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서 [6] 14⎯16장 교회, 하느님나라의 첫 열매 The church, first fruits of the kingdom of heaven
13,53⎯18장까지는 갈릴래아 선교기 계속입니다. 갈릴래아 선교기는 16장 베드로를 대표로하는 제자들의 믿음고백으로 그 첫 열매를 이루기까지의 단문들이 이어져있습니다.
⑴나자렛 방문(13,53-58) ⑵세례자요한의 죽음(14,3-12) ⑶첫 번째 빵의 기적(14,13-21) ⑷물위를 걸으시다(14,22-33) ⑸바리사이의 전통(15,1-9) ⑹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15,10-20) ⑺가나안여인의 믿음(15,21-28) ⑻빵의 두 번째 기적(15,32-39) ⑼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16,1-4) ⑽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누룩(16,5-12) ⑾베드로의 신앙고백(16,13-20) ⑿첫 번째 수난예고(16,21-23) ⒀예수님을 따르려면(16,24-28)
14장
1.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13,54-58 (마르 6,1-6 ; 루카 4,16-30)
[일부 수사본은 13,54-58부터 새로운 장을 시작한다]
13,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13,54-58)
①고향의 냉대에 대한 이 이야기를 루카복음서는 서두에 배치합니다.‘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의 직역-‘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
②예수님의 고향 갈릴래아 나자렛은 이방인의 왕래가 잦아 이방문화에 많이 접촉되어 분명히 믿음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정통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유다인들이 멸시하던 곳입니다.
③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들의 극히 인간적인 작은 앎이 그분의 신성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 기적은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고 다만 놀라운 사건에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여기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고향과 집안’은 이스라엘백성으로 여겨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2.세례자 요한의 죽음 14,3-12 (마르 6,17-29)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14,1-2)
①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3-12절) 예수님을 죽었다가 되살아난 요한이라고 하는 헤로데의 말로써(2절),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면서 복음서의 제 2부 교회창건 부분(14,1─28,20)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 둘째 부분은 16,21에 가서야 시작됩니다.
②세례자의 참수형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합니다. 이 영주는 대 헤로데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헤로디아는 아버지의 형제 헤로데 필리포스와 결혼했는데(이름이 헤로테 안티파스의 동생 필리포스와 같다) 후에 헤로데 안티파스와 불법혼인합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나바태아 왕 아레타스의 딸인 왕비를 버리는데,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도 삼촌과 결혼합니다(그 이름도 필리포스이다). 이들의 복잡한 가정사를 열거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레위 20,21-22 율법이 금하는 혼인입니다.
③손님들을 즐겁게 한 대가로 왕은 살로메의 요청을 들어주는데 마르코에서는 살로메가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라고 묻는데, 마태오에서는 어머니 헤로디아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의 처형을 요청합니다. 세례자요한을 감옥에 가둔 이유는 헤로데의 사생활을 직언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살로메의 춤의 대가로 세례자 요한을 처형합니다.
④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14,12의 마지막 말“예수님께 가서 알렸다”는 13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와 연결 짓는 구실을 합니다. 곧 14,13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3.첫 번째 빵의 기적 (First miracle of the loaves) 14,13-21
14,13-21의 첫 번째 빵의 기적은 15,32-39의 사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두 번째 기적과 함께 16,12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빵의 기적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연결됩니다.
1) 오천 명을 먹이시다 (마르 6,30-44 ; 루카 9,10-17 ; 요한 6,1-14)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저녁때가 되자....“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14,13-17)
①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 14,13-21 ; 마르 6,30-44 ; 루카 9,10-17; 요한 6,1-14 등 4복음서 모두 기술하였습니다. 마태오, 마르코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한 번 더 기술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초대 교회에서 강조된 일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강조는 초대교회의 성찬례 모임에서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②마태오에서 이 표징은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심에서 비롯됩니다. 세례자의 죽음으로 당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신 예수님은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배를 타고 물러나시는데 데 군중은 예수님께서 타고 가시는 배를 바라보면서 걸어서 호숫가를 따라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③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가르치지도’(마르 6,34)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지도’(루카 9,11) 않으십니다. 이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루카 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보다 훨씬 명확하게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하십니다(14,13─16,20).
④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십니다(14,14). 이곳에서는 군중을 가르치시지 않고 다만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일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빵을 건네십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공동으로 기록된 성체성사-생명을 주는 빵과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입니다.
14,19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①마태오는 요한복음서보다는 덜 하지만 루카 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보다 훨씬 더 많이 26,26의 성찬 제정 이야기를 본떠서 이 빵의 기적 이야기를 거의 비슷하게 전개시킵니다. 또한 마태오는 물고기 없이 빵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빵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남은 것을 모아들이는 것도 빵뿐입니다.
②20절 ‘배불리 먹다’라는 표현은(탈출 16,12)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당신 백성에게 마련해 주신(탈출 16,4) 만나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광야에 내려주신 만나처럼 그리스도의 위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예고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이 기적을 이루시고, 축복하신 빵을 나누어 주십니다.축복의 빵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이며 성체성사로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③제자들은 이 일에 직접 동참하여 빵을 나누어 주었고, 남은 빵 열 두 광주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남는다는 것은 엘리사의 기적에도 나옵니다(2열왕 4,42-44). 그리고 이 예언자의 시종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④제자들의 파견(10장)➜빵을 많게 하는 기적➜그리고 베드로의 고백 순으로 연결되는 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자신의 신비를 드러내시어 제자들이 앞으로 수행하게 될 직책의 참된 성격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4.물 위를 걸으시다 14,22-33 (마르 6,45-52 ; 요한 6,16-21)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14,22-23)
군중은 열광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그동안 당신은 군중을 돌려보내십니다. 요한 6,15에 의하면 군중은 열광하지만 당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 기도하십니다. 제자들도 물론 열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열광을 중지시키시려는 것 같습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프스(유다 역사가)에 의하면 군중은 예수님에게 압력을 가하여 왕으로 추대 하려했다고 합니다. 유다의 메시아 대망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합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여….만일 메시아 추대움직임이 있었다면 선두에 서야 할 제자들을 먼저 흩으시는 것입니다. 다섯 개의 빵으로 오천 명,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군중이 충분하게 먹었습니다. 이 부분은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한 대단히 인상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14,24-27)
①시달리다의 그리스말 바사니조(basanizo; βασανιζό)는 인간세상의 괴로움과 고통으로 시달리다의 의미입니다.
②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싸우고 있습니다. 맞바람을 만난 제자들은 침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사실 제자들은 어부입니다. 이런 일을 수 없이 겪었을 것인데 파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한 물거품처럼 놓친 듯, 그들은 허탈과 더불어 실망에 빠져있었습니다.
③예수님은 아무튼 실망을 체험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십니다. 표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속셈을 아셨으면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 앞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유령처럼 보이는 것은 각자의 처연한 고통이었을 것이나 예수님은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분이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④‘나다!’ 의 70인역본은 ‘에고우 에이미 ἐγώ εἰμι’입니다. 탈출기 3장14절에서 이름을 묻는 모세의 요청에 하느님께서는 ‘있는 나’ 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히브리어는 에흐예 아쉘 에흐예 'Ehyeh- ‘Asher-'Ehyeh. 에흐예는 나는 ...이다 의 뜻. 아쉘은 관계대명사로 후대에 추가 되었다). 히브리어의 에흐예는 히브리동사 하야hayah ‘있다’ 에서 연유되었다고 보며 그리스말은 ‘존재자’ (I am THE BEING; 에고우 에이미 ἐγώ εἰμι)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다.’ (14,28-31)
①베드로와 관련된 일화 세 개는 마태오 복음서에만 전해집니다. 곧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음(14,28),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에 이은 예수님의 말씀(16,17-19), 성전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7,24-27). 예수님의 관심은 이제 더 이상 군중이 아니라, 제자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의심하기도 하고 믿기도 하는 제자의 전형인 베드로에게 집중됩니다.
②물 위에서 안전한 곳은 배입니다. 배를 떠나 물을 걷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풍랑에 시달리는 것은 다만 배일뿐입니다. 마태오는 이 배로 교회를 상징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만난 풍랑과 고뇌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만을 생각할 때 그는 강할 수 있지만 인간적인 조건을 의식할 때 의혹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③그리스 단어의 ‘의심’은 ‘양쪽으로 들어가다’의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믿음으로 배의 키를 잡았으면 그 방향으로 바람과 파도를 물리쳐 나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 시련들 안에서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합니다.
④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흔들리는 공동체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합니다. 개인은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기도하고 또한 공동체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는 한 우리는 물위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하지 않고 흔들리는 공동체를 바라보고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다시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 왜 의심하였느냐?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14,32-33)
①마르코 6,52에서 제자들은 마음이 무디어 알아듣지 못하는 망연자실로-그들은 넋을 잃었고라고 기록하였고, 백성들은 빵의 표징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완고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6장에서는 ‘내 몸을 먹으라’는 말씀에 많은 제자들이 듣기에 거북하다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②마태오 시대의 공동체는 무슨 일인지를 알아듣고 즉각 엎드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고 고백합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는 그분을 모셔들여야 멎게 됩니다. 배안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③예수님께서는 배 안에 있는 이들을 깊은 물에서 구해 내심으로써(시편 18,17; 32,6; 144,7; 이사 43,2 참조),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드러내십니다.
5.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14,34-36 (마르 6,53-56)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겐네사렛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 물가에 있던 마을 이름인데, 이 호수 서쪽, 카파르나움 남쪽으로 땅이 비옥하고 사람이 많이 살던 고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마르 6,53; 루카 5,1 참조).
병행구 마르 6,55에서 사람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이 단락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행동을 보게 해 줍니다. 그들은 먼 곳까지 사람을 보내어, 두루 뛰어 다니며, 병든 이들을 데려옵니다. 그들은 병든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장
1.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The traditions of the Pharisees;15,1-9 (마르 7,1-23)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15,1-2)
①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유다 백성 가운데에서 가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또 때로는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원로들 또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의 공동 적대자로 등장합니다. 특히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곧 마태오 복음서가 최종적으로 편집될 때, 대부분의 율법 학자들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그렇다고 마태오가 율법 학자들에 대해서 항상 논쟁적인 것은 아닙니다(8,19; 13,52; 23,2.34).
②조상들의 전통은 구약 성경의 율법을 풀이한 해설과 세세한 행동 지침을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전통은 유다교 라삐들의 학교에서 구두(口頭)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나중에 미쉬나와 탈무드로 문서화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성경의 율법과 거의 대등한 권위와 효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것이 마르 7,8에서는 “사람의 전통”, 마르 7,9.13과 마태 15,3.6에서는 “너희의 전통”으로 불립니다.
③식사 전후에 손을 씻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악을 씻는 관습인데 옛날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됩니다(탈출 30,18-21; 신명 21,6). 본디 성전에서 전례 집행자들만 손을 씻었는데, 예수님 시대에 들어오면서 신심 깊은 바리사이들을 통하여 열성적인 일반 대중에게도 퍼졌습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아예 큰 물통을 만들어 놓고 온몸을 씻었는데, 그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독자들은 이러한 관습을 잘 몰랐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이 첨가되기도 합니다(마르 7,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너희는 또 어째서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제가 드릴 공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 되었습니다.’하고 말하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15,3-9)
①히브리말 코르반(Corban)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을 뜻하는데 하느님께 바쳤다는 서약 또는 성전금고를 뜻하는 말입니다. 코르반은 법적, 종교적 선언으로써 어떤 이들은 늙고 생계유지가 곤란한 부모를 공양하는데 써야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도 하였습니다. 재산을 모두 하느님께 바치기로 ‘코르반’ 했기 때문에 부모를 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교묘하게 율법을 빙자한 범죄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예수님 오시기전부터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살아계신 부모보다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고는 당연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세의 자리 확보를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이 정한 신앙의 충성도에 대한 만족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②15,8-9는 칠십인역에 따른 이사 29,13을 인용한 것입니다.
2.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On clean and unclean) 15,10-20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15,10-14)
①깨닫다는 마태오의 중요한 용어입니다. 깨달음은 먼저 잘 듣고 그럼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 정결례와 관련해서 온몸으로 순종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손을 씻는 관습에 대한 가르침이(1-9절) 이제 ‘깨끗함과 더러움’ 또는 ‘정(淨)과 부정(不淨)’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로 심화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유다교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이 주제는(레위 11─16 참조) 여기와 마르 7,14-23에만 등장합니다(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12-14절은 본디 이 이야기에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카 6,39에서 이에 대한 반향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외적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유다인들의 이 종교 의식적 예방 조치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개념을 대비시키십니다. 악은 바로 사람 안에 있고,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그가 하는 말(18절. 거짓말 또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 또는 그가 이웃에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19절.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 결국 사람의 깨끗함과 더러움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표출됩니다.
③‘그들은 눈 먼 길잡이들이다’ 손을 씻는 정결예식이 위생을 위해 타당하다 할지라도 종교적 의미는 상실된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오경은 기원전450년경 에즈라에 의하여 이스라엘에게 재공표 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성토마스아퀴나스는 ‘사람은 행동을 보고 하느님은 그 의도를 보신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15,15-20)
이러한 ‘악덕의 목록’ 또는 ‘덕의 목록’은 당시의 대중적 철학, 그리고 유다교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신약 성경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로마 1,29-30; 갈라 5,19-23; 1베드 4,3). 여기에 나열된 모든 악덕이 그것을 저지르는 개인에게만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패륜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끼치는 해악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3.가나안 여자의 믿음 15,21-28 (마르 7,24-30)
15,21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띠로와 시돈은 신학적인 의미도 지니는데 예수님의 선교수행에 한몫을 하게 되는 이방인 지역을 말합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자신을 가나안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역사가 흐르면서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으로 여러 지방, 여러 종족을 가리키게됩니다. 곧, 옛날 이스라엘인들이 차지한 ‘약속의 땅’이스라엘인들 가운데에 살던 원주민 종족, 예수님시대의 페니키아인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 텍스트에서는 이 여인이 이교인이라는 사실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여인의 외침에 예수님께서 침묵하시자 제자들이 15,23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청합니다. 돌려 보내다의 그리스말은 풀다, 풀어 주다의 뜻입니다. 그여자를 그의 걱정에서 풀어주라는 의미에서 은혜를 베풀어주다, 청을 들어 주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5,24“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으로, 10,5-6에서 내리신 지침의 내용을 되풀이하십니다.(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이 말씀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우선 부인의 청을 바로 수락하지 않으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시험하려고 하셨던 것일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실제로 당신 자신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에 파견되었다고 생각하셨던 것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 결국 부인의 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이교도들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리는 예고가 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여러 본문이 이 둘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15,26-28)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강아지에 비유되는 것 쯤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드디어 이 여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의 신앙이 나자렛에서 더 이상 이끌어 낼 수 없었던 기적을 끌어냅니다. 이제 복음의 보편성은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옮겨 가셨다....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5,29-30)
4. 사천 명을 먹이시다 15,32-39 (마르 8,1-10)
두 번째 빵의 이야기에는 첫째 이야기와(14,13-21) 비교할 때에 몇 가지 변형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자비심과 군중의 배고픔이 강조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행동을 하시어 군중에게 앉도록 분부하십니다. 또한 문체는 첫째 이야기와 달리 성찬 제정 이야기의 영향을 덜 받고 “물고기”도 34절과 36절에서 두 번 언급됩니다. 남은 조각 일곱바구니의 일곱은 이 표징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뜻을 지녔을 것으로 봅니다. 두 번째 빵의 기적이후 16장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시작됩니다.
16장
1.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 16,1-4(마르 8,11-13 ; 루카 12,54-56)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16,1-4)
①시대의 표징은 메시아가 오는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 또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되는 신념으로 싸우던 두 그룹이 예수님을 반박하는 일에 의기가 투합 되었습니다.
②요나의 표징은 12,38-42에서 표징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복음서[5] 12장 내용참조).
③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하고 그들이 회개한 이야기를 전하는 요나서는 예언자설화이지만 교훈 설화로 각색되었고 사실상 요나서는 지혜서에 가깝습니다. 니네베사람들은 이 낯선 예언자의 ‘니네베멸망’이라는 소식을 듣고 왕의 명령을 받은 도시전체가 회개운동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뉘우쳐 회개하고 심지어 동물들까지 회개에 참여하라고 왕은 명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보다 훨씬 더 민감한 이 족속에게, 하느님께서 용서를 베푸신다는 내용입니다.
④요나의 표징은 세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❶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두 그분의 존재와 구원행위를 가리키는 단 한 가지 표징일 뿐이다. ❷요나가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후 다시 살아난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죽음의 영역에서 사흘 후 부활하실 것이다. ❸요나는 니네베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며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도시 전체가 회개한다.
2.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누룩 16,5-12 (마르 8,14-21)
The yeast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16,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마태오만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12절)을 “누룩”으로 표현합니다(루카 12,1에서는 누룩이 “위선”을 가리키고, 마르 8,15에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함께 “헤로데의 누룩”도 나온다). 이러한 의미는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유다교에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무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가르치고 이끄는 자들로서 그들의 역할 또는 기능을 가리킬 것입니다. 누룩은 긍정적 부정적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잠재된 힘으로 부풀리는 기능이 있어 빵을 만드는 데는 한 역할이 되지만 여기에서는 해로운 감추어진 악 영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군중의 필요를 바로 알아듣고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여 좋은 영향을 끼치는 누룩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두가이파의 대부분은 사제들입니다. 그들은 제사 거행에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전례만 거행할 수 있다면 로마의 노예가 되어도 상관없었고 거기에 사제라는 특권의식도 포함되어있습니다.
누룩에 관한 말씀에서 제자들을 위한 이 단원의 중요성을 요약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바리사이파와 율법교사들의 전통적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서서히 분리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지도층, 또는 이웃에 의해 좌우되는 군중(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②군중으로부터 자신의 신념으로 분리되어 선택의 길에 들어서는 제자들
③예수님의 적대자 들
3.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16,13-20
베드로의 믿음 고백과 수위권 (Peter's profession of faith;his pre-eminence)
1)예수님의 질문-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공동체에 생활의 규범들을 주시고 이제 이 공동체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입니다. 기나긴 준비 단계의 끝에 예수님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6,13-14)
①카이사리아는 헤로데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헌납한 도시이며 그의 아들 필립 헤로데가 시저를 추앙하는 거대한 대리석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물으십니다.
②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의 답변은 그리스도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자: 신명 18,15-18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모세)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예레미아: 2마카 15,14 하느님 특사 예레미아 ⒞엘리야: 말라 3,23의 엘리야는 기다림의 대상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세례자요한을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③마태오만이 예레미야를 언급합니다. 당시의 유다교에서는 이 예언자가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오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공관 복음서 전통이 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던 것입니다(마르 6,15; 루카 7,16.39).
2)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16,15 (마르 8,27-30 ; 루카 9,18-21)
‘예수님께서“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6,15-17)
➀마태오복음서에만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느님'(Θεοῦ τοῦ ζῶντος)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합니다(마태 16,16).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은 구약에 뿌리를 둔 표현(신명 5,26-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도; 여호 3,10-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이사 37,4-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 뜻이 충만하게 펼쳐집니다.
➁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천사들, 선택된 백성, 신심 깊은 이스라엘인 또는 메시아에게 적용됩니다(2사무 7,14-다윗에게 전하는 나탄의 예언‘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시편 2,7-“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이 표현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하느님의 선택과 그분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➂살아계신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자신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곳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다고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은 이해합니다.정확하게 신학적으로 그분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에게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➃초대그리스도교에서는 처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이래 이 선택과 사명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유일하고 결정적인 성격을 강조합니다.예수님 공동체의 형성 과정 시점으로 볼 때 베드로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고백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나중에 예수그리스도 공동체를 형성하는 토대가 됩니다.
➄살과 피; 인간의 사고로 그분을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우선 베드로의 통찰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살과 피는 나약한 인성을 지닌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알려주셨다는 그리스말은 계시하다, 드러내 보이다 등도 뜻합니다. 이 계시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베드로는 그 뜻을 다 깨닫지는 못하였음을 스스로 드러냅니다(22-23).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도 각자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은 묵상 끝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지 질문 받은 상태로 살아야 하며 질문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3)너는 petros(바위)이다. 나는 이 petra(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 16,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8)
➀요나의 아들 시몬(시몬 바르요나),살과 피, 매고 푼다, 하늘나라의 열쇠 등 아람어적 운율은 이 텍스트가 오래 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➁베드로는 아람말 케파(바위)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말 페트로스(petros)는 남성형, 반석은 페트라(petra)여성형입니다. “너는 petros;πέτρος(바위)이다. 나는 이 petra;πέτρᾳ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 당시에 이름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은 아브라함을 페트라 라고 했습니다. 반석은 유다인들에게 최고의 찬사입니다.시몬은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초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십니다.
②돌의 표상
이사 28,16 -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70인역은 이 돌을 메시아를 지칭하는 초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1베드 2,7-8 -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시편 118,22),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이사 8,14)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그리스도는 이른바 걸림돌(scandalon, σκανδαλισθῇ)이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아무도 중립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돌에 차여 넘어지기로 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믿기를 거부할 경우 몰락이 예정되어있다는 뜻입니다.
➂에클레시아 : 교회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교회 또는 공동체모임, 집회, 회중을 뜻하는 히브리 말 카할(qahal 성회;시나이산의 첫 집회)을 번역한말로 보입니다. 집회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단어로 ‘소드’와 ‘에다’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식을 처음 가진 곳이 시나이산이었는데 이 첫 집회를 카할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카할을 라틴어성서에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신명 23,2; 1역대 28,8; 느헤 13,1)가톨릭의 라틴어 가토릭쿠스는 보편적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➃교회라는 단어는 베드로가 기초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할 것을 자유의지로 결정한 사람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양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집회는 그분이 몸소 불러 모으시는 집회,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우시는 집회가 될 것입니다.
⑤저승의 세력은 저승의 대문 또는 지옥문. 죽은 이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는 교회의 불멸성을 의미합니다.
⑥베드로의 수위권 ; 하늘나라의 열쇠 16,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가톨릭, 개신교, 동방교회 등이 각각 주석의 이견을 주장하는 부분입니다. 가톨릭교회 전통은 베드로의 후계자들이 그 수위권(首位權)을 이어받는다는 전통으로 이 본문을 제시합니다. 동방교회는 모든 주교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계승한다고 여깁니다(교황 이외의 교리는 가톨릭과 같다). 개신교 주석은 교회초창기에 베드로가 지닌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베드로에게만 해당된다고 여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자체가 신앙의 초석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위에 세우시는 교회는 베드로를 믿고 모든 일을 맡기고 떠난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은 교회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⑴영적인 권한
마침내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며 이사 22,22가 말하는 첫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매고 푸는 권리를 약속하시고 18,18에서는 사도단에게, 요한 20,23에서는 함께 모인 제자들에게 매고 푸는 권리를 주십니다. 이 권한은 특별히 죄를 용서하는 데서 드러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교회와 관련된 영적 권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 열쇠 즉 교도권은 23,13 율사들에게 주어져있었습니다. 매고 푼다는 것은 랍비들에게 잘 알려진 표현입니다. 금령 또는 명령을 해제하거나 반포하는 것은 물론 금지 형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했었습니다.
⑵베드로와 함께 천국의 열쇠를 지닌 공동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상의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 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체험되어야 하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현존의 표징인 공동체이며,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가져오는 도구입니다.이 교회 공동체가 베드로와 함께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가 천국의 열쇠입니다. 공동체 안의 각 개인이 이웃에게 하느님나라를 열어줄 수 있습니다.
4.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16,21-23 (마르 8,31-33 ; 루카 9,22-22)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16,21)
그때부터는 하느님 아들의 신비를 장엄하게 계시하는 시작으로부터입니다. 제자들이 메시아를 고백한 이상, 그분은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나갈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는 장소는 예루살렘임을 밝힙니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이는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라마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십자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수난예고 후에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적용시키려는 의미로 스승을 어떻게 따르는지가 여기에 배치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2-23)
‘맙소사’의 그리스말 직역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은혜로우시기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그러한 일들을 막아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길을 막는 걸림돌로 나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관점의 대립을 의미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면서도 영광으로 이르는 길에 필연이 따라오는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5.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하는가?16,24-28 (마르 8,34 ; 루카 9,23-27)
The condition of following Christ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16,24-26)
➀‘버리다’는 자신에의 집착을 포기하고, 단념하고, 끊어버린다는 의미의 Renounce이며,그리스말은 아르네오마이(άρνέομαι)로서 (자신을)부정하다, 저항하다, 거리를 두다의 의미입니다.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기만의 에고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➁제자들의 존재는 예수님의 實存에 의해 정의 됩니다. 예수님의 실존에는 십자가가 포함됩니다. 날마다 지는 십자가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온전한 투신을 의미하는 매일의 선택입니다.
➂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매 순간 자신의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가치 추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잃고, 그분을 향한 지고한 신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절제하고 희생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얻다’의 직역은 발견할 또는 찾을에 해당됩니다.
➃목숨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프쉬케(ψυχική)’ 영혼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은 ‘네페쉬’인데 목숨대신 ‘자신’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life로 번역된 목숨은 한때의 숨을 말하기보다는 목숨이 있는 인생의 기간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입니다. 자신의 가치 추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잃고, 그분을 향한 지고한 신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절제하고 희생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왕국의 ‘형태’가 아닌 왕국의 ‘상태’로서 하느님의 나라를(9,27) 경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유일한 인물인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베드로처럼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베드로처럼 고백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하며 강하면서도 약하고 사랑하면서도 배신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그리스도께 돌아가면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6] 14⎯16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