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서 [7] 17⎯18장 공동체를 위한 교훈
13,53-18장까지는 갈릴래아 선교기가 계속됩니다.17장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연결되어있고 다섯 개의 단락으로 되어있습니다. ①17,1-8 변모의 사건 ②17,9-13;엘리야에 관한 질문 ③17,14-20;마귀를 쫓으시다 ④17,22-23; 두 번째 수난예고 ⑤17,24-27 성전세를 바치시다.
17장
1.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The transfiguration)17,1-8 (마르 9,2-10;루카9,28-36)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17,1-3)
①‘엿새 뒤에’라는 말은 복음서에서 단순히 어떤 시간의 흐름을 말하기 보다는 흥겨운 대중 축제인 초막절 기간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축제는 속죄의 날 엿새 뒤에 시작하여 이레 동안 지속됩니다(레위 23,34.36). 따라서 복음서의 편집 이전 전통에서는 엿새 뒤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따로 지내신 축제의 첫 날이거나 모두 흥겹게 즐기는 축제의 마지막 날일 수 있습니다.
②이 단락은 베드로의 고백(16장)과 연결되어있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공관복음서 이전의 전통에서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수난 전에 배치되어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일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③2베드 1,17-18에도 거룩한 변모의 전통이 특수한 형태로 전해집니다. 베드로 둘째서간이 예수님의 변모사건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위대함이 당대의 사람들을 현혹하는 또는 즐겨 추구하는 조작된 신화나 영지주의적 개념으로서의 신비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목격적 증인으로서 증언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④높은 산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태오는 마지막 계시가 시온의 거룩한 산이 아니라 민족들이 모여드는 종말론적 산(이사 2,2-3;11,9;다니 9,16 참조)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가리키려는 것 같습니다.
⑤2절 ‘모습이 변하다’라는 이 동사는 영적인 변모를 뜻합니다(로마 12,2; 2코린 3,18).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모습이 명백히 부활을 예시합니다. 세 공관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옷에서 변모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유다교 종말론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옷은 선택을 받아 천사들처럼 된 이들에게 부여된 천상영광의 표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튼 이 신비로운 장면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전망 안에서만 의미를 갖게됩니다.
⑥이제 따르고 들어야 할 대상은 율법(모세)과 예언자(엘리야)들의 정점인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계약’의 선구자와 ‘증인’(묵시 11,3-6 두 증인 참조)으로서 나타났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나타나야 하는데(말라 3,23) 그는 세례자 요한과 동일시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17,4-5)
①이 일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죽음에 대한 성부의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한 변모는 수난의 어두움을 통과하려는 아들의 신념에 대한 성부의 응답이며 예수님의 수난예고로 참담해진 제자들에게 수난을 이해하도록 하는 성부의 음성으로서, 제자들을 위해 선사된 성부의 계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들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②들리는 소리는 시편 2,7(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와 이사 42,1(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를 합성한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사람들에게 울려 퍼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3,17) 하늘의 목소리가 예수님을 “아들”로(시편 2,7 참조),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주님의 종’(이사 42,1)으로 일컫는데(3,17 각주 참조) 이 거룩한 변모에서는 예수님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이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예언자’로 나타납니다(신명 18,15를 인용하는 사도 3,22 참조). 또 세례 때에는 하늘의 목소리가 예수님께 말씀하시지만, 여기에서는 제자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③루카복음9,31에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파스카사건이 실현될 장소로 언급하고 있으며, 모세, 엘리야,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 즉, 세상을 떠나실 일에 관하여 대화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성취할 죽음 곧, 엑소도스(ἔξοδος)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탈출은 인류를 하느님나라로 인도하는 완전한 탈출이었습니다.
④초막 셋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의 초막절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고(레위 23,27;신명 16,13), 하늘에 영원한 초막을 가지고 있는 천상 존재들을 위한 지상 초막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산속에 세 분의 텐트를 쳐서 이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순간을 간직하고 싶은 베드로의 순간적인 마음일수도 있습니다.
⑤구름은 시나이산(탈출 19,16;24,15-16), 만남의 천막 위(탈출 40,34.35)성전 위(1열왕 8,10-12) 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는 표지입니다(2마카 2,7-8 참조).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17,9)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10)
이 예언적 사건 후에 제자들에게 깊은 침묵이 찾아옵니다. 오직 침묵만이 하느님 신비의 깊이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아들이 죽음을 거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죽음을 거치는 부활은 자기들 같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계시한 비밀을 지키라는 당부는 묵시 문학의 고전적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다니 12,4.9 참조). 이것이 공관 복음서들,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맥락 안에 되풀이됩니다(마르 1,34; 1,44; 8,30).
이 침묵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폭발하게 됩니다(사도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kerygma)됩니다. 베드로의 이 강론은 사도들이 유다인들에게 하는 설교의 기본구조를 보여줍니다. 곧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신 일입니다. 이렇게 선포되는 일들은 옛 계약을 잇는 것으로 제시되고 주님과 메시아로 등극하신 예수님에게서 실현되는 예언들을 성취하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성령강림의 현상이 언어폭발로 드러난 표징을 베드로는 요엘서의 옛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사도 2,17-21)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그날에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그 크고 찬란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어둠으로, 달은 피로 바뀌리라.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요엘 3,1-5)
2. 엘리야의 재림 17,10-13 (마르 9,11-13)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17,10-13)
➀유다교의 한 전통에서는 말라 3,23을 바탕으로 엘리야를 메시아의 선구자로 봅니다. 그가 백성을 일치와 충성으로 한데 모아 메시아가 오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자요한을 이미 자기백성에게 왔지만 그들에게 배척을 받은 엘리야로 소개합니다. 이제 같은 운명이 예수님과 그분의 선구자를 한데 묶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저질렀고 또 계속 저지르는 배척에 관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➁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 세례자요한이-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고 하십니다. 선구자가 총체적인 화해를 이루게 할 것인데 사실상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그는 화해의 직무를 하지 못하고 그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은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으리라는 성경구절은 이사 52,14;53,4-10등의 주님의 종의 고난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사야의 주님의 종은 고난 받는 주님의 종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 연관성은 두 사람 모두 고난을 받을 것을 예고하며 세례자요한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➀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민족에게 살아있는 전통입니다. 엘리야로부터 이스라엘 안에 전통적인 예언 운동이 시작됩니다. 열왕기가 전해주는 엘리야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엘리야가 백성의 생활에 심각한 결과를 미치는 아합왕과 맞서는 내용입니다. 이 별난 예언자는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남겨져버렸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아합왕의 나봇 포도원 사건을 질책하고(21,27), 카르멜산에서(1열왕 18장)450명의 바알예언자들에 맞서서 그 홀로 바알이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자극적이고도 의미심장한 사건을 역사에 남긴 극히 인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엘리야를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이스라엘은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마카베오 시대에는 더렵혀진 성전의 돌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회의를 한 끝에 엘리야가 오면 묻기로 하고 별도의 창고를 지어 보관하였습니다(1마카 4,46 그리고 예언자가 와서 말해 줄 때까지, 그 돌들을 성전 산 적당한 곳에 쌓아 두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논쟁이 깊어져 해결할 수 없을 때 엘리야가 오면...이 그들의 상용어이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성경의 마지막예언서 말라키서는 구약을 마감하는 예언자로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엘리야를 증언하면서 사라집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➁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대리자적 역할을 수행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교 확립에 기여하였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은 하느님 한 분뿐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민족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모세의 계약과 율법이 종종 대비되긴 하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세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었다는 것이 신약의 정신입니다(마태 5,18). 그리고 신약의 이러한 정신은 민족종교로서의 유다교에서 세계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로 이행과 완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하산후의 사건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17,14-20 (마르 9,14-29 ; 루카 9,37-43)
산 아래 남은 제자들이 한 소년의 더러운 영을 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주님께 자신의 아들이 간질병에 결렸다고 말합니다.
‘간질병에 걸리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달’[月;luna]이라는 명사에서 파생한 동사입니다. 어떠한 발작 증세가 달이 변해 가는 모습과 관련된다고 여긴 것입니다(이러한 생각이 서양에서는 현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예컨대 영어에서는 ‘lunatic’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증세는, 자다가 발작적으로 일어나서 제법 정돈된 행동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드는 몽유병이 아니라, 간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마르코와 루카는 이 병을 곧바로 “영”(악령)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쫓아내신 뒤에야 그 존재(더러운 영)이 드러납니다.
17,17의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는 이 말씀은 당신을 찾아온 병자의 아버지에게 하시는 질책도, 군중이나 제자들에게 직접 하시는 꾸지람도 아닙니다. 그들 너머 믿지 않는,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11,16; 12,39-45).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17,16-20)
①‘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는 일부 수사본에는 ‘믿음이 없는’으로 번역 되어있습니다.
②믿음은 산을 옮겨 놓을 만큼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1코린 13,2). 마태오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아주 분명하게 신앙을 촉구하는 것으로 구성해 냅니다. 마태 21,21에서는 또 기도할 때에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겨자씨”에 관한 언급만 빼고서 이 말씀이 되풀이됩니다.
③루카 17,6에도, 믿음의 힘을 강조하는 문맥에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산”이 아니라 “나무”라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요청에 대한 답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의 힘에 관한 이 말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믿음에는 작고 큰 것이 없고 믿음 자체가 있기만 하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지금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장차 엄청난 일을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엄청난 위업에 비하면 지금의 믿음의 역할은 겨자씨에 불과하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④믿음은 사건의 비범함을 믿는 것도, 겨자씨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⑤이러한 말들은 팔레스티나지역의 특유의 것으로서, 인간의 눈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대상인 ‘겨자씨’, 또 인간의 눈으로 명확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스스로 뽑혀져서 바다에 옮겨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다’를 나타내는 격언적 관용어입니다. 그리스말에서는 ‘바다 속의 산’, 또는 ‘바다 속의 나무’가 불가능한 일에 대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⑥‘산을 옮긴다’는 말이 탈무드에서는 논쟁 중 사소한 것까지 꼬치꼬치 따지는 명민함(그는 산을 뿌리째 뽑는 사람이다) 및 돌이킬 수 없는 결연함(나는 차라리 산을 뽑겠다)등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⑦17,21;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라는 21절이 들어 있습니다.
4. 두 번째 수난예고 17,22-23 (마르 9,30-32 ; 루카 9,43-45)
변모사건 후 두 번째 수난예고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고 되어있는데 루카 병행구에서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하여 논쟁합니다(루카 9,46-48).
5. 성전 세를 바치시다 17,24-27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다.’(17,24-27)
①랍비들에 의하면 성전세에는 보속의 효과가 있습니다. 성전과 율법을 존중하고 거기서 구원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②“성전 세”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디드라크마로서 2드라크마(= 반 세켈)를 뜻합니다. 그래서 ‘디드라크마’, ‘2드라크마’ 또는 ‘반 세켈’로 옮기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그 기능이기 때문에, 통상 “성전 세”로 번역합니다.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나라 안에 살든지 밖에 살든지, 예루살렘 성전 유지를 위하여 일 년에 “반 세켈”을 내야 했습니다(탈출 30,13-15). 한 세켈은 통상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이 세금은 로마나 그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로마 돈이 아니라 유다 돈으로 내야 했기 때문에, 성전 마당에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21,12; 요한 2,15).
③기원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된 뒤에도, 로마인들은 계속 이 세금을 거두어들여, 성전이 있던 자리에 세운 로마의 신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의 신전 유지에 사용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성전세를 계속 거두어 신전에 바치도록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많은 유다인들이 맹렬히 항거하였습니다.
④본문에서 성전세 징수원들은 이 질문을 직접 예수님께 하지 않고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⑤세상 임금들의 “자녀들”(직역: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들이거나 그들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⑥17,27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 18,6의 형제를 죄짓게 하는 자 스칸달론과 같은 단어입니다.
“면제받는”의 직역: “자유로운.” 이 “자녀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법적으로 ‘자유로운’ 이들은 이 절 앞부분에 나오는 이유로 세금을 낼 의무가 없습니다.하느님의 아들들은 성전세를 낼 필요는 없지만 공동체를 정돈하는 규칙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의 자유를 위해 어떠한 감정도 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규정을 지키는 것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유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⑦스타테르는 그리스 은화로 4드라크마이다. 이는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에 해당한다(24절 각주 참조).
18장 교회공동체를 위한 교훈
Discourse on the church(교회설교)
18장은 이른 바 교회론적이라 불리는 장입니다. 하느님나라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①누가 가장 큰가?(18,1-4) ②다른사람을 죄짓게 하지마라(on leading others astray) 18,5-10 ③길 잃은 양 (The lost sheep) 18,12-14 ④형제적 타이름 (Brotherly correction) 18,15-18
⑤공동체의 기도 (Prayer in common) 18,19-22 /⑥매정한 종의 비유 18,23-35
1.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18,1-5 (마르 9,33-37 ; 루카 9,46-48)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8,1-5)
제자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제일 큰 사람이 누구인가를 질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답변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①“어린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이 2,8-11에서는 갓 태어난 예수 아기를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부름에 대답하여 사람들 가운데에 서 있을 정도로 큰 아이를 뜻합니다. “어린이”가 무죄함이나 순수함, 또는 도덕적 완전성의 본보기로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과 달리 이들은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남에게 종속된 존재, 남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어린 아이는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성부께서 우리로 하여금 늘 성장하도록 촉구하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일입니다.
②이 구절에서는 생각의 반전(反轉)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을 맞아들이라고 권유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임은 ‘의식의 전환’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겸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하십니다. 미래를 믿고 온전히 내맡기는 어린 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또한 어린이는 나약한 존재이며 무시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 이름으로’는 그분을 믿는 전적인 신뢰 또는 ‘나를 위하여’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당신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18,6-9 (마르 9,42-48 ; 루카 17,1-2)
18,6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①‘죄 짓게 하는’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은 유혹하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을 의미합니다. 이 배경을 토대로 18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②작은 이들은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나, 순수한 신앙의 초심자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또는 공동체 안에서 믿음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믿는다는 이유로(이성적 근거가 되는 지식 없이) 경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 믿음이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믿음의 테두리를 고수하는 것이 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믿음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교의적 가르침에 수긍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감성으로 느낀 것을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신비 체험으로 고집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철저하고 성실한 신앙인의 모습에 덕이 없다면 그의 신심이 상대에게 스칸달론이 되기도 합니다.
③스칸달론은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함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함정이 인간의 현실적 조건임을 잘 알고 계시지만 함정은 운명의 힘이 아니기에 죄의 기회를 피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처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④“연자매”는 고대시대에 많이 사용하는 나귀가 돌리는 커다란 맷돌을 가리킵니다.여행길에 연자 맷돌(뮬로스 오니코스 mulos onikos)를 보신분도 있을 것입니다. 목에 걸 수도 없습니다.예수님의 가혹하고도 비장한 말씀이신데 우회적인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인 즉 남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라는 것입니다.
18,7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①직역: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 때문에(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로 해서) 세상에 불행이!” ‘죄짓게 하다’의 직역: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하다’(이사 8,14-15; 로마 9,33; 1베드 2,8 참조). ②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나 계기는 많습니다. 다른 사람, 세상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세상”은 단순히 자연도 아니고, 요한 복음서에서처럼 하느님의 계시에 반대하는 존재로서 인류도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악의 영향에 조건 지어진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인류를 4장에서처럼 사탄이 다스립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상이 ‘불행한’ 것이고, 이러한 세상에서 “작은 이들”에게는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8,8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9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①손이나 발을 잘라버려도 다른 손이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불을 면하기 위하여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말씀이십니다.
②지옥의 ‘게헨나’(gehenna; 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힌놈(gehinnom)을 그리스어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남동쪽에서 키드론 골짜기로 통하는 골짜기를 그렇게 불렀는데 이곳에서 몰록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므나쎄는 이곳에서 노예들과 자신의 아들들을 번제하였습니다(2열왕 16,3;21,6). 이후 게헨나는 유다인들에게 지옥으로 불리어졌고 쫓겨나서 비통하게 우는 어두운 곳이 됩니다. 후대에 이곳은 쓰레기 소각장이 되었습니다. 게헨나는 쓸모없는 것들이 버려지는 곳입니다. 영원히 버려집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영원한 벌은 하느님만이 내릴 수 있습니다.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권고가 다시 나옵니다.
18,10“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왔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11절이 들어 있다.)“천사들이” 여기에서는 “작은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교에는 이러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작은 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천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작은 이들을 가장 많이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되찾은 양의 비유 18,12-14 (루카 15,3-7)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①목자와 양떼의 표상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고전적인 주제입니다. 또한 흩어진 양, 잃어버린 양을 되찾음은 구원을 뜻하는 전통적인 은유입니다(예레 23,1-4; 에제 34,11-16).
②마태오 복음서에는 “양”이 ‘길을 잃은 것’으로 나오지만(12.13.14절), 루카 복음서에는 ‘잃어버린 양’으로 되어 있습니다(15,4.6). 루카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찾아내어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태오에서는 공동체의 작은이들에 대한 지도자의 책임에 적용되나, 루카에서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찾으심을 강조합니다.
➂여기에서 ‘작은 이들’은 멸시 받거나 또는 규정 같은 것이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구성원들로 여기는 것으로 보이며, 길 잃은 사람을 되찾아야 하는 목자의 의무를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당시의 유다교에서처럼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이렇게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 메시아 시대의 한 특색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 길을 잃음은 도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교리적인 것입니다(24,4.11.24; 2티모 3,13; 1요한 1,8; 2,26; 3,7; 묵시 12,9; 19,20).
➃‘작은 이 들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은 교회가 익명의 집합체가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이 하느님께 있어 유일한 존재이며 형제들에게도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하는 공동체임을 설명해 줍니다.
⑤앞에서도 언급된 작은이들에는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온 세리, 죄인, 이방인 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 세리와 죄인들 등과 같은 표현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범법의 죄인과, 멸시받는 직업에 속하는 사람들을 표시했습니다. 이 직업은 부도덕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부정직하다고 간주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부정직하다고 간주되는 두 번째 부류가 도박꾼, 고리대금업자, 세리,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품꾼이기 때문에 성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했습니다.
보통 죄인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로서 종교적인 무지와 도덕적인 무지로 구원의 통로가 차단된 사람들입니다. 랍비의 문헌은 이들을 ‘땅의 무리’ 또는 어둠의 자손- ‘암하아레츠’라고 부르며 경멸하였습니다. 죄인으로 여겨지든, 실제로 죄인이든,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이 죄를 지어본 일 없는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서 살았던 사람이 바른 길로 돌아왔을 때 더욱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⑥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한 마을이 공동으로 양떼를 관리하기도 합니다. 그날의 책임 목자는 그중 하나를 잃으면 배상하거나 추적하여 흔적이라도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99마리를 남겨두고 한 마리를 찾아야하는 목자의 절박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99마리도 소중하지만 죄인이었다가 돌아온 작은 자들을 기쁘게 맞으라는 것입니다.
양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 주인 없이 남겨진 99마리에 내가 속해있을 때 우리를 모두 남겨놓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주인의 모습에 남은 양들은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주인은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는 구나! 내가 혹 길을 잃는다면 저렇게 나를 찾으실 것이니, 그러니 매우 기쁜 마음으로 친구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4.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18,15-18 (루카 17,3-3)
18,15“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⑴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⑵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⑶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⑷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➀여기의 형제는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을 말한다.
쿰란의 ‘규칙서’에 15-17절과 부분적으로 비슷한 규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쿰란의 규정은 매우 엄격하다는 특징을 지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이 구절은 ‘죄인들을’ 즉시 공동체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일부 완벽 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의 열성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공동체 전체에 알리기 전에 먼저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시도를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하라고 권장하시는 것입니다(레위 19,17; 신명 19,15 참조).
➁‘죄를 지으면’은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의 동사형 하마르티노입니다(동사의 형태 hamartano는 마태 18,15; 요한 5,14; 1코린 15,34; 티토 3,11참조/ 명사 하마르티아는 마태 1,21; 요한 9,41; 로마 7,7; 17,20; 2코린 5,21; 히브 9,26 참조). 하마르티아는 사격할 때 과녁을 벗어나다, 표적을 상실 하다, 목표 지점을 벗어나다, 목표나 목적을 잃다, 빗나가다 등으로 번역되며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이 못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나오는 죄에 해당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죄가 의식을 어둡게 하고 모호하게 하는 것과 똑같이, 죄는 궁극적으로 의식이 성숙되어야만 극복 될 수있습니다. 자신에 관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삶의 목표를 빗나갈 것이고 그래서 죄를 지을 것입니다. 오직 자아 인식과 의식화 작업에 투신함으로써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지부동으로 자신에 관한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쩌겠는가?
➂‘얻는다’는 것은 그 “형제”를 다시 신앙으로 이끌어 들인다거나 개인적인 우정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떠나려고 하거나 공동체에서 제명당하려고 하는 구성원을 다시 그 안으로 받아들이게 됨을 뜻합니다. 형제의 잘못 타이르는 목적은 형제를 얻기 위한 것이지 고쳐 줄려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 결단을 내리기 전에 여러 차례 형제적 권고를 해야 하고 더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형제를 얻는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으면 ⑴-⑷까지 네 번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피차에 기도와 성찰을 거칠 것입니다.
➃‘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그렇게 죄인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너희의 책임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실 세리나 죄인은 예수님께서 각별한 관심으로 사랑하신 이들입니다. 이 텍스트의 핵심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를 용서하고 보류하는 권한은 공동체가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에 올바로 행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공동체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➄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의 권한이 여기에서는 이 말씀을 듣는 공동체 또는 사도단에게 부여됩니다.
5. 공동체의 기도 (Prayer in common) 18,19-20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①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십니다. 공동체의 기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내 이름으로 둘 셋씩 모인 곳이 270여개 공동체로 갈라져 나가도 좋다는 뜻도 아니고, 천 여명이 모이면 더 잘 들어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함께는, 교회 공동체와 연결된 두 세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복자들은 먼저 성전을 파괴합니다. 정신의 집결지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생각을 가진 군중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 두 사람이라도 같은 생각을 가지면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기투합하는 일이 좋은 목적이 아니면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처럼 위험합니다.
②자신의 구성원들을 공동체로부터 잘라버려야 하는 경우 전권을 행사하기 전에 기도해야하고 전권을 행사하는 그 안에 기도의 능력을 지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핵심이 기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형제가 회개하도록 하느님께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공동체는 기도 안에서 믿어야합니다. 또한 마음을 함께하는 공동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이타적인 기도가 됩니다.
③직역: “…… 모인 곳, 거기에 나도 그들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문맥은 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유일한 모임인 “교회”(17절)에 결합되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발휘하는 힘은 요한 14,12-14; 사도 4,9-12; 1코린 5,3-4; 묵시 2,1 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말씀도(28,20) 이러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28,20은 또한 예수님께서 내리신 계명 준수의 핵심이 기도임을 분명히 합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18,21-22 (루카 17,4)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언제까지 기도하고 몇 번 용서한 후 그를 잘라버릴까요? 일곱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듯 7은 거룩한 숫자이고 완전한 숫자입니다.그러니 일곱 번 용서는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릅니다. “일흔일곱 번” 대신에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창세 4,24의 히브리 말 성경에는 “일흔일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의 칠십인역에서는 둘 다 가능합니다. 아무튼 이 말씀의 뜻은 무한정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한의 용서가 요구됩니다. 창조의 질서는 용서를 통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6.매정한 종의 비유 18,23-35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18,23-32)
그리스의 화폐 단위인 한 탈렌트는 6,000드라크마인데, 한 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 단위로 셈하면 한 데나리온으로서(28절)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20,2). “만”은 고대 근동에서 계산할 때에 가장 높은 단위의 수이고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 단위입니다. 그래서 “만 탈렌트”는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로서 이만큼 빚을 진 종은 가망이 전혀 없고 오로지 주인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았음을 의식한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 무한의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구체적인 자신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빚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모질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백데나리온은 만 탈렌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액수입니다. 이 비유를 사용하는 신학적 의도는 주인의 관대한 처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3-35)
①이 비유의 이러한 요소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라는 ‘주님의 기도’의 다섯 번째 청원을 상기시킵니다.
➁마태오는 교회를 갈등과 긴장이 상존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이해하였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한 후(5,25) 함께 하느님의 제단에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더욱 화려하고 더욱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장애 되는 이웃들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차 없이 잘라버려야 할 것은, 바로 이웃의 마음을 잘라버리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신 당신의 사랑 안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오복음서 [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