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서 [10] 24⎯25장 종말설교 [The sermon on The End]
1.재난의 시작(The beginning of sorrow) 24,1-14
2.가장큰 재난(The great tribulation of Jerusalem) 24,15-25
3.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The coming of the Son of Man will be evident) 24,26-28
그날의 우주적 표징(The universal significance of this coming) 24,29-31
4.가까이 온 시간(The time of this coming) 24,32-36
5,깨어있어라(Be on alert) 24,37-44
6.충실한 종의 비유(Parable of the conscientious steward) 24,45-51
종말설교 서론 (Introduction)
1.공관복음의 종말론
①마르코복음사가는 당대의 묵시문학적 사조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가르침, 다니엘 예언서 등을 참조로 종말에 관한 전승들을 수집하여 13장을 엮었는데 이 장은 마르코의 小묵시록이라 칭합니다.
②루카복음에는 두 편의 종말론이 있습니다. 17,20-37은 어록집(語錄集)에서 옮긴 것이고 21장 5-36은 마르코복음 13장의 종말론을 자신의 종말 사상에 따라 수정 및 가감한 것입니다.
③마태오는 어록집의 종말론을 여러 갈래로 흩어서 마르코복음 13장과 합하여 24⎯25장을 엮었습니다.
2.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ia)
1) 마지막 것들
➀일반적으로 종말론(τά ἔσχατα+λογα 타 에스카타+로가 : 에스카토로지아 eschatologia)를 ‘마지막 것들(τά ἔσχατα)’ 에 관한 이론이나 학문으로 번역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은 Ⓐ개인에 관련된 개별적 종말론과 Ⓑ인류의 역사와 관련된 우주적 종말론(재림사상, 죽은 자들의 부활, 세상에 대한 심판, 세상의 종말=에스카톤 eschaton)으로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생명은 결정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개별적 종말에 대한 즉, 죽음에 대한 성찰은 오늘날에도 진지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종말론에서(개인적으로든, 우주적으로든) 하느님나라를 살기위한 지침을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지(認知)해야 합니다.
➁종말, 마지막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인간의 최후 또는 우주의 끝으로 이해되어 이 말씀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이해한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역사 안에서도 많은 문제들을 야기(惹起)시켜 왔습니다. 오늘날의 미래는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더러는 인간의 손으로 造作이 가능한 실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같이 커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파괴, 생태계의 파괴, 핵무기의 위험, 더욱 심해지는 貧富의 격차, 사이버테러 등 인류는 되돌릴 수 없는 인류자신의 한계에 빠져 위험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죽음 저 편에 대해서 무엇인가 답을 해주어야할 때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근거한 희망입니다. 믿음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리스도인 자신들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방법이란 선인과 악인,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구분하는 결과적 단순개념을, 인간의 삶 안에서 의미 있게 깨닫는 것입니다. 즉, 삶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개념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인간의 마지막 문제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희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선택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더욱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2)종말론적 희망
종말론적 희망은 신학용어입니다. 일상용어로 말하면 최종적인 하느님나라입니다.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시초부터 희망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의 희망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고, 자손은 번성하며,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내용으로서 계약에 근거합니다. 다윗의 즉위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설립하고, 자손들의 번영과 미래에 대한 보장을 기원하면서 한 때는 이 모든 약속이 실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은 다음 세대에 바로 깨져버리고 마지막에는 나라의 주권을 잃고 맙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다려야하는 미래로, 더욱 새로운 차원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은 확장됩니다. 특히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불을 지피는 위대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의 통치를 끝맺을 것이라는 이 희망은, 과거 이스라엘이 가졌던 희망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선적인 성장은 아니지만 이 희망은 성장해 나갔습니다. 이 확장된 희망이 종말론적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망적인 순간에 다시 희망으로 삶을 버티어갑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부단히 상기하면서 이들의 성찰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차원을 맞이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이 죄의 성찰과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라는 주제로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삶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게된 것입니다.
3)희망의 근거
이 신앙은 모든 과거의 역사적 체험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식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 역시 하느님께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했습니다. 즉, 희망의 동기는 역사적 사건에서 인식하게 된 하느님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성경은 희망의 근원적 근거로서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표현하였으며 하느님은 세상 저편에서 인간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인식이 희망의 동기가 됩니다.
3.종말론과 초대그리스도교회의 재림사상
①초대그리스도공동체의 재림(再臨;파루시아;παρουσία)사상
❶그리스도교공동체에 묵시문학의 요소들은 상당히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재림사상이 생겨나는데, 그들은 종말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요한의 묵시록 22,20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의 ‘오십시오(마라나타;μαρὰνἀθᾶ)는 아람말 ‘마라나 타’를 옮긴 것입니다. 1코린 16,22에서도 ‘마라나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촉구하는 환성입니다.
❷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의 성취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으로 표현됩니다. 그리스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본래 ‘출석’ ‘참석’ 또는 ‘도착’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그리스 문화권에서 이 단어는 왕의 장엄한 지방 순시나 왕의 방문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 따라 파루시아를 그리스도의 ‘다시오심’ 즉, 재림으로 이해할 때, 첫 번째는 예수님의 탄생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再臨’ 즉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❸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 어떤 기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파루시아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일부 신자들에게 재림은 심판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면서 광야로 나가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일손을 놓고 기다리는 무리도 형성되고는 했습니다(테살로니카 2서 내용 참조).
❹요한복음에서의 재림사상은 상당한 변화를 보입니다(요한 5,24-30). 파루시아의 미래적 측면과 현재적 측면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의 대상으로서 그 완성의 시작은 이미 현재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현재적 종말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파루시아를 전적으로 현재적인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에 이어서 미래적 종말론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5,28-30).
Ⓑ요한복음의 미래적 종말론(요한 5,28-30).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30).
❺역사의 마지막 완성은 미래의 희망으로 남는 것이지만 역사의 내적 상황들, 인격적인 만남, 독창적인 결단 등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4.종말론과 묵시문학(黙示文學;Apokalyptik)
①묵시문학은 기원전 200년에서 100년까지 성행하였습니다. 이 무렵은 그리스제국의(셀레우코스왕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Ⅳ. BC 175- 164)의 유다교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마카베오항쟁이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성서와 외경에 묵시 문학의 영향이 명백히 나타납니다(마카베오서 참조. 다니 7─12 참조. 묵시록 13장의 표범과 곰은 다니 7장, 묵시록 12장 용과 싸우는 천사는 다니 10,13;12,1). BC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는 칙령을 반포하여 바빌론의 포로들을 자국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스라엘민족들은 귀향 후 성전을 재건하고 희망을 가졌으나, 비교적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성에 관대했던 페르시아제국이 알렉산더의 그리스제국에 무너지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다시 그리스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BC 333-164).
②기대했던 조국의 해방은 요원하고 하느님은 사람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회의적인 신앙인이 늘어만 갔습니다. 유다인들의 회의는 선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죄인이 천벌을 받는다면 의인도 현세에서 바로 상을 받아야 하는데 무죄한 의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느님의 정의 여부를 따지게 되었습니다. 이시기에 지혜교사들을 통하여 백성들의 회의에 대응하는 도덕 교훈서와 지혜 문학 등이 생겨났고 현세의 상벌을 미래로 옮겨가는 종말론적 성격의 묵시문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③어느 모로 보나 절박한 시대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심판의 날에 엄정한 판결을 내리실 것이며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 믿는 종말론은 묵시(黙示;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라는 새로운 형식을 띠게 된 것입니다. 계속되는 고통의 역사 안에서 포기될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에 신뢰하여, 지금 시대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에 점차 기대를 걸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들을 사용하면서 묵시문학이 탄생합니다. 묵시 문학은 예언 문학이 특이하게 발전해 나아간 한 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④감추어진 계시를 보고 듣는 자들은 역사는 곧 끝날 것이며 새 시대가 곧 도래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마지막 시대(악이 전멸하는 시대)에는 우주에 대 환난이 있을 것이며 고통, 기아, 죽음, 불의, 거짓, 악행들이 넘쳐나며 태양마저 빛을 잃고 땅은 갈라져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온갖 만행은 끝장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두려워 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 무덤을 부수고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묵시문학의 새 시대는 옛 시대가 전멸한 다음에 나타납니다.
⑤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면서 독립의 희망은 희미해졌고 성전은 제우스 신전으로 변했으며, 예루살렘은 그리스문화가 장악했고 유다의 전통은 약화되어갔습니다. 마카베오 항쟁의 승리로 잠시 독립했으나 다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민족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새 세상을 위하여 이민족의 멸망을 보류하시는 중이라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⑥묵시문학이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이 큰 만큼 문제가 있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 문제는 묵시문학의 요소들을 그리스도교신앙과 동일시하는 위험입니다.
5.성경의 묵시문학
①복음서의 핵심은 묵시문학적 요소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부활시켰다는데 있습니다. 성서가 수용하는 묵시문학은 아주 적은 부분입니다. 묵시문학은 예언자들의 예언으로부터 추출해낸 것입니다. 환시를 다룬 에제키엘서, 즈카르야서 등이 있지만 묵시문학 형태로 분류되는 단권의 성경은 다니엘서가 유일합니다.
②묵시문학에서는 그날과 그 시간 등 마지막 때에 시선을 집중하지만 복음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시며, ⒝지금 이 시간을 깨어 지내도록 촉구합니다. 또한 ⒞긴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사적(私的)인 것일 뿐이며 ⒟역사의 내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면서 또한 복음은 그 초점을 예수님의 인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③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묵시문학적 작품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던 시대에 이미 알려진 고전적 묵시문학의 요소들이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요한의 묵시록은 희생 되셨으나 죽음을 넘어선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습니다.
④복음서 저자들의 결론은, 세상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세상을 뒤엎는 재앙 가운데서조차도 하느님은 인간에게 미래를 향한 문을 열어주실 수 있는 분이기에 절대적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대를 끝장내신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은 고난 받는 이 시대 안에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활동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성경의묵시문학 상세내용은 신약성경노트 요한묵시록3-①참조>
마태오 복음서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24장 종말설교 [The sermon on The End]
종말설교의 배경은 기다림 속에서 인내하며 믿음을 이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80-90년대의 마태오 공동체입니다. 마태오복음서의 저자는 얌니야의 유대교와 대립 상태에 있었던 이 공동체의 구체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일생에 관한 사건들을 재독하고, 전승으로부터 수집한 사화들을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그날’에 관한 말씀들을 24―25장에 모아놓았습니다. 네 복음사가 가운데 마태오만큼 심판을 강하게 강조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세상과 개인의 구원이 결정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종을 때리고 술 마시고 하는 못된 종에 비유 되어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는 것은 진실하고 성실한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설교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언제(그날)’ 에 대하여 답변하십니다. ⑴먼저 사람의 아들의 재림의 징표와 종말 사상을 설교하십니다. ⑵그날은 아무도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을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⑶심판은 바로 오늘 자신의 행동이라는 말씀으로써 깨어 기다리는 하느님 백성의 자세와 그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1.재난의 시작[The beginning of sorrow] 24,1-14 (마르 13,3-13 ; 루카 21,7-19)
24,1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다가와 성전 건물들을 가리켰다.2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①1절에서 말하는 성전 건물들은 기원후 60년대에 완공되는 예루살렘의 새 성전으로서,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헤로데 가문이 46년 걸려 지은 이 성전은 BC 961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인데 BC 586년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가 파괴합니다. BC 515년 바빌론에서 돌아온 후 재건한 것을 BC63년 폼페이우스가 다시 파괴하였고 BC20-19년 헤로데가 재건을 시작하여 AD30-37까지 계속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증축 개축을 계속하다가 AD50-60년대에 이르러 완공됩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AD67년 1차 유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AD70년 로마제국의 티투스장군이 완전 파괴합니다. 이때 로마제국은 성전의 규모를 후대에 알려주기 위해(아니면 로마제국의 위상을 후대에 알려주기 위해) 성벽은 파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AD 132년 2차유다 혁명 때 로마제국은 이스라엘민족을 추방하였고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했는데, 4세기부터 1년 한 차례 성전 파괴 날에(유대력 5월9일) 조국을 애통하는 날이 허락되어, 남아있는 유일한 성전유적지인 ‘통곡의 벽’이라 부르는 곳을 찾아옵니다. 통곡의 벽은 요르단에 속하다가 1963년 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 소유가 되었습니다.
②성전은 이스라엘신앙의 중심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성전의 파괴를 종말의 시기로 이해합니다. 예언자들도 솔로몬이 지은 첫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한 적이 있습니다(미카 3,12; 예레 7,1-15;26,1-19; 에제 8-11). 예언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계약을 파기하신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종말설교의 시작에서 성전파괴를 예고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24,3“저희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스승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표징은 어떤 것입니까?”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재림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입니다. 성서 외의 그리스말에서는 본디 황제나 고관이 지방을 공식 방문하는 일, 또는 신의 현현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이러한 왕의 지방 순시 때 특은을 베풀거나 지방자체가 기념사업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세상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다시)오심을 뜻합니다(1코린 15,23;1테살 2,19). 이 세상종말에 관한 질문은 당시 유다교에서 오래전부터 제기 되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또 깊이 작용한 묵시문학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인용하신 것입니다. 같은 표현을 사용 하지만 그 뜻은 다릅니다. 종말의 시기, 장소,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의 수를 계산하는 일 등 종말의 표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깨어 기다리는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자들이 질문한 종말의 표징들은 세 가지 주제가 연결되어있습니다.
종말의 세 가지 표징
3-①24,4“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❶‘속는다’는 꾀다, 유혹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동사로서 유다묵시문학의 어휘인데 여러 가지유혹을 가리킵니다. ⒜ 마태오에서는 메시아와 관련된 유혹(24,5.11.24),⒝ 묵시록 2,20;12,9;13,14에서는 마귀 또는 정치와 관련된 유혹,⒞ 1요한 1,8;2,26;3,7에서는 교리와 관련된 유혹을 말하고 있습니다.
❷사람을 현혹하는 적(敵)그리스도(Antichrist)에 대한 주의를 말씀 하시는 이 속이는 자들은 서간편(1.2요한)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메시아사상을 선동하고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人性을 부각시키거나 혹은 神性을 부정하는(아리우스파派) 또는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을 주장하는(도세티즘docetism;가현설假現說)이단들입니다.
❸유다 고대사에 의하면 자칭메시아가 나타나 군중을 현혹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들은 튜다(테우다스 사도 5,36), 서기 135년 마지막 유다 혁명 때 바리사이 회당장 아키바가 메시아로 인정한 바르 코크바 등이며, 바르 코크바는 이른바 마사다의 죽음을 감행한 인물 입니다.
3-②24,6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7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발생할 것이다.8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반드시’라는 말에 담겨있는 당위성은 어떠한 숙명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종말의 표징들은 묵시문학의 전통적 소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이사13,8;호세13,13)에서 산고(産苦)의 진통(陣痛)의 표상을 가져다쓰심으로써 장차 일어날 일의 불가피성을 드러내십니다.
24,9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속에 몰아넣고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10그러면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며,11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11절의 거짓예언자들은 1세기에 교회를 깊은 혼란에 빠뜨린 자들입니다. 마지막 때의 특징적인 현상인 환난은 복음 때문에 개인적으로 받는 고난이나 정치적 또는 우주적 사건보다는 박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우주적 표징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제자들과 사도들은 많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될 뿐으로, 예수님의 12사도들, 스테파노, 그리고 바오로가 수행하는 본질적인 직분입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그분이 주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3-③24,12 또 불법이 성하여 많은 이의 사랑이 식어 갈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또는 사람들 간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문맥으로 보아 두 번째로 봅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이야 말로 세상의 종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고(24,13)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입니다(24,14). 다른 민족들에 대한 복음의 선포가, 여기에서는 역사의 존재 이유, 그리고 역사가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제시됩니다. 이 끝은 현세의 종말이며 하느님나라의 궁극적 시작을 말합니다. 고통과 혼돈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견디어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주적 종말은 쉬 오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개인적인 종말은 가까이에 있고 확실한 것입니다. 모호한 것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에는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처분하여 보물을 사야합니다.
2.가장 큰 재난[The great tribulation of Jerusalem] 24,15-25
(마르 13,14-23; 루카 21,20-24)
24,15“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①기원전 167년 안티오쿠스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그곳에 이교 제단을 세운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다니 9,27;11,31;12,11. 1마카 1,54-58). 이것이 그리스도교시대에는 마귀, 그리스도의 적(anti christus) 또는 배신과 배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거룩한 곳에 혐오스러운 악의세력이 서있습니다. 약속의 땅 이스라엘도 심판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②삽입구는 앞의 말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서의 이 구절이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믿음으로써만 희망할 수 있는 어떤 미래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24,16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①70년 예루살렘성전파괴 때의 유다인들을 말하기 보다는 마지막 심판 때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산으로 달아나라’ 는 미사기도문 중 ‘교회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고백하는 대로, 우리 믿음을 지켜주고 인도하는 교회공동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들었고 순교자들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탁할 하느님의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고, 실제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모한 저항을 피하고 달아나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②서기 70년 티투스가 이스라엘을 포위하여 초토화한 사건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요세프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않았고 자기 배설을 먹으며 저항하였습니다. 티투스는 성전을 6개월간 포위했습니다. 로마군사들은 성전의 보물을 취하러 들어갔다가 겹겹이 죽어있는 사람들을 보고 차마 손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24,17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20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겉옷 또는 물건들이 소용없게 되는 처절한 종말을 의미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안식일”이 언급되는데, 이로써 이 가르침이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24,26-31(마르 13,24-27; 루카 21,25-28)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The coming of the Son of Man will be evident ) 24,26-28
24,27동쪽에서 친 번개가 서쪽까지 비추듯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28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
유다의 격언을 사용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여지없는 상황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지를 예견하기 위해 마음을 동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날의 우주적 표징 (The universal significanceof this coming) 24,29-31
24,29“그 무렵 환난이 지난 뒤 곧바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30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는 이는 다니 7,13-14에서 유래하는 표현으로 마태 26,64에서 다시 되풀이됩니다.“구름을 타고”의 직역: “구름 위에.”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오심’ 또는 현현을 바로 이러한 식으로 표현합니다(탈출 19,16; 34,5; 에제 1,4; 10,3-4 등).
24,31 그리고 그는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가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 13,27에도 나오지만, 구약 성경의 본문들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제시된 이 구절에 따르면, 선택된 이들이 온 세상에서부터 모아집니다. 마태오가 좋아하는 이러한 보편주의적 내용은, 예컨대 에세네파처럼, 예수님 당시의 유다교 내 몇몇 분파에서 높이 평가되던 국수주의(國粹主義)와는 다른 표현입니다.
4. 가까이 온 시간 The time of this coming 24,32-35
무화과나무의 교훈 (마르 13,28-31; 루카 21,29-33)
24,32“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35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①여기에서의 “문”은 성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위의 말씀은 한동안 인정을 받지 못한 자기의 합당한 권위를 다시 확립하려고 도성으로 들어가는 임금과 같다는 뜻이 됩니다.
②‘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라는 종말시한어(終末時限語)는 초대그리스도인들이 굳게 믿은 말로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이 반영된 첨가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終末時限語는 ‘깨어있어라’로 설명되면서 결론짓습니다.
③‘사라지지 않는 말’은, (기원후 70년의) 성전 파괴와 같은 일정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여러 세대가 세상 종말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대에 맞추어 말씀하시면서, 예언적, 또 묵시 문학적 세계의 사고 범주에 따라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역사 전개의 여러 시기 또는 단계를 서로 구분하지 않고, 곧바로 역사의 끝, 곧 세상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복음서 전통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말씀을 또다시 충실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단순히 전승할 뿐만 아니라, 앞서 31절의(큰 나팔소리와 함께 보내는 천사) 선언으로, 그리고 이와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32절의(무화과나무 비유) 말씀으로써 부각시키기까지 합니다.
5.깨어있어라[Be on alert] 24,36-44 (마르 13,32-37; 루카 17,26-30.34-36)
24,36“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아래 예수님을 그냥 “아들”로만 표현하는데 유다교 묵시 문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말의 시점은 하느님만이 결정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문제, 또는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특권을 명확히 언명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24,37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39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40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①이러한 경고는 ‘사람의 아들의 날’이 지니는 무섭고 불가피한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최종적 심판의 서막일 뿐입니다. 왜냐면 사람을 갈라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들에 있는 두 사람, 맷돌질 하는 두 사람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겠으나 그러나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사람은 버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그날은 번개처럼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각의 도래입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은 홍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일상을 계속하는 사람들의 멸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세의 만족감에 도취되어 서로 즐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즐거움을 나무라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루카 7,34)사람들 눈에는 먹보요 술꾼으로 보여졌습니다. 다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사람이 세상의 시간마저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이 그를 멸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생의 흔적을 셈하는 최후의 날은 틀림없이 옵니다.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지막은 번개처럼, 노아의 홍수처럼, 소돔성의 불벼락처럼, 갑자기 온다는 것입니다.
③루카복음에는(17,32) 롯의 아내를 기억 하여라!가 덧붙여집니다. 경각심을 더욱 주기위해 루카가 덧붙인 말로 봅니다. 탐욕과 쾌락과 자기소유에 대한 미련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허망한 소금기둥이 되어 존재도 없이 사라집니다. 단호한 결심으로 새로운 도시로 출발하지 못한 자멸의 미련입니다.
24,42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43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44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①‘깨어있어라’는 개인적 구원에 대한 강박 관념이 주제가 아니라 스승이 부여한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만남을 기다리는 마음을 강조합니다. 깨어있음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대한 책임 있는 충실성을 말합니다. ‘깨어있어라’에 관한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나라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바로 ‘하느님나라의 도래’입니다.
②초대교회의 종말사상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되었는데 교회론적으로 종말과 재림 이 두 가지는 같은 사건입니다. 이어지는 44절의 마지막구절에 따라 깨어 기도하는 것이 강조됩니다.
③이상의 종말사상을 요약하면 - ⒜하느님나라는 곧 도래한다. ⒝사람의 아들은 곧 재림한다. ⒞종말은 임박했으나 예기치 못한 때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와 장소는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에 대비하여 회개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된다.
‘깨어 있어라’의 세 가지 비유는⒜충실한 종의 비유 24,45-51 에 이어서 ⒝열처녀의 비유 25,1-13 ⒞탈렌트의 비유 25,14-30 와 함께 25장으로 연결됩니다.
6.충실한 종의 비유[Parable of the conscientious steward] 24,45-51
(루카 12,41-48)
Parable-(1)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24,45“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종에게 부여한 사명은 주인의 식솔들을 책임지는 일입니다. 종이 불리한 여건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제때에 양식을 내줄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24,46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8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49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50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51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처단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본디 ‘둘로 잘라버리다’의 뜻입니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의 극형방식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는 쿰란의 전문용어로 파문(破門)이나 격리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합니다. 늦게 오시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지 못한 종의 못된 행실이 강조되어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weeping and grinding of teeth).”복음서에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25장
1.열처녀의 비유(Parable of the ten bridesmaids) 25,1-13
2.탈렌트의 비유(Parable of the talents) 25,14-30
3.최후의 심판(The Last Judgement) 25,31-46
Parable-(2)열처녀의 비유
앞에 나온 종의 비유처럼(24,45-51) 이 비유도 주님께서 늦게 오심에 관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24,48; 25,5). 그러면서도 여기에서는 종들의 못된 행실이 아니라, 신랑이 도착하였음을 알리는 외침이 나올 때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24,44; 25,10). 이 열 처녀 중 일부는 ‘슬기롭다’는 말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과 같고, 일부는 ‘어리석다’는 말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입니다(7,24-27).
1.열처녀의 비유 [Parable of the ten bridesmaids] 25,1-13
25,1“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①25,1 ‘그때’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의 하늘나라는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24장의 종의 비유처럼 이 비유도 늦게 오는 주인에 관한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종의 과오가 아니라, 신랑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②일부 슬기로운, 그리고 일부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두 기다리다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은 사실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니고 이 비유의 핵심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이 늦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같이 잠이 들었지만 신랑이 늦어질 것을 예상하여 여분의 기름도 준비해두고 결정적인 순간에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그리스말 모로스 (μωρός);미련한, 둔감한. 합리적인 사고의 결핍을 의미한다.
▶슬기로운 그리스말 프로니모스(φρόνιμος);지각있는,총명한,현명한. 이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통찰력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건강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③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하고 처녀들이 모두일어나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달라고 청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거절하였고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25,6-10).
④기름을 나누어주지 않은 슬기로운 처녀들에 대한 현대인들의 비판은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최후의 순간에 우리 자신을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름은 자신 안에서 타오르는 신뢰의 사랑이므로 나눌 수 없다고 합니다.
25,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Parable-(3)탈렌트의 비유
2.탈렌트의 비유 [Parable of the talents] 25,14-30(루카 19,11-27)
①이 비유도 착한 종과 나쁜 종의 행위를 서술함으로써, 앞에 나오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24,45-51)와 비슷한 면을 지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구되는 충실성은 단순히 늦게 오는 주인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있다거나 주인이 올 때까지 계속 처신을 잘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주인이 늦어지는 것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고, 여기에서 종들이 해야 할 바는 저마다 능력에 따라 맡겨진 탈렌트를 가지고 결실을 맺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오히려 뒤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가르침에 더 가깝습니다. 병행구인 루카 19,11-27에는 ‘미나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본디 마태오 복음서의 이 비유와 흡사한 본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②주인은 종들에게 각각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습니다(25,14).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두 탈렌트를 더 벌었는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안전하게)묻어둡니다(25,14-18).
③각자의 능력에 따라 탈렌트(talent τάλαντα)가 맡겨집니다. 영어의 재능을 뜻하는 탤런트(talent)와 그리스의 화폐 또는 무게단위의 탈렌트의 철자는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화폐단위입니다. 그리스 화폐단위의 한 탈렌트는 6000드라크마, 한 드라크마는 로마화폐단위 한 데나리온이며 이는 통상 하루품삯에 해당합니다. 미나는 유다의 화폐단위로 한 미나는 60분의 1탈렌트입니다.
④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는데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고 말하자 25,21"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작은 일”과 “많은 일” 대신에 “작은 것들”과 “많은 것들”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다섯 탈렌트”는 일꾼이 받는 하루 품삯의 삼만 오천 배로서, 종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입니다. 이러한 액수를 ‘작은 것’이라 일컫고, 또 ‘작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얻는다는 역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25,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①예수님께서는 29절의 격언과 같은 이 말씀으로(13,12; 마르 4,25; 루카 8,18 참조) 심판의 엄정함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가없이 후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②한 탈렌트를 받은 세 번째 종이 가진 하느님상이 문제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모질고 엄격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하느님상 자체가 신앙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종은 규정을 엄수하였습니다.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손해도 이익도 없이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했는데 이것이 그를 게으르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③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거나 하느님께서 공정하지 않다고 불평을 하거나 자신의 안일에 급급하거나, 이러한 경우는 결국 하느님께서 자신의 일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경우 하느님의 뜻을 놓친다고 천명하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피 흘리고 다치는 가운데 은총은 경험됩니다.
④본래의 비유는 하느님과 종의 주종관계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상의 것을 요구할지라도 스승의 요구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참된 종일 수 없습니다. 마태오는 후에 29-30절을 첨가하여 심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⑤또한 이 비유는 탈렌트의 계발이 핵심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강조합니다. 두려운 나머지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몸을 도사리는 율법준수자에게 은총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나약함, 실수, 좌절 등 모든 것을 의탁하라고 하십니다.
⑥다섯 탈렌트(하루품삯의 삼만오천배)를 가진자는 그 돈을 잃을 위험도 감수 해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종의 신뢰였습니다. 이 비유를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신앙의 의혹이 생깁니다. 하나 가진 것 마저를 빼앗아 가는데 핵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종을 겁 많은 종으로도 해석합니다.
⑦돌아온 주인 앞에서 의기양양한 어린이처럼 자랑하는 첫 번째 종의 순수한 기쁨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주인에게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그의 성실을 기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헌신할 것인가? 25,31-46 최후의 심판이 설명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에의 헌신, 그것은 사랑의 실행이며 사랑의 실행이 부여된 각자의 일입니다. 일에 있어서의 목표 의식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자신의 공명심이 우선이라면 헛일이 되는 것입니다. 24⎯25장의 종말설교는 깨어 기다리는 자세 등에 관한 결어로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시어 모든 민족을 각각의 사는 동안의 선행과 자비로 심판하시는데 여기에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가련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3.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 25,31-46
서론 (Introduction)
그리스도교의 영성사에서 마태오의 이 텍스트 만큼 더 큰 영향을 미친것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사랑은 어떤 목적도 없이 단지 사랑자체를 위해 실행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종교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성마르티누스의 전설에 의하면 꿈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걸인에게 벗어준 겉옷을 입고 나타나 25,40절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순교하지 않고 성인이 된 최초의 성인입니다.(316-397) 늘 모든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도울 수는 없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자신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대하는 것이 이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단락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예언적으로 서술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마치 임금처럼 “영광에 싸여” 내려오시어(16,27; 19,28)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십니다. 곧 그들이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자비의 선행을 베풀었는지 여부에 따라 그들의 행실을 판가름하시고 상이나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면서 그분께서는 그러한 행동들이 그들은 알지 못한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24─25장의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전에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내용이(10,40; 18,5) 결국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됨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25,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양과 염소는 함께 방목되어 지내다가 저녁에는 갈라놓습니다. 양은 추위를 잘 견디지만 염소는 그러지 못하여 염소들의 추위를 피하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가르는 것에 대해 당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잘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장례미사 때에 이 복음이 매우 준엄하게 들려옵니다.
25,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①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이 행위들은 유다교에 이어 신약 성경에서도 줄곧 권장되는 선행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양식을 주는 것에 관해서는 10,42; 루카 3,11; 14,12-14; 사도 6,1-3; 로마 12,20; 1코린 11,33 참조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에 관해서는 로마 12,13; 콜로 4,10; 1베드 4,9; 히브 13,2(또 마태 10,14; 루카 9,53-54) 참조
▶헐벗은 이들을 입혀 주는 것에 관해서는 루카 3,11; 사도 9,36.39; 야고 2,15-16 참조
▶병자 방문에 관해서는 루카 10,33-35; 야고 5,14 참조.
②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말하는 고아들의 교육이라든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언급하지 않으시고(26,10 각주 참조), 대신 수감자 방문을 여기에 보태십니다(2티모 1,16-18; 히브 13,3 참조).
35,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제자들만 상대로 하는 10,42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문제되는 사람들은 “작은 이들”인데, 여기에서는 최상급인 “가장 작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10,42의 “제자”라는 말이 여기에서는 “내 형제”라는 말로 대체됩니다. 이는 제자들만 형제가 아니라, 곤궁에 처한 모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5,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①제자들은 ‘그날’이 언제냐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그날‘의 참된 날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매일의 일상 안에서 심판관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각자의 최후의 운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결정되는 것입니다.
②이 심판의 기준은 각자의 실행입니다. 열거된 실행의 목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열거된 일을 한 그 대상이 예수님 자신이었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종결(epilogue)
오른쪽으로 구별된 의인들은 자신의 선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행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선행,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는 선행, 인간의 참 품위를 드러내는 선행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잊은 선행을 하느님께서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뜨거운 그리고 멋진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 주님이 병들었던 일이 있었고 언제 주님이 감옥에 갇혔었나요? 하고 묻는 최후의 날, 우리 앞에서 외로움으로 목말라하고, 병들어 도움을 청하던 많은 이웃들의 얼굴이 스쳐갈 것입니다. 아프게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참으로 사무치는 마태오 25장 최후의 심판입니다.
누구에게 물을 주고 음식을 주는 행동 그 이상의 가르침은, 모든 이웃을 주님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지, 내 행동에 모순은 없는지, 언제 하느님의 말씀을 간과했고, 언제 그분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 사람을 무심히 지나쳤는지. 하느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쓰라린 구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순간 기도하면서 인내와 희생의 값진 분별을 인식하면서 살 때 우리는 매우 간단하게 왼편으로 처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수난을 감수하신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⑩ 24⎯25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