아마도 팔레스티나에 있던 공동체에서 유래하였을 개작된 유다계그리스도인들의 찬미가(The Benedictus)입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은 기도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라키에 의하면(4,5)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엘리야의 기다림은 매우 간절한 것이어서 그들의 일상에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때 쓰는 용어로 ‘엘리야가 오면’ 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요한은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광야의 소리가 되어 그 구원의 길을 알려 줄 안내자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1,67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이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전통적 문구입니다(창세 9,26; 14,20; 24,27; 탈출 18,10; 1사무 25,32; 1열왕 1,48; 8,15 등).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2코린 1,3; 에페 1,3; 1베드 1,3).
1,69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다윗 집안”을 언급하는 것은 이 시편이 메시아적인 의도를 지녔음을 명백하게 드러냅다.
1,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높은 곳에서” 대신에 “하늘에서”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별”은 여기에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솟음”으로서 솟는 것 또는 솟는 존재를 가리키는데, 땅에서 싹트는 “새싹”일 수도 있고(이사 11,1; 예레 23,5; 즈카 3,8; 6,12 등 참조), 하늘에서 솟는 ‘천체’, 특히 “별”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다 담겨 있을 수도 있으나 다음 절에 나오는 ‘비추다’와 연결하여 ‘메시아-별’이라는 표상이 유다교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별”로 번역되었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1,79-80)
성경에서 “평화”는 생명이 충만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는 메시아 시대에 베풀어지는 은혜 그 자체입니다(이사 9,5-6; 미카 5,4). 루카는 바로 이 주제를 줄곧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인간의 영혼을 위하여 스스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는 우리를 평화의 걸음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에 더 이상의 죽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는 실로 놀라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Ⅱ.예수그리스도의 탄생 The birth of Jesus [2장]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작용하시도록 문을 열어드렸고 이일은 인류 전체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마리아의 받아들임 사이에 있는 깊은 신뢰가 핵심입니다. 우리들 삶의 모든 열매는 성령의 잉태이며 출산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어떠한 한계를 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기록 2,1-7
예수님의 탄생 장면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1,57-66과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 2장의 이야기는 1장에서처럼 아기의 할례와 작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탄생 그 자체가 중심을 이룹니다. 그리고 사제의 집에서 많은 친척과 친지에 둘러싸여 유복하고 편안하게 태어나는 요한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여행 중에 보잘것없는 여관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실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도 목자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구세주 곧 주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께 올리시는 영광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시는 평화를 선포합니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2,1-2)
①하느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셨던 역사적 근거를 알려줍니다.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로마 제국을 다스린 황제로서 제국의 초대황제이며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즉, 존엄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자는 아우구스투스를 지배할 한 존엄한 왕의 탄생과 하느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셨던 역사적 근거를 로마제국 연대기에 따라 기술합니다.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하신 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호구조사는 병역동원과 세금 부과가 목적이지만 로마市 확장을 위한 인구 증가책의 이유도 있었습니다. 제국의 위상과 세력을 다지기위해 도시집중화를 시도한 로마는 로마로 통하는 많은 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길을 사도 바오로께서 잘 이용하였습니다.
②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는 시리아 총독으로서 대헤로데가 죽은 지 십 년 뒤인 기원후 6년에 팔레스티나에서 호적 등록 또는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12년부터 근동의 로마 통치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실제로는 헤로데가 죽기 전에 이미 호적 등록을 시작하였는지, 루카가 나중에 실행된 호적 등록을 앞당겨 이야기하는지, 현재의 자료로는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2,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마태오의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오는데, 루카의 아기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성령 잉태 후 호적등록을 하기위해 머문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다윗이 사울에게 기름부음 받은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이기는 하지만(1사무 16), “다윗 고을”(또는, 다윗 성읍/성)은 구약 성경에서 항상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2사무 5,7.9; 6,10.12; 이사 22,9). 요한 7,42도 함께 고려할 때, 베들레헴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미카 5,1을 해석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태 2,6; 1사무 16,1 참조).
2,5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①예수님께서는 이미 “첫아들”로서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입니다(탈출 13,12; 34,19. 그리고 루카 2,23 참조). 게다가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맏아들로서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1,32-33에 나오는 천사의 예고 참조). 루카는 더 나아가서 로마 8,29; 콜로 1,15.18; 히브 1,6; 묵시 1,5에 나오는 그리스도론적 칭호 “맏아들”, “맏이”도 함께 생각하였을 수 있습니다(그리스 말에서는 ‘첫아들’, ‘맏아들’, ‘맏이’가 다 같은 용어로 표현된다).
②이 단락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법적 탄생을 전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베들레헴 다윗가문에서 태어나기로 예고되어있었습니다.(미카 5,1).
❋호구조사와 예수님 탄생년도(AD)
로마史에 의하면 첫 호구조사는 기원전 8년으로 기록되어있고 몇 년씩 계속되므로 예수님의 탄생 년도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에서 전해지는 아기를 쫓던 헤로데의 죽음은(마태 2,19) 기원전 4년입니다(요세프스 유다古代史).
세계사를 공부할 때나 성경자료를 볼 때의 연도에 ‘AD’와 ‘BC’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AD’는 라틴어 ‘Anno Domini’의 약자로, ‘주님의 기원’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 서기연도 계산법입니다.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로,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AD 1년 바로 전 해는 BC 1년으로 표기됩니다. 기원전 즉 BC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大헤로데가(마태 2,1) 기원전(BC) 37년에서 BC4년까지 다스립니다. 그가 죽자 세 아들 중 헤로데 안티파스가 BC4~AD39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마르 6,17-29)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일정한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C 587 예루살렘이 함락 되어 바빌론유배가 시작되었고 다윗시대는 BC 1010-970년, 탈출년대는 이집트19왕조 세토스 1세 때인 BC 1305-1290부터 라므세스 2세 때인 BC 1290- 1224 무렵 어느 시기일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원년 AD연도계산은 5세기 디오니시우스가 로마건국 기원을 기준으로 책정하였는데 이 계산에 따르면 예수님의 출생연도는 AD 1년이 되는데, 후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예수님 탄생원년이 4-5년 정도 늦게 책정되었다는 설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서 3,23에 예수님께서는 나이 서른살 무렵에 전도를 시작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신 기원(AD)보다 4년 전에 출생하여 37,8세 정도에 수난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는 종교적의미의 AD/BC 연도 표기대신 공통기원(共通紀元, Common Era; CE)과 공통 기원전(Before the Common Era; BCE)연도 표기법을 사용합니다. 두 표기법은 숫자적으로 동일합니다. 즉, "2024 CE"와 "AD 2024"는 각각 현재 연도를 설명합니다. "400 BCE"와 "400 BC"는 같은 연도입니다. 종교적 배경을 고려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으나 여전히 AD와 BC가 보편적 연도 표기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 탄생의 기쁜 소식 2,8-20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①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②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③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④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⑤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⑥평화!”’ (2,8-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Glory to God in the highest heaven, and peace to men who enjoy his favour”
“δόξα ἐν ὑψίστοις Θεῷ καὶ ἐπὶ γῆς εἰρήνη, ἐν ἀνθρώποις εὐδοκία.”
①‘큰 기쁨이 될 소식’의 소식에 사용된 에우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ομαι)는 황제의 메시지 또는 특별사면 등을 알릴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기쁨(카라χαρά)은 루카 저자가 강조하여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②‘오늘 너희를 위하여’는 받아들이는 모두에게 지금이 되는 사건이며 구세주 탄생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완전한 현존성(現存性)을 의미합니다. 구원자, 구세주(라틴;Salvator.영어 savier. 그리스어 soter;σωτήρ).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는 “구원자”라는 칭호를 대부분 하느님께만 적용하고(신명 32,15; 1사무 10,19; 시편 24,5; 27,1.9; 62,2.7; 65,6; 79,9; 95,1 등), 더러 ‘이스라엘의 판관들’에게도 붙입니다(판관 3,9.15; 12,3; 느헤 9,27). 복음서에서는 여기와 요한 4,42에서만 예수님께 이 칭호를 부여합니다. 복음서 외에는 사도 5,31; 13,23; 에페 5,23; 필리 3,20; 2티모 1,10; 티토 1,4; 2,13; 3,6; 2베드 1,1.11; 2,20; 3,18; 1요한 4,14에서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불리십니다. 이 칭호는 특히 그리스계 공동체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③‘주 그리스도; 크리스토스 키리오스(Χριστὸς Κύριος)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그리스어이며 히브리어는 ‘메시아’. 바오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가끔 사용합니다. “주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루카만 사용하는데, 그는 이로써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분께서 지니신 왕권의 신적 성격을 부각시킵니다.
④너희를 위한 ‘표징’의 그리스말은 세메이온(σημεῖον;영어 Sign).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실 때는 뒤나미스(δυνάμις)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강대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귀향도 갔던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을 알아보는 표지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말 밥그릇에 누워있는 아기라는 표지입니다.
당시의 여행자들은 각각의 음식을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숙소에는 가축의 사료만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구유는 가축의 사료를 담는 그릇입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세상에 거절되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⑤기쁜소식을 듣기에 합당한 자들 -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의 직역: “(그분) 호의의 사람들.” ‘마음에 드는’ 의 에우도키아(εὐδοκία)는 ‘마음에 들게 사는’의 의미로 해석되며 기쁜 소식을 듣기에 합당한 자들로서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행이 다른 많은 수사본에는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호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이 찬송을 두 줄로 된 병행구로, 곧 하늘과 땅, 하느님과 사람들, 그리고 영광과 평화가 대구(對句)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여 위와 같이 옮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느님) 호의의 (대상인) 사람들” 곧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라는 이 표현은 쿰란의 문헌들에도 자주 나옵니다.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특권을 받은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0절에서처럼 선택된 백성이 될 수도 있고, 3,6에서처럼 루카의 보편주의적 전망 속에서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모든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평화”의 보증입니다(이사 9,5-6; 52,7; 57,19; 미카 5,4).
⑥‘평화’의 히브리말은 샬롬(shalom)은 인간의 평화로운 상태를 말하는 단어로서 빛, 기쁨, 평화, 자비의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말 에이레네(εἰρήνη)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하느님으로 부터 오는 내적평화를 의미하는 말로 구원, 안정, 고요, 조화를 뜻합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의 풍습(風習)과 유래(由來)
①성탄절(聖誕節) - 12월25일의 유래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의식 때 사람들은 12월 24일-25일로 넘어가는 밤에 태양의 출산을 기다리면서 ‘처녀가 빛을 낳았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 사상과 신적출산에 관한이야기는 그리스사상과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336년 이래 12월 25일을 성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12월 25일 ‘무적의 태양신 탄생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는데, 교회는 신자들이 퇴폐적인 태양신(Mithra)숭배에 빠져들지 않게 하려고 같은 날 예수 성탄 축일을 지내게 하였습니다. 336년, 성탄 축일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관습이 서방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354년 로마의 리베리오 주교는 이날을 성탄으로 판정하여 그해 로마 축일표에 기록했고 5세기 초에 이 날을 예수성탄 축일로 정식 선포하였습니다.
②X-mas와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 미사(Christus Missa)’에서 유래합니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Christmas), 프랑스는 노엘(Noël), 독일은 바이나흐텐(Weihnachten)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등으로 불립니다. ‘X-mas’는 ‘X’가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οζ)’라는 단어의 첫 글자입니다. 따라서 ‘엑스마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로 읽어야 합니다.
③크리스마스 트리(Tree)
트리만들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1600년경 성탄 때 독일 성당의 정원에서 낙원극을 공연하였는데, 이 때 생명나무(창세 1,9)를 상징하는 상록수에, 하얗고 둥그런 과자를 달고 나무 주위에는 촛불을 켜 빛나게 하였다고 합니다.
④크리스마스 카드(Card)
지금은 매우 예쁘게 인쇄된 카드를 주고받는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크리스마스카드의 유래는 1843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헨리 콜 관장이, 화가 친구인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 존 호슬레이에게 의뢰하여 처음 그리게 되었고, 1천 장의 카드를 만들어 앞면에 축제 장면 삽화를 넣고 인사말을 인쇄하여 최초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헨리 콜(1808~1882)경은 영국 산업 미술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런던만국박람회를 기획하였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대중화하는 데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⑤크리스마스 캐럴(Carol)
성탄시즌에 듣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여러 나라에서 불려져 왔으나 본격적인 크리스마스캐럴의 시작은 1843년 찰스 디킨스가 발표한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1843년 성탄절을 앞에 둔 12월 19일 세계 최초로 발표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캐럴 중 가장 유명한 곡이라면 <프란츠 자버 그루버(Franz Xaver Gruber, 1787~1863)>가 작곡하고 <조셉 모어(Josef Mohr, 1792~1848)>가 작사한 “Silent Night(Stille Nacht Heilige Nacht)”일 것입니다. 조셉 모어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근처 오베른도르프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의 젊은 보좌신부였고 자신이 쓴 시를 프란츠 자버 그루버에게 작곡을 의뢰하여 1818년 성탄절 미사에서 처음 불렀다고 합니다. 이 곡은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⑥구유(라틴어 praesepe 영어 manger)의 유래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루카 2,12). 이러한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의 탄생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다가 3세기에 걸친 박해시대에 이르러 그림이나 모자이크에서 표현되었습니다. 오늘날 카타콤바(catacomba)의 여러 곳에서 박해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구유의 모습이 발견 됩니다. 아기가 말구유에 눕혀졌다는 것은 인상적인 일인데 베들레헴의 집들은 석회암산 경사면에 세워졌고 집 밑에 석회암을 파고 그곳을 우마를 두는 마구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곳에서 탄생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위에 콘스탄틴의 모후 헬레나가 성탄교회를 세웁니다.
⑦구유를 처음 만든 사람
구유를 만드는 풍속은 1223년, 이탈리아의 그레치오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가 성탄시기에 그레치오 성당에 베들레헴의 외양간을 본뜬 마구간을 만들었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아기예수님이 탄생한 구유에 대한 신심이 증가 되었고, 작은 모형의 마구간을 만들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풍속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러한 토착화된 구유를 통하여 자기 민족과 그리스도 강생(降生)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12월 성탄이 가까워지면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각 본당을 중심으로 작은 모형의 마구간을 만들어 성탄전야에 아기 예수님의 상을 모시는 구유안치식과 구유예절을 가집니다.
그런데 마구간이 갈수록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모양으로 만들어지다가 최근에는 다시 옛 마구간 형식으로 간결 소박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⑧대림시기(待臨, 라틴어 adventus)와 대림환(待臨環)
대림시기는 다시 오시는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대림시기는 교회와 신자가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준비하는 시기이지만, 교회는 기다림의 기쁨을 더욱 강조 합니다. 대림시기의 첫 주일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시작입니다. 전례복의 색은 보라색이며,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와 요한 세례자의 경고를 낭독합니다. 대림시기에는 제대 앞에 녹색의 잎으로 장식한 네 개의 초를 꽂는 둥근 촛대인 대림환이 놓여있습니다. 대림환의 둥근 모양은 하느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임을 상징합니다. 녹색의 환은 헬레니즘 시대에 승리의 월계관을 상징하고 요즈음에도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환영할 때 꽃으로 만든 둥근 관을 씌워 우승자인 선수를 환영합니다. 녹색의 환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면서 또한 녹색은 성장과 생명,희망과 미래를 나타냅니다.
대림환에는 네 개의 초가 꽂혀있습니다. 짙은 보라색부터 연보라, 분홍, 흰색인데 대림시기 첫 주간에는 진보라에 점화하고 둘째 주는 연보라에 점화하면서 점점 초의 색이 밝아집니다. 세 번 째 주의 분홍색은 기다림의 막바지 기쁨을 나타내며 사제의 제의색도 분홍입니다. 네 개의 초를 차례로 켬으로써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맞이합니다. 또한 이 네 개의 초는 첫사람(아담)부터 세례자요한까지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약의 4천 년을, 그리고 대림시기의 4주간을 의미합니다.
⑨강생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가리키는 용어는“강생(降生, 라틴어 인까르나씨오 Incarnatio)” 이라 하고“육화” 라는 말은 되도록 쓰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의“incarnatio” 는“체현”, “구체화”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바오로사도는 강생의 신비를 예수님의 ‘자기 비움’ 즉 케노시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초라하게 탄생하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모르페 μορφῇ-본질)을 지니셨으면서 종의 모습으로 사신 것입니다(필리 2,6-11 그리스도 찬가 참조). 케노시스’는 그리스어 동사 케노오 κένω‘비게하다’에서 온‘헤아우톤 에케노세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에서 유래된 신학용어로서 예수님의 겸손, 자비, 온유, 성심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탄생과 삶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도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한 시기를 사람과 함께 사셨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입니다.
3.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2,22-24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2,22)
여기에서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또는 부모가 될 수 있는데,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레위 12,1-8에 따르면 정결례는 산모에게만 해당됩니다. 아들을 낳을 경우에 산모는 마흔 날 동안 부정(不淨)하게 됩니다. 그 기간에는 거룩한 물건을 만지거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됩니다. 율법에서는 아기를 직접 성전에 바치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루카는 이로써 예수님의 부모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임무를 얼마나 큰 열성으로 수행하는지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이 봉헌을 사무엘의 봉헌처럼 생각하는 것같습니다.(1사무 1,11.21-28 참조).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2,23)
여기에서 “사내아이”는 첫아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의 직역: “주님을 위한 거룩한 것으로 불릴 것이다(=불려야 한다).” 거룩하게 불림은 하느님의 소유가 됨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첫아들을 직접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이 법은(탈출 13,2.12.15) 맏아들/맏배의 대속 (代贖) 으로(탈출 13,13; 34,20), 곧 태어난 지 몇 달 안에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실행됩니다(민수 18,15-16). 루카는 예수님의 이 대속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39절은 그것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2,24)
이 제물은 산모의 정결례 때에 송아지나 양을 대신하여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제물입니다(레위 12,8).
4.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2,25-39
예수님에 관한 시메온의 예언은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과 관련해서 한 예언과 짝을 이룹니다(1,67-79). 그러나 시메온의 예언은 즈카르야의 예언과 달리,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킨다는 점을 드러내는 이야기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즈카르야(그리고 한나)와 함께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시메온은, ‘구원자’의 오심을 반기면서 이 구원자가 수행할 사명의 몇 가지 새로운 면을 밝힙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2,25-28)
루카는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를 강조하면서도, 그분의 “부모”(41절, 43절)나 “아버지”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필경사들은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 용어들을 매우 자주 “마리아와 요셉”으로 대체시킵니다.
시메온의 노래 (The Nunc dimittis) 2,29-32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①‘노래’ 라는 뜻의 라틴어 canticulum(칸티쿨룸:칸치쿨룸)에서 유래되어 영어는 Canticle of Simeon. 이 노래에 눙크 디미띠스(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노래의 첫줄에 따른 것입니다.
②시메온이 체험한 평화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즈카르야의 예언(루카 1,79)이 실현되었음을 가리킵니다.‘이제야’라는 표현은 시메온의 기다림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과 이제 메시아적 구원의 시간이 도달했음을 알려줍니다.
③죽기 전 메시아를 뵙기를 간절히 청했던 시메온은 예수아기를 안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2,29-32)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아기 예수를 본 것이 이미 구원을 본 것이며, 하느님 구원이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결정적 사실을 나타냅니다. 시메온은 그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통해 이 평화(구원)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시메온은 더 이상 구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④루카의 작품에서는(복음서와 사도행전) 다른 민족들의 구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이 구원은 파스카의 계시 이후에 가서야 분명하게 선포됩니다(24,27).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 성경의 시편들에서 영감을 받지만, 시메온의 예언은 제2이사야서의 어휘들을 이용합니다. 이로써 예수님 안에서 베풀어진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⑤33절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라워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계시이기에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아기의 부모가 하느님의 계시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 소식을 전했을 때도 마리아는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l,31-35).
⑥시메온은 아기로 오신 구세주를 뵙게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열망하여 온 분을 결코 낯설지도 충격적이지도 않게 ‘아기’로 당신을 드러내신 분이십니다.(사실 시메온은 모르겠지만 말구유 탄생, 십자가의 죽음,사람들이 꺼리는 나병환자,세리들과 어울리시고, 당신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일은 이미 어느 것도 낯설지가 않다!). 긴 기다림 끝에 아마도 그 인생의 거의 마지막에 시메온은 메시아를 만납니다. 시메온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평안이 떠날 수 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⑦수도자의 기도중 끝기도에 시메온의 노래를 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메온의 찬가를 부르며 잠자리에 들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불평할 일, 후회스러운 일도 있겠지만 감사드릴 일은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희망하던 구세주를 성전에서 만납니다. 시메온이 우연히 성전에 간 것이 아니라 성령께 이끌려 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 또한 율법이 명하는 바를 지키기 위해 부모에 의해 성전에 오게 되었습니다. 곧 율법과 성령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을 만나도록 이끌었습니다.
⑧아기 예수님과 시메온의 만남에서 성경저자는 세 번에 걸쳐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합니다.
2,25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성령께서는 일시적으로 잠시 오신 것이 아닌 시메온의 삶의 여정에 머물러 계시는 분으로, 능동적인 실재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항상 머물러 계시고, 알려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세 가지 사실은 시메온의 신앙생활에서 그의 기도를 통하여 언제나 희망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임종을 맞이할 때 이런 감격과 기쁨으로 시메온의 찬미가를 부를 수 있다면 이보다 큰 행복도 없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2,34-35)
①“영혼”은 여기에서도 1,46과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당사자 자신, 그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에제 14,17에서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을 이 암울한 경고는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 앞에서 둘로 갈라지고, 마리아는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난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요한 19,25 참조).
예수님께서는 장차 가장 독실하다는 청중들의 뿌리 깊은 불신, 그들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사명 수행은 ‘마음의 비밀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마르 7,6-8; 루카 16,15).
➁예수님은 세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 할 것이며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일어나게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과 동시에 심판도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면서 속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뜻을 감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겠지만,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이 될것입니다.사람들은 그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도록 요청받습니다.
➂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수난하시고 결정적인 구원사업을 완수 하십니다.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셨으며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모퉁이의 머릿돌에 부딪쳐 부스러지지 않으려면 그분 편에 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118,22)의 시편 구절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일찍부터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창건자이신 그리스도께 적용시켰습니다(사도 4,11; 1베드 2,4.7 참조).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고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가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덫과 올가미가 되시리라.많은 이들이 거기에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져서 깨어지며 걸려들어 사로잡히리라.”(이사 8,14-15)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2,39)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한 예언은 말 그대로 비수와 같이 마리아의 마음을 찔렀을 것이나 정결례를 잘 마무리하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예언적 은사이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는 운명의 길을 걸어 나갑니다. 또 그러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의연하게 나아가는 것이 영성생활일 것입니다.
오늘날에 많은 어머니들이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또 많은 아버지들이 요셉처럼 묵묵히 자신의 상황을 하느님의 섭리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어떤 이 들은 쓰러지게도 하고 어떤 이 들은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나는 자주 신앙이 없었다면 대체 어찌되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부모는 정결례를 잘 마무리하고 돌아가 여느 가정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아들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5. 예수님의 소년시절 2,40-5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2,40)
40절의 짧은 서술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1,80의 내용과 밀접하게 짝을 이루면서도 예수님의 고유한 신비를 더 잘 드러나게 해 줍니다.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보다 더욱 강력한 뜻을 담고 있는 이 “지혜(쏘피아 σοφίᾳ)”가,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고유한 특성을 이룹니다(2,52; 11,31; 21,15).
세례자 요한의 역사에는 유소년시절에 상응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루카는 이 선구자의 설교 이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을 소개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씀은(49절) 소년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게 되시면서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도 아셨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2,41)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야 합니다(탈출 23,14-17; 34,22-23; 신명 16,16). 유다교에서는 열세 살 때부터 율법 준수의 의무가 있었는데 예수님 시대에는 그 이전과 달리 이러한 의무가 부인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2,43-47)
“율법 교사”에서 “율법”은 내용상 덧붙인 말입니다. 나중에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하시겠지만, 이들은 성전 바깥 뜰 회랑 또는 성전 안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은 흔히 대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슬기로운 답변”의 직역: “슬기(또는, ‘이해’)와 답변.” 서양 말에는 예컨대 ‘금잔’(golden cup)을 ‘잔과 금’(cup and gold) 식으로 표현하는 중언법(重言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슬기와 답변”도 이러한 수사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8-49)
이것이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여기에서처럼 그분의 “아버지”가 중심을 이룹니다(23,46. 그리고 24,49 참조).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2,50)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는 모든 인간의 지성,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 갖추어진 사람의 지성까지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은 마리아와 요셉이 이 신비의 어떤 면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게 된다는 사실도 가리킵니다.예수님의 부모 그리고 우리 모든 부모는 그렇게 자신과는 이제 다르게 성장한 자녀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우리도 내적 카리스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성장합니다.어느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자신의 독특한 관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신학적 위치
①공의회 이후 전체는 아니지만 성모마리아에 대한 평가를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것은 그리스도론과 상관없이 성모마리아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사적 계시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신심은 성서신학과의 불가피한 대립을 야기 시켜 많은 논쟁의 요소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와 다름없었던 한 인간이었지만 특별하게 선택되었던 마리아를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통하여 보아야 한다. 교회는 마리아를 평생동정녀, 특별히 복 받은 여인,하느님의 모친, 교회의 어머니로 여겨 왔다.
②마리아는 구원사에서 특이하고 중요한 위치에 서며, 구약과 신약 및 대망(待望)과 성취(成就)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특별한 은총을 주셨고(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無染始胎),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여 구세주의 모친이 되게 하셨으며, 영혼과 육신을 하늘에 불러 올리셨다.(성모 몽소승천;蒙召昇天). 가브리엘천사는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한 이” 라고 부른다(루카 1,28-38 참조).
③마리아 공경은 본질상 진리와 생명, 은총과 덕행의 근원인 성자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마리아의 아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전적으로 당신의 어머니에게 의존된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한다. 교회론 적으로 성모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셨고 순전히 그리스도와 관계 되어 존재하는 분이시다. 성모마리아와 관련되어 선포된 교회의 축일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가톨릭의 신학적 결과이다.
④성모마리아에 대한 최초의 예언은 이사야서로 기원전 720년경이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다윗가문의 요셉
요셉은 결코 구세사 안에서 과소평가할 인물이 아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협력자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한 가정을 지키는 가장의 모습을 보아야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고, 인생 여정에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수없이 많은 요셉들의 본보기인 인물이다.
①루카에는 없지만 마태오에서 요셉은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태1,19 파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통해 주신 말씀을 믿고 하느님의 구원사에 동참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한 상태에서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 아기의 울타리가 된다. 이러한 꿈은 요셉이 마리아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②루카복음은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강조하고 마리아의 ‘이루어지소서’로서 마리아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마태오에서는 요셉의 비중이 크게 기술되었다. 마태오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족보를 열거한 다음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기록한다. 요셉에서 끝나는 족보는 사회법적인 사람의 탄생을 말하려는 것으로, 동정녀의 아들이 어떻게 다윗가문의 후손 요셉의 아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유다교의 법에 의하면 생물학적 혈통보다는 법적인 인정이 더 중요하였다.
③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해줄 것을 명하신다. 요셉이 아기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다윗 자손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됨을 알려주는 것이며 또한 인간역사의 과정 속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④ 이사야 예언에 의하면 동정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기 이름은 임마누엘이다(이사 7,14). 그러나 요셉은 임마누엘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라고 한다(2,21).‘예수’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히브리말 여호슈아 yehosua가 줄어서 된말 ‘예슈아’를 그리스 음역한 것이다.이 이름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수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선호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Emmanuel, Ἐμμανουήλ- 이 이름은 요셉이 지어주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이루어지는 이름이며 그리스도의 본질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⑤성경은 요셉의 고뇌, 선택, 결단에 대해 짧게 기록하고 있으며, 요셉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교회는 요셉성인을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로 선포하고 우리가 세상의 삶을 마칠 때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 빌어주시기를 청하라고 가르친다. 요셉이 어떠한 면에서 의로운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성서상의 의로움은 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충실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결국 ‘의로운 요셉’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여 그분의 뜻에 따름을 의미한다.
⑥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발표한 사도적 권고 「구세주의 보호자」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회의 생활 안에서 성요셉의 인품과 사명」에 대해 강조하고‘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동일한 사랑의 보호자였으며 인간의 노동을 속량의 신비에 더욱 근접시켰다’고 천명했다.교황 요한 23세는 성요셉 이름을 미사전례에 포함시키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보호자로 정하는 등(1961년) 성인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성 요셉은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이시기도 하다.요셉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에 선종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Ⅲ.메시아시대의 시작 [3장]
The preaching of John the Baptist
1.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Ἰωάννης ὁ βαπτιστὴς)
3,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①루카는 요한의 사명 수행, 또 동시에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이교도 세계와 하느님 백성 세계의 역사 속에 배치시키면서, 이 두 인물의 공적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②“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은 시리아식으로 계산한 연대로, 기원후 27년 10월 1일부터 28년 9월 30일까지일 것입니다. 6세기에, 이 본문을 바탕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 만 29세이셨다는 23절도 고려하면서, 그리스도교 기원 곧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확정 지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한 결과, 이 탄생 연도가 그보다 몇 년 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③빌라도는 기원후 26년부터 36년까지 좁은 의미의 유다를 다스린 “총독”입니다.
④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래아와 페래아를 다스립니다. 이 헤로데를 그의 아버지 대(大)헤로데 임금과(1,5)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스 말로 본디 한 지방의 1/4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뜻의 테트라르케스(τετραρχης) 우리말로 “영주” 또는 분봉왕(分封王)이라고 부릅니다(9,7; 사도 13,1).
⑤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는 기원전 4년에서 기원후 34년까지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의 여러 지역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루카는 여기에서 그중 이교도들의 지역만 열거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구원의 선포가 유다인들은 물론 이교인들과도 관련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⑥리사니아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인데, 아무튼 그의 영토도 이교인들의 지역입니다. 그러나 루카 시대에는 이 영토가 유다 임금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에 이어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에게 속합니다.
⑦루카의 역사적 상황의 배려가운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의 연대를 표기하기 위하여 다섯가지 이상 동시대의 역사적 소개를 세밀하게 기술하는 것입니다.
3,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여러 인물이 열거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대사제가, 이교도 황제와 대조적인 인물로,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우두머리로 나옵니다. “대사제”는 물론 한 명입니다. 카야파는 기원후 18년에서 36년까지 대사제로 봉직합니다. 전직 대사제인 그의 장인 한나스는(요한 18,13) 기원후 15년에 퇴위하였으면서도 계속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현직 대사제와 함께 거명됩니다.요한의 소명은 그의 예언자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레 1,2의 방식에 따라 표현됩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3)
①요한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광야에서 설교하지만, 루카에 따르면 광야를 떠나, 대헤로데와 아르켈라오스가 벌인 건설 사업의 결과로 주민이 상당히 늘어난 ‘요르단강 지역’에서 설교합니다. 루카에게는 갈릴래아와 유다가 예수님의 활동지인 것처럼, 요르단 지방이 요한의 본디 활동지인 것입니다(창세 13,10-13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도 똑같은 지역 분할이 이루어진다).
②임금의 전령관(傳令官)처럼 무엇을 공포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선포하다’라는 용어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선교 언어에 속합니다. 루카는 이 동사를 예수님의 초기 복음 선포, 그분의 통상적 설교(4,44; 8,1), 그리고 사도들과(9,2; 12,3; 24,47; 사도 10,42) 바오로와(사도 9,20; 19,13; 20,25; 28,31) 또 다른 선교사들의 설교에도 적용합니다(루카 8,39; 사도 8,5).
③‘선포하다’ 이 동사 ‘케뤼쏜’(κηρύσσων)은 그리스말에서는 왕의 사자가 왕의 칙서를 선포하는 용어인데 예언자에 의해 종교적 영역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선포와 초대교회의 복음선포에도 사용되며 이 선포는 복음, 하늘나라의 복음이라는 표현 속에 함축됩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선포,선언(케뤼그마 κηρύγμα)은 선포하다의 명사형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4-6)
①칠십인역에 따라 이사 40,3-5를 인용합니다. “모든 사람”의 직역: “모든 육(또는, ‘살덩이’).” 이는 모든 사람, 더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키는 히브리 말식 표현입니다. 루카는 이 절을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 따라 인용하면서도 그것을 간추립니다. 그리고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리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루카는 이 주제를 사도행전 끝에 가서 다시 언급합니다.
②4-6절은 회개의 중심행동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회개할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고 다음 3,7-17구절에서는 구체적인 회개의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에 의하면 곧게 내야하는 길, 메워져야하는 골짜기, 낮아져야하는 산과 언덕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 각자의 회개입니다. 쿰란공동체는 이 말을 광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신약성경은 세례자의 역할로 이해하였습니다.
③이 단락은 갈릴래아 선교의 도입부로서 공관복음서 공통으로 세례자요한의 설교➜예수님의 세례➜광야의 유혹이라는 세단계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은 이후 세례자요한으로 호칭됩니다.
④광야는 성서적인 표현이지만 여기에서는 세례자요한이 생활하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예루살렘에서 남쪽 헤브론까지 이어지는 산들과 사해 또는 북쪽의 요르단강 하류 사이에 있는 황량한 산악지대를 가리킵니다. 이 광야에 오늘날의 수도원과 같은 쿰란공동체의 유적지가 발견되었고 부근에서 구약성경 수사본들을 포함하여 많은 문헌들이 발견 되었습니다.
⑤요한은 백성의 회개를 촉진시켜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를 준비시킵니다. 요한은 이 세례를 한 번만 주었기 때문에 당시의 에세네파가 매일 거행한 침수(沈水)와 정결례(淨潔禮)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또한 개종자들을 위한 세례와도 같지 않습니다. 세례자라는 이러한 명칭은 요한에게만 해당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부르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3,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7-9절에 나오는 이러한 위협의 말씀이 루카 복음서에서는 세례자요한의 모든 청중에게(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에게만)해당됩니다. 모두 죄인으로서, 다가오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이어지는 3,10-14절은 루카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심판의 위협 앞에서 군중, 그리고 특히 다른 이들에게 죄인으로 간주되는 자들, 곧 세리와 군사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데 그들은 이러한 물음으로 회개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형제애와 의로움에 따라 행동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세리와 군사들에게 당시 평판이 좋지 않던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13,10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철학의 근본 질문입니다. 에픽테토스는, 칸트는 질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진리로 나아가는 구도자의 질문인 것입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고 군사들은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3,11-14)
복음서에서 “세리들”은 세금을 직접 거두어들이는 하급 관리들입니다. 세리들은 이교도들의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또 그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부당하게 징세를 하여, 주변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미움을 받고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이들을 공공연한 죄인으로 간주합니다(5,30; 7,34; 15,1.2; 19,7).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3,15-16)
①본디 아람 말을 그리스 말과 라틴 말을 거쳐 우리말로 음역한 메시아는, 칠십인역에서(하느님의)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그리스도로 번역되는데, 히브리 말로는 마쉬아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입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이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아람 말로 이 칭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의미가 담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로 번역합니다(2,11.26; 4,41; 9,20; 24,26.46). 특히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게 됩니다(사도 13,25; 요한 1,19-20; 3,28 참조).
②루카는 사도 1,5와 11,16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물의’ 세례와 오순절에 개시되는 ‘성령의’ 세례를 대조시킵니다. 루카는 이 말씀을 성령 강림의 예고로 알아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사실 성령께서 혀처럼 생긴 “불”의 모습으로 내리신다고 말합니다(사도 2,3-4). 이 “불”의 표상은 루카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정화 작업을 의미할 것입니다.
③요한은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이정표였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죄의 근원을 넘어서는 법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요한은 의로움을 회복하는 길을 회개의 세례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세례는 물의 세례로서 하느님나라를 시작하는 입문일 뿐,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④성령의 그리스말 프네우마(Πνεύματι)는 바람, 영, 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숨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뒤에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은 다른 차원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히브리말 루아흐(ruah), 그리스말은 루아흐를 프네우마(πνεῦμα ;pněnuma 또는 아네모스 ἄνεμος; aněmŏs )로 번역하였습니다. 라틴어는 '스피리투스'(Spiritus), 영어는 ‘스피릿’(Spirit)이라고 번역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홀리 스피릿은 성령입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시대에 사용한말입니다.
⑤불(πυρ 퓌르)역시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말라 3,2; 즈카 13,9). 또한 하느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를 성령의 세례와 불 즉, 심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3,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예언자들은 팔레스티나 땅에서 이루어지는 ‘수확’의 여러 장면을 표상으로 이용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키질(예레 15,7; 51,2), 지푸라기를 태우는 불(이사 5,24; 47,14; 요엘 2,5; 나훔 1,10) 등. 루카는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표현으로(이사 66,24; 마르 9,43.48 참조) 이 수확의 표상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2.회개 ;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1)회개 선포의 대상
계속되는 제국들 지배아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민이 받는 고난에 의혹을 갖게 되면서 아시리아,바빌론,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면서 지배국의 사회 풍조에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퇴폐적 성관계를 동반하는 매혹적인 종교의식 이었습니다. 세상의 쾌락을 따르는 전반적인 사회풍토 안에서 말라키예언서가 전하는대로 사제도 백성도 선민의 의무는 안하고 권리만 주장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하느님을 섬겨보아야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말라 3,14) 이혼이 유행하고 동족을 노예로사고 팔며 사기행각과 이방인과의 문란한 성 생활 등이 유행하였습니다. 하느님 쓸데없다는 그들 말대로 더 이상의 예언자는 오지 않았고 있었다 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소용없는 일이라는 자조적인 신앙 가운데 도덕성 땅에 떨어져 불안과 위기를 느낀 백성들은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말라키예언 이후 400년의 침묵을 뚫고 외친 광야의 소리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는 인류 구원이 예수님 손에 달린 것을 알았습니다. "보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시다!” (요한 1,29)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이스라엘의 자존심에 일격을 가합니다(3,8).
세례자가 외치는 회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상과 선민의 의무인 율법준수가 구원이라는 당시의 사고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를 선포한 대상은 그러므로 죄인이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선민이었습니다.
2)메타노이아
①통상 회개라는 말로 사용하는 ‘돌아오라’는 의미의 히브리말은 테슈바하(되돌아가다),그리스말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영어 conversion; repent).
메타노이아는 마음을 바꾸다,뉘우치다,회개하다의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εῖω)에서온 말입니다. 이 말은 본디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사람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는 conversion(바꾸다, 회심, 귀의, 전환), repent(후회하다, 뉘우치다) 등으로 번역 되었습니다.
②메타노이아는 인간의 내외(內外)적인 면의 회개를 서술하는 용어로서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니함’과 ‘슈브’를 그리스적 思考로 번역하여 70인역(70人譯; LXX;Septuaginta)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❶‘니함’은 돌아섬의 내면의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어떤 변화를 통해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려는 시도가 ‘니함’의 중심 개념임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의지와 결단의 차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배 이후 ‘니함’이라는 말이 메타노이아로 쓰이면서 회개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니함’과 메타노이아가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❷ ‘슈브’는 돌아섬의 외적 상태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돌다, 돌아가다를 의미합니다. 예언서에는 실존 전체의 방향을 ‘하느님께 돌려놓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회개의 의미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 하느님과의 본연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예수님도 회개를 요구하시는데 세례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세례자의 경우 회개의 동기가 되는 요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탁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의 자기극복의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루카 5,8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또한 회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는,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④세례자요한은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가 항거의 생애였습니다. 그는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즉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며 경박한 사치를 멀리한 구약의 예언자의 모습이었습니다.그러하기에 그의 선포는 강력하였습니다.
⑤회개는 삶의 방향, 인생관 전체를 하느님 쪽으로 바꾸어 돌아서는 대 전환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미래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좋은 결과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로마 8,28) 전 존재를 의탁하는 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3. 요한이 옥에 갇히다 3,18-20(마태 14,3-4 ; 마르 6,17-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헤로데 영주는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온갖 악행 때문에 요한에게 여러 번 책망을 받고, 그 모든 악행에다 한 가지를 더 보태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3,18-20)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데, 루카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벌써 이렇게 요한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요한의 사명 수행과 예수님의 사명 수행이 구원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두 시대를 나타냄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히고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루카는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히는 것으로서 구약이 끝나고 신약-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마르코, 마태오복음서는 세례자요한이 옥에 갇히고 참수되는 것을 동시에 보도하고 있으나 루카에서의 세례자요한은 7장에 다시 등장하고 9,9에서는 이미 처형된 것으로 보도합니다.
4.예수님의 세례 3,21-22 (마태 3,13-17 ; 마르 1,9-11)
1) 메시아시대의 시작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어, 당신 백성 가운데 일어난 회개 운동에 동참하십니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계시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무르시는 예언자,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고 구약 성경에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3,21-22)
①“세례를 받은 뒤에”를 “세례를 받을 때에”로 옮길 수도 있지만, 앞의 것의 가능성이 더 큽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세례가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세례를 마무리 짓는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로 받는 이 세례가 바로 뒤에 이어지는 계시의 계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마태오나 마르코보다 더 분명히 드러냅니다.
②루카는 자주 ‘예수님의 기도’를 언급합니다.
[⑴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3,21) ⑵죄를 용서하는 권한에 대하여 바리사이와의 충돌을 앞두고(5,16) ⑶12사도의 간택 전 밤새워 기도(6,12) ⑷수난예고에 앞서(9,18) ⑸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22,32) ⑹기도하러 올라가신 변모의 산(9,29) ⑺십자가상에서 기도(23,34)].
이 기도야말로 그분께서 당신의 아버지와 만나시는 ‘때와 장소’입니다.
③성령을 비둘기 모습으로 많이 표현하고 있지만, 이 “비둘기” 상징에 관해서는 아직도 만족할 만한 설명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라, 비둘기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 창조 때에 심연의 물 위를 감도신 성령을(창세 1,2) 비둘기 모습으로 연상한 또 다른 유다인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복음서의 이 비둘기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킨다고 여깁니다.
노아의 방주에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온 비둘기(창세 8,11)를 연상하기도 합니다. 루카는 “비둘기”가 성령께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시는 겉모습에 불과함을 강조합니다.
④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섞여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복음서 전통은 예언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죄인들과 어울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인용구는 2사무 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 2,7과(“너는 내 아들”) 이사 42,1을(“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합성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아직 이사 53장처럼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은 아니지만,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이사 42,2. 그리고 마태 12,18-21), 또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는”(이사 42,4) 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⑤왕으로서의 메시아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겹쳐진 이 표현은 오직 예수님만이 의식할 수 있으나 이 음성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울려퍼진 듯합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계시로서, 메시아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⑥‘마음에 들다’는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선택의 의미입니다. ‘마음에 드는’ 의 에우도키아(εὐδοκία)는 ‘마음에 들게 사는’의 의미로 해석됩니다.(루카 2,14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는 예수님의 세례가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세례를 마무리 짓는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 같습니다.
2) 예수님 세례의 의미
①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적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며 성령이 내리신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세례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당신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현존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드러났으며 예수님의 생애 중 중요한 시기마다 나타났습니다.
②온 백성이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십니다(마태 3,13-17; 마르 1,9-11). 예수님께서는 함께 세례 받는 자들과 구별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백성의 한 가운데 서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과 連帶하심으로써 회개가 하느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5.예수님의 족보 The ancestry of Jesus(γενέσ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3,23-38
①족보의 그리스말 게네시스(γένεσις, Genesis)는 탄생, 기원, 혈통을 의미하고 또한 게네시스는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 이름입니다. 본디 족보는 중요한 인물을 소개하는 그리스식 문학유형 입니다.
②유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가문 요셉에게까지 내려오는 마태오의 족보는, 선조들로 대표되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가 예수님에게서 그 의미를 얻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③루카복음서의 족보는 다윗의 후손 요셉으로부터 첫 사람에게까지 소급되어 올라가는데, 예수님께서 온 인류와 직접 연관이 있는 루카복음의 보편주의를 시사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 요셉은 엘리의 아들, 엘리는 마탓의 아들,.....케난은 에노스의 아들, 에노스는 셋의 아들, 셋은 아담의 아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④예수님께서는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마르 10,47-48; 11,10과 병행구). 사도들의 설교에서(사도 2,29-32; 13,22-23), 그리고 매우 오래된 신앙 고백에서도 그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선포되십니다(로마 1,3-4). 마태 1,1-17과 루카 복음서의 이 족보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심을 보여 주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당성의 바탕이 됩니다.
⑤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를 전하면서도, 둘 다 요셉 쪽의 족보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남자 쪽으로만 족보가 작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족보는 당시의 족보들이 자주 그러하듯,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인위적입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의 조상, 유배 뒤의 즈루빠벨과 스알티엘,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관련해서만 일치합니다. ⑥마태오는 아브라함에게서 예수님까지 유다 왕국의 임금들을 거치면서 3×14(= 42) 대(代)로 제시합니다. 반면에 루카는 아담에게서 예수님까지 임금은 다윗만 포함시키면서 11×7(= 77) 대로 계산합니다. 또 루카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기 복음서의 첫머리에 배치하는 마태오와 달리,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말한 다음에야(1,35; 3,22) 비로소 그분의 인간적 혈통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온 인류와의 관계를 강조하려고(사도 17,26.31)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스알티엘 사이에 임금은 하나도 거명하지 않고 예언자들의 이름만 집어넣습니다. 당시의 메시아사상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⑦성경의 족보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족보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 흐름을 전해줍니다. 역사는 우연하게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서[2] 1-3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