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① 1⎯4장 [믿음으로]
Ⅰ.로마서 입문
TO THE ROMANS / ΠΡΟΣ ΡΩΜΑΙΟΥΣ
1.로마서의 위치
①로마서는 갈라티아서와 주제가 비슷하지만 감정이 개입된 갈라티아서에 비해 침착한 교육적 어조와 철저한 고찰과 탁월한 관점이 인상적인 서간으로서, 바오로 사도가 쓴 여러 서간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서간입니다. 교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로마서가 서간 형태를 띤 논문이 아니냐는 주장이 가끔 제기될 정도로,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짜임새도 두드러지게 잘 되어 있습니다. 테르디우스라는 비서에게 당시의 문학유형인 디아트리베 형식으로, 즉 가상의 청중을 놓고 질문과 응답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토로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우리는 이 위대한 저서를 읽으면서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역사적으로 로마서만큼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끼쳐 온 서간도 없습니다. 오리게네스를 비롯하여 요한 크리소스토모, 테오도로, 펠라지우스, 아우구스티노, 아벨라르, 토마스 데 아퀴노 등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모두 로마서를 해설하였습니다. 로마서 해설은 특히 교회 역사의 두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두 시기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펠라지우스의 주장에 따라,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라는 구원의 무상성 (無償性)을 둘러싸고 일대 위기와 논쟁이 벌어지는 5세기(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펠라지우스에 대한 반박 논쟁), Ⓑ그리고 종교 개혁이 시작되는 16세기입니다.
③먼저 펠라지아니즘(Pelagianism)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니다. 펠라지아니즘은 펠라지우스 (Pelagius, ?∼ 418, 수도자)가 주장한 이단설(異端說)로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정합니다. 펠라지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력으로 실행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원(救援,救靈)도 신앙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이단사상들은 아직 교의(敎義)가 확정되지 않은 시기에 신자들에게 의혹을 갖게 하는 것들입니다. 펠라지우스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주 인물 발렌티노의 도세티즘 등 대부분 이단의 주창자들은 뛰어난 지식인들이었지요. 그러므로 설득력이 있었고 혹시? 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휩쓸리게 된 것입니다.
21세기에도 회의론자들이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가 선포한 도그마를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신조입니다. ‘나는 믿나이다’ - 초대교회는 이 신조(信條)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만 있는 것이라면 그처럼 가혹한 시련은 없을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능력도 없고 인간관계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완전하지 못한 우리에게 은총과 자비가 없다면 그야말로 절망일 것입니다.
④루터 이후 신/구교는 로마서로 인해 분열을 겪었고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갈라져 나오면서 분열이 시작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점을 고심하였습니다. 구약의 인물을 재조명하면서 신약과의 일치를 이루어낸 바오로, 특히 로마서 9⎯11장의 이스라엘 문제는 그리스도교와 이스라엘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도바오로의 심혈인 것입니다.
루터는 1516년에 로마서 주석서를 출간하였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로마서가 바로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였고 이 서간을 특별히 높이 평가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에도 개신교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서간을 주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현대 신학적 사고(思考)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스위스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입니다(Barth, Karl, 1886~1968 1919년 로마서 주석).다른 한편, 가톨릭 신학자 들은 교회일치와 교계권을 부각 하면서 코린토 1서의 가르침을 과장되게 주장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코린토서는 교회일치,성찬례,공동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선물로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2. 로마서의 집필 년대
①바오로는 로마서를 직접 쓰지 않고 테르디우스라는 비서에게 받아쓰게 합니다(16,22).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를 쓸 때,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입니다(16,23. 그리고 1코린 1,14-15 참조). 서간편에 등장하는 집주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어준 인물들이며 바오로사도가 세 번의 선교여행을 하면서 이러한 가정공동체를 근거로 하는 모임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②사도는 제3차 선교 여행을 끝내면서 석 달 동안 코린토에서 지냅니다(사도 20,3). 그 몇 달 전에는 바로 코린토와 갈라티아에 서간을 써 보냈고, 어쩌면 필리피에 사는 신자들에게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를 쓸 당시, 바오로는 매우 활발히 서간도 쓰고 자기의 신학도 전개시키는 한 시기의 끝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기가 동방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을 마쳤다고 판단합니다(15,19-20). 그래서 이제는 복음을 서방에 전파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로마와 스페인을 향합니다(15,24).
③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연대표에 따르면, 로마서는 가이오스의 집에서 57년이나 58년에 쓰인 것으로 보며(네로 54-68) 로마서의 친저성(親著性)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의혹이 제기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는 그리스말로 쓰였습니다.
▶바오로의 친서; 바오로가 썼거나 받아쓰게 한 것으로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친서는 일곱 통이다 | |
이름 | 년도 및 집필장소 |
테살로니카1서 | 50/51(2)년 코린토 |
코린토1서 | 53/54년 에페소 |
필리피서 | 54/55년 에페소 |
필레몬서 | 54/55년 에페소 |
코린토2서 | 55/56년 필리피 |
갈라티아서 | 56/57년 필리피(마케도니아) |
로마서 | 57/58년 코린토 |
▶바오로 전승 | |
이름 | 년도 및 집필장소 |
콜로새서 | 80년 에페소 |
에페소서 | 콜로새서 이후 |
티모테오1서 | 1세기말 에페소 |
티토서 | 티모테오1서와 동일 |
티모테오2서 | 티모테오1서와 동일 |
테살로니카2서 | 1세기말 테살로니카 |
이외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바오로전승들에서 일찍부터 분리되어왔다. (출처 - R.Fabris; 바오로의 열정과 복음 선포) |
3. 집필 동기와 목적
①19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로마서를 서간형식의 논문으로 여겼습니다. 공개 서간의 형태로 쓰인 교리적 문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사도는 로마 교회에 인사 서신을 보내는 기회를 이용하여 로마의 신도, 또 그들 외에 다른 모든 신자에게까지, 당시에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신앙의 주요 문제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갈라티아서에서 펼친 바 있는 내용을 차분히, 더욱 체계적으로 다시 밝힌다는 것입니다.
②갈라티아서와 로마서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지(周知)된 사실이고 이 두 서간에서 똑같이 바오로 신학의 주요 주제들이 다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 곧 의화(義化)와 구원,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교 신앙 등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서간 사이에 대립되는 사항들도 매우 뚜렷이 드러납니다.
③갈라티아서는 바오로가 감정에 이끌려 썼다는 느낌을 줍니다. 갈라티아는 사도가 직접 전도하여 세운 교회인데 그가 떠난 후 유다이즘 교사들이 바오로의 사도권을 부인한 것입니다.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유다이즘의 오류를 지적하고 사도권과 믿음의 본질 밝히기 위해 갈라티아서를 쓴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서는 분위기가 침착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어조, 철저한 고찰, 탁월한 관점이 인상적입니다. 전하는 메시지는 같지만, 로마서에서는 그것이 더욱 폭넓게, 찬찬히, 그리고 아무런 논쟁의 여지없이 설명되고 전개됩니다. 바오로는 로마서 전체에 걸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어떤 특정 상대에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형태를 견지하는데 이것은 당시 대중 철학에서 이용하던 문학 유형으로, ‘디아트리베 방식이라고 합니다.
④바오로의 서간 가운데에서, 로마서는 당시의 상황이나 시대와 가장 관련이 적으면서 가장 교리적입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과거에는 이 서간을 일종의 ‘신학 개요(槪要)’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그리스도교 교리 요약’이라든가 바오로 신학의 종합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같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판단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오로는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옹호하면서 코린토 교회의 일치와 선도를 위하여 애를 씁니다. 로마서에서는 마지막 몇 개의 장에서 실천적인 권고를 할 때 외에는, 적어도 명백한 어조로는 한 번도 교회가 문제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성찬례에 관한 코린토 서간의 중대한 가르침(1코린 11,17-34)에 비길 만한 내용을 Ⓑ로마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코린토 서간들에서는 성령이 여러 공동 은사와 교계 제도 직무의 근원으로 말해지지만, Ⓑ로마서 8장에서는 자유와 개인 기도의 원천으로 부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를 이 사도의 신학적 사상을 종합한 저술로 간주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현대적 의미로 그리스도교 조직 신학서와 같은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적합하지 않습니다.
4.로마서집필의 외적 동기
그리스도교는 시작부터 분열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구원의 유일한 원리는 사도가 계속 율법이라고 칭하는 모세의 구원체계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의 율법준수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라는 것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율법에 대한 각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숙고하라는 것입니다. 이들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재평가하고 서로 다른 종교 그룹 간 조율을 위한 것이 로마서의 주요 목적 이기도합니다. 바오로는 역사의 그 순간에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들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교회는 두 집단으로 갈라질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유다교 회당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개종한 다른 민족 출신들이 있었습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그리스계 그리스도인
① 유다계 그리스도인
❶바리사이 출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추종자는 유다전통과 일치해한다. 그 이유는 메시아의 약속이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아야한다.
❷야고보 중심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 반드시 할례를 고집하면 이방인 선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몇가지 예루살렘 교령 준수를 요구하는 부류이다(사도 15,20 예루살렘공의회).
❸바오로,바르나바처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다.
❹유다교를 포기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유다교에 적대감을 가진 부류이다. 이른바 신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자기가 올라온 사다리를 왜 거기에 있느냐고 치워버리는 사람들이다. 바오로는 이들에게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로마 7장;9-11장 참조).
② 로마,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❶유다교 방식을 고집하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다.
❷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유다교 전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❸완전한 자유로 바오로를 추종하던 그리스인들이다.
❹자유 해석가들이다. 바오로 사상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율법을 거부하고 영지주의로 흐르는 경향도 발견된다.
이러한 분파 집단은 시대에 따라 여러 곳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되풀이됩니다. 로마,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종종 이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치체로가 야만적 미신주의자들이라고 부른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에서 여러 차례 추방되었고 로마시민의 반 유다 감정은 경멸과 적대감이었습니다. 서기 19년 티베리우스(19-36)는 로마군 징집에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추방하였고, 칼리굴라(37-41)는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모습이 새겨진 쥬피터의 상을 세우고자했던 그리스도교 박해자였습니다. 클라우디오(41-54)는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하였습니다.그리하여 유다인 격리구역이 생겨났습니다.
◎유다인 거주지역 게토(ghetto)
지금은 흑인 또는 소수민족이 사는 구역을 게토라고 하는데 기본의미는 유다인들이 모여살도록 법으로 정한 거주지역을 이르는 말입니다. 로마인들의 반 유다 감정에 의한 당국의 구역정리로 구분된 유다인의 지역이 게토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구역정리로 로마의 14지역에 유다인이 거주하였습니다.14-15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유다인 강제격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국교인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해서 유다인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게토 밖에서는 유다인임을 나타내는 표지(보통 노란색)을 달아야 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폐지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는 게토를 다시 만들었고 이때의 게토는 유다인을 전멸시키기 위해 세운 집단수용소였습니다. 현대의 미국 법률은 게토의 폐지를 추구합니다. 1964년에 민권법이 통과되었지만 이 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5.사도 바오로의 순교
①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각자 출신과 경향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졌습니다. 이 다양한 그룹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시키고 연대의식을 이끌어낸 놀라운 인물이 사도 바오로입니다. 로마서는 구체적 현안 문제를 다루지 않은 일반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장차, 또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중차대한 교회일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교리와 실천을 하나로 이루는 노력으로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 모금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②유다인들로부터 소요를 일으키는 선동자로 고발된 바오로는 로마시민권을 행사하여 황제에게 상소하였고(사도 25,12)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합니다(사도 27,1-28,16 바오로의 로마행).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2년 동안의 연금 상태에서 끝납니다(사도 28,30-31). 그리스도교가 사도 바오로의 희망대로 로마에 도착한 것입니다.
③클레멘스 1세 교황이 95년경 코린토로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는 스페인선교 후 다시 로마에 와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64년 7월19일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당시의 황제네로가 도시계획을 위해 로마시를 방화하였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로마시민들이 이에 항거하자 황제는 로마인들의 경멸의 대상인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64-68까지 4년간 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바오로는 순교한 것으로 봅니다.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트레폰타네에서 참수형을 받았고 목이 잘려 세 번 구른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현재의 바오로 대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숫자적으로는 네로황제의 박해가 대규모였으나 칼리굴라,도미티안 그리고 로마의 5현제중의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그리스도교박해도 처절했습니다. 스토아철학의 대가인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로마인들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감정을 잘 알게 해 줍니다. 313년 폰테밀베오에서 막센티우스와의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가 선포한 종교의 자유-밀라노칙령, 392년 테오도시우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로마국교선언은 하나인 신조를 생명으로 지킨 사도바오로 그리고 직계제자들에게 불어넣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순교하는 힘이 아니라 진리를 수호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힘입니다.
6.로마서의 구성
바오로의 모든 서간 가운데에서 로마서처럼 틀이 잘 짜여 있고 엄격한 구성이 드러나는 인상을 주는 본문도 없습니다. 로마서 역시 바오로가 쓴 다른 서간들처럼 서로 선명히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음을 모든 주석가가 인정합니다. 곧 교리편(1─11)과 권고 또는 훈계편입니다(12─16).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1,18-4,25 | 유다인 이방인 모두 죄인임을 출발점으로 죄와 구원에 있어서 동등하며 믿음으로 구원을 강조. |
5, 1-8,39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터 해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며 이를 바탕으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희망의 새 삶을 기술. 이제 율법은 영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한다(8장) |
9 ―11 | 하느님백성의 우위성을 주장한 뒤 유다인들을 멸시하는 오만한 이방민족에 맞서면서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이스라엘의 신학에 대한 성찰을 발전시키며 구원의 미래가 이스라엘 안에서 완성될 것임을 역설. |
12―16 |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결론들을 인상적으로 약술. 로마를 포함하여 교회전체를 뒤흔들어놓았던 분열을 넘어서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평화와 사랑 안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를 강조. |
새로운 연구들의 결과로 로마서의 다른 구조가 제시되는데요. 이것이 사도의 핵심 구성에 더 가까운 것 같고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방식에도 더 부합하는데, 사도는 이른바 ‘집중적 반복’의 방식을 따릅니다. 최근에 제기된 로마서 구성 가운데 고난 문제의 제기와 하느님 구원의 특징적 기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난 | 하느님의 구원 |
1,18-3,20 하느님의 단죄와 이교인들과 유다인들이 겪는 고난 |
3,21-4,25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그분을 통하여 받는 의화 |
5,1-14 첫 아담에 따른 인류 공통의 고난 |
5,15-6,23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대에 의한 인류의 구원 |
7,1-25 율법의 종이 된 인류의 곤궁 |
8,1-39 성령에 의한 인류의 해방 |
9,1-10,21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스라엘의 곤궁 |
11,1-36 궁극적 구원 |
7.로마서의 신학
이미 언급한 대로 로마서에서 바오로 신학의 모든 주제가 고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에서 거론되는 주제들은 깊이 있게, 그리고 다른 데에서는 볼 수 없는 명료성과 설득력과 함께 다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은총의 힘, 죄로 인한 불행, 믿음에 의한 의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루는 삶과 죽음에 관하여 이 서간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를 통하여 바오로는 다른 누구보다도 뚜렷이 그리스도를 식별하고 표현하였으며, 열정적으로 다른 개념들을 사용하여 사상의 결론을 이끌어 세세대대로 그리스도교에 거듭거듭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사도는 신학적으로도 완벽한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며 죽음에 있어서도 스승을 닮아 네로 치하에서 66년 학살되었습니다.
바오로신학의 특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 없이 부활은 없고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신앙의 근거도 아무 것도 없는 의인의 죽음일 뿐입니다. 그토록 강렬한 언어로 21세기에 이르도록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길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신학을 완성한 인물 그가 바오로입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THE LETTER OF PAUL TO THE CHURCH IN ROME]
Ⅱ. 믿음에 의한 의화 1― 4장
1장
1.믿음을 통한 구원 [Salvation by faith] (1,1-17)
1,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①종의 70인역 둘로스(δοῦλος)는 경멸을 담은 의미로 노예를 뜻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 받은 종 모세, 여호수아, 다윗, 이사야 등이 하느님의 종임을 자처한 경우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 표현으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며 옛 계약과 새 계약이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모두 아무런 구분 없이 구약성경의 약속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②하느님의 복음;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선포하신 ‘기쁜 소식(에우안겔리온,εὐαγγελίον,ου)’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쁜 소식은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되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유다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 위해 바오로를 따로 선택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은 유다지방에만 선교가 국한 되었습니다. 이제 광역선교는 바오로의 몫입니다. 이 일을 위해 사도바오로는 특별하게 선택되었습니다.
③이렇게 사도는 첫 머리에 자신의 소개와 서신의 목적을 밝힙니다.
1,3“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①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 인성과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의 조건에서 산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부활 전에는 육의 나약함과 비천함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하느님의 특권을 충만하게 소유하신 분으로 특징을 이룹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도는 이미 현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②육으로는;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according to the human nature)그는 당신들이 원하는 다윗의 후손 메시아이지만 거룩한 영으로는 메시아의 신분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정치적 특성을 지닌 메시아적 그리스도론을 추구한 초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을 취합니다. 클라우디오의 추방령이 말해주듯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메시아니즘에 휩싸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유다의 메시아니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했습니다. 파스카축제마다 자칭 메시아가 일어나 군중을 선동하고는 했습니다(사도 5,36참조).
③육(싸륵스 σάρξ)은 로마서에 20회 이상 사용되는데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❶모든 육의 의미는 만물의 영장으로 드높이 창조되었지만 나약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 존재로 능력과 수명이 제한되는 인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온전한 인간 곧, 이스라엘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❷사도는 자연적인 한계 외에 인간 조건이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또 그럼으로써 인간본연의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육을 죄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 곧 나약성을 타고난 인간은 파괴적인 힘이 그 안에 자리 잡고 또 그것의 노예가 되는 한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파괴적인 힘이란 죄와 그것이 가져오는 욕망 그리고 죽음입니다.
❸사도는 육의 해방을 위해 성령에 따라 살아가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합니다. 이것이 뒤에 나오는 로마서 8장의 주제입니다.
④육의 노예가 되는 한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고 육적 욕망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육이 죄 자체는 아닙니다. 성령을 통한 육의 해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육적인간과 영적인간 두 부류로 사람을 나누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 안의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1,9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①믿음을 통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서신의 목적을 강조하면서 바오로사도는 영이라는 낱말을 자신의 서간에서 네 가지 주요의미로 사용합니다.
❶하느님의 영 또는 성령 ❷사람의 영 ❸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세상 또는 악의 영 ❹주님의 파괴적인 입김으로서의 영입니다(2테살 2,8). ❶❷의 범주는 판단이 어렵습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오거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과 사람의 영 곧 창조된 모든 인간에게 들어있는 영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바오로가 이 두 영을 서로 구분 지으려고 애쓴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②사도는 구약성서에 따라 하느님의 영과 사람의 영 사이의 본질적인 유사성보다는 하느님의 영이 사람의 영에 비하여 월등히 존귀하신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은 사람의 영이나 마음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당신 소유로 삼으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사실 뿐만 아니라(8,9),교회 안에도(1코린 3,16) 또 그들의 몸 안에도 사십니다(1코린6,19). 이 ‘살다’라는 동사 역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개념으로 성령의 현존을 실제적인 것이면서도 거리가 있는 것으로-개인의 믿음에 따른-묘사합니다.
③‘내 영으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우선 하느님의 영의 활동 영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는 대부분 성령께서 기적이라든가 비범한 표징 속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교회와 또 성령께서 온전하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납니다. 이는 교회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성령께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안에 드러납니다(1코린 12).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 뿐입니다(에페 4,4). 바오로의 세 가지 근본 직무(사도, 예언자, 교사)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조는 물론 아주 특수하거나 매우 비정상적인 교회 활동까지도 성령께서 당신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으로’는 그러한 ‘일상에서 드러나는 성령’으로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성령’
창세 11,1 인간들이 사용하는 말이 같아 서로 의기투합하여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이름을 날리자”고 계획하게 되었는데 하느님 보시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불과했으므로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뒤 섞어 혼잡하게 하시고 온 땅에 흩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흩으셨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흩어져 외롭게 되었던 것이지요. 나날이 지혜로워지고 있는 만물의 지배자들은 사회생활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가장 친밀한 관계인 가족 안에서도 단절감을 경험합니다. 말로 말을 질식시키며 서로 걸고 넘어집니다. 누구도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2장1-4에서 성령폭발사건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각자 자신의 나라말로 알아들었다고 하는 그 현상은, 모두 알아들은 외국어 즉, 신령한 언어는 공동유익에 필요한 일치의 언어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특히 코린토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도 격려해주는 사도직을 수행하라고 베푸신 것임을 지적 합니다(1코린 2,10-16). 내 일상 안에서 드러나는 영으로 우리는 이웃을 격려하고 나누는 멋진 삶을 살아갑니다.
1,14“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 에게도,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스인 비(非) 그리스인은 종족이 아니라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명칭입니다. 당시 로마를 포함한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그리스문화속에서 그리스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들이 그리스인으로 불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야만인을 뜻하는 바르바로스로 불리웁니다. 그러나 16절이 말하듯이 신학적으로는 인류전체가 선택된 민족 유다인과 다른 모든민족으로 나뉘는데 이 모든 다른 민족이 그리스인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1,15“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①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②구원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당시 희랍계에서 유행하던 단어입니다. 특히 신비주의자들에게 이 단어가 각광을 받았는데 그들은 많은 입교의식을 거쳐 일종의 지복상태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보기에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의 능력을 지닌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③그러므로 여기에서 특별히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의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모세의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지키는 선민 이스라엘에 한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리스도는 율법이아니라 십자가로 세상을 평정하셨기 때문입니다.
1,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①하느님의 의로움(δικαιοσύνη γὰρ Θεοῦ 디카이오시네 게르 데오)는 각자의 행실이나 업적에 따라 보상하는 분배정의가 아니라 무상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정의를 뜻합니다. 바오로사도는 이 말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구원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옳은 일 정의감을 의미하는 사회정의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의로움은 나날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오는 행위의 의로움입니다. 또한 이 의로움은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실천으로서의 의로움 즉, 모든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②‘믿음에서 믿음으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하느님의 성실함에서 믿는 이의 믿음으로(칼바르트), 설교자의 믿음에서 청중의 믿음으로 또는 옛 믿음에서 새 믿음으로 (테르툴리아노), 단순한 지적동조(라틴어; 피데스 인포르마타 fides informata)의 믿음에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믿음(피데스 포르마타 fides formata 토마스 데 아퀴노 )등입니다.
The Jerusalem Bibie → it shows how faith leads to faith.
③바오로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의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고 단순한 글도 아니며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효과적인 말씀입니다. 그것은 실행을 수반하는 말씀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힘이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바오로가 전하는 말씀과 이 말씀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바오로의 소중한 주제를 만납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말씀이 선포될 때 이 말씀은 구원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참된 능력은 율법인가? 십자가인가? 이것이 로마서 핵심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2. 죄, 이방 민족들에 대한 단죄(1,18-1,32)
1,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느님의 진노와 구원을 베푸는 그분의 정의가 연결됩니다(미카 7,9;스바 3,1-10). 이 두 주제는 복음 선포에서도 서로 연관되는데 그리스말 동사 ‘나타나다’는 여기에서 현재형으로 쓰임으로써 죄 많은 인류에게 내린 하느님의 진노가 일으키는 항구적인 결과를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만이 이 결과의 범위와 강도를 조절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1,19“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①하느님의 구원이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된다 해도, 그러나 하느님의 단죄 역시 이 세상에 이미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매혹된 것을 붙들고 있는 한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으니 누구도 변명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체험적이 아니면 이론적으로도 알만 한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혹은 알았다하더라도 그 앎이 마땅한 경배의 결과를 보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의 되는 것입니다.
②네발짐승의 형상은 광야에서 만든 금송아지의 일화를(탈출 32장;신명 9,8-21) 전하는 시편 106,20을 가리킵니다. 바오로는 여기에 다른 민족, 다른 우상을 끌어들여 이 시편의 전망을 더욱 확대시킨 것입니다.
③그 탁월한 감성과 이성을 가지고도 하느님을 찬미하기는커녕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네발 달린 짐승이나 뱀 따위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경이로운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창조의 신비를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변명할 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바오로의 이교의식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배척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파멸의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 성공을 결정짓는 저항하기 어려운 현실이기도합니다. 거대한 신전과 화려한 의식에 압도되어 많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버렸습니다.광적인 쾌락을 추구하였으며 욕정에 빠졌고 동성애가 성행하던, 세네카가 말하기를 로마시를 하수도라고 했던가요?
2장
1. 모든 사람이 죄와 관련되다
2,1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①철저한 율법준수로 스스로 경건하다고하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비판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2,5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심판하기 때문입니다.
②진노와 계시의 날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합니다.(에제 7,19; 묵시 6,17 참조)
③회개에 해당하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는 후회, 참회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말 어근이 본디 뜻하는 그대로 생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고의 전환이라는 그리스적인 뜻에만 머무르지 않고 셈족계의 사고방식에 따라 사람 전체와 관련되는 어떤 움직임으로 특징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이용하는 이 그리스말에는 슈브라는 히브리말의 어근의 의미도 내포됩니다. 곧 돌아가는 것,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악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①통상 회개라는 말로 사용하는 ‘돌아오라’는 의미의 히브리말은 테슈바하(되돌아가다),그리스말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영어 conversion; repent)입니다.
메타노이아는 마음을 바꾸다,뉘우치다,회개하다의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εῖω)에서온 말입니다. 이 말은 본디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사람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는 conversion(바꾸다, 회심, 귀의, 전환), repent(후회하다, 뉘우치다) 등으로 번역 되었습니다.
②메타노이아는 인간의 내외(內外)적인 면의 회개를 서술하는 용어로서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니함’과 ‘슈브’를 그리스적 思考로 번역하여 70인역(70人譯; LXX;Septuaginta)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❶‘니함’은 돌아섬의 내면의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어떤 변화를 통해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려는 시도가 ‘니함’의 중심 개념임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의지와 결단의 차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배 이후 ‘니함’이라는 말이 메타노이아로 쓰이면서 회개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니함’과 메타노이아가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❷ ‘슈브’는 돌아섬의 외적 상태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돌다, 돌아가다를 의미합니다. 예언서에는 실존 전체의 방향을 ‘하느님께 돌려놓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회개의 의미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 하느님과의 본연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2,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12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인간의 유죄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모세의 율법이 있다 하더라도 유다인과 다른 민족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②율법을 알든 모르든 둘 다 죄인으로서 하느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바로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법에 담겨있는 그분의 뜻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규정한 민사법, 형사법 등 인간의 방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른 민족들에게도 양심의 판단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모세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그 구실을 합니다.
③율법이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하는 한 그들은 모두 죄인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있습니다. 신명기의 사상은 인간복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호의는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처음의 은총을 잃었어도 믿음과 희망은 남아서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2. 다른 민족들과 율법
2장은 율법의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은총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 설명입니다. 기도 하면서도 은총을 믿을 수 없다면 율법주의자가 아닌 지금에도 믿음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 사도는 2,12-14에서 인간의 유죄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모세의 율법이 있다 하더라도 유다인과 다른 민족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설명하려 합니다. 율법을 알든 모르든 둘 다 죄인으로서 하느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바로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2,12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3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4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도 양심의 판단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모세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그 구실을 합니다. 양심에 의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마음을 관통하는 어떤 강렬한 빛이 필요합니다.그래야 양심이 자신을 선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사람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2,15)
3. 유다인과 율법
2,17“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
이 말은 유다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2,19 “자신이 눈먼 이들의 인도자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빛이라고 확신하며, 20율법에서 지식과 진리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며 철없는 자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
①어리석은 자들은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에 줄곧 등장하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느님의 실존과 권위를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악한 경향에 몸을 맡겨(잠언 10,23;우둔한 자는 부정한 짓을 즐기고 슬기로운 이는 지혜를 즐긴다)하느님 마음에 들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②그들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자신은 도둑질하고,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을 하고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신전 물건을 훔치느냐고 비난합니다.(2,21-22)
③사도의 이러한 비난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으로 보입니다.이교인들이 신전의 기물이나 음식을 훔쳐와 자신의 집에 보관하거나 팔거나 하는 행위에 유다인들도 참여한 것 같습니다. 팔레스티나 또는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에게 모두 금지되어있는 일입니다.
2,23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24 과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랑은 그것에 만족하는 경우에 하는 일입니다. 율법을 온전하게 수용했으면 온전히 지켜져야 하는데 율법 자체가 위와 같이 위선적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이사 52,5 내 이름은 날마다 끊임없이 멸시를 당하는데...).
2,25“그대가 율법을 실천하면 할례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27그리하여 몸에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율법을 준수하는 이들이, 법전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심판할 것입니다.”
①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 성별되었기 때문에 그 존재는 거룩함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예배와 종교적인 규칙들을 준수하고 정결과 부정을 구별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들은 끊임없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9장2절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②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레위기가 알려주는 성결법 즉,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중한 가치이고 자랑이었습니다. 할례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표징이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할례를 구원의 보증으로 여기고 선민에 소속됨을 가리키는 외적표지를 영광으로 삼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③후에 참 할례의 개념이 발전하면서 마음의 할례가 등장하게 됩니다(신명 10,16;30,6;예레 4,4;9,25). 이러한 영성적 신앙은 주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여러 집단에서 발견 되었습니다(집회 35,1-10;다니 3,38-40참조).
3장
믿음으로 의롭게
3,1 그렇다면 유다인으로서 더 이로운 점은 무엇입니까? 할례의 이점은 무엇입니까? 2어느 모로 보나 많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3,2 직역-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그리스어는 신탁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여기에서는 계명과 약속 또는 예언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에 따라 그들을 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사실 우월합니다. 이러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불충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선민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런 이점도 우월성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3,3 ‘그러면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불성실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불성실함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는 말입니까?4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당신께 재판을 걸면 당신께서 이기실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지만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①3,4의 인용은 번역이 좀 이해가 어려운 그런 시편 51,6입니다.
②이 말은 성서적으로 이해해야합니다. 말씀이 맡겨졌지만 불성실한 사람이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그들 때문에 말씀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러한 구절은 악행이 판을 치는데 하느님은 왜 가만히 계시는가? 부가 득세하고 힘없는 사람은 소외되고 억울한데 하느님의 정의는 이 땅에 없다고 말하기 쉬운 환경에서도 나타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맺으신 계약에 변함없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진실하시고, 사람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변덕스럽고 불성실하기 때문에 거짓스러운 것입니다.
3,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7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사람의 죄가 하느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의로움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그 드러남을 보고 세상이 하느님을 알아야하니까, 하느님의 의를 드러내는데 일조를 한 죄인을 쉽게 내치면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비방하는 논쟁주의자들의 헛된말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짓거나 진실성이 없는 사람을 향하여 저 사람이 있어야 하느님의 선하심도 드러난다는 의미도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3,9“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에 따라 그들을 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사실 우월합니다. 이러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불충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하 3,10-18은 순서대로 시편 14편,5편,140편,10편 그리고 이사 59,7-8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3,20“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본 바와 같이 사도바오로는 율법을 설명하면서 모세오경,시편,예언서 등을 모두 고찰하고 있습니다. 심도(深度)있게 알아야 감히 율법을 거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의 율법에 대한 이러한 반박의 여지는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율법은 옛 계약의 모든 종교체제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 곧 의화(義化)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all the law does is to tell us what is sinful)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만 죄를 극복할 힘은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두 가지 중요한 단어를 보아야합니다.
①하느님의 영광: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지니는 영광입니다. 아담이 그러하였듯이 모든 인간이 이 천부의 영광을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의미는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또 전달되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화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광이 광야의 성막과(탈출 40,34-35)성전(1열왕 8,11)에 머물렀는데 이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 누리던 특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죄를 지어 이러한 영광의 현존을 상실하게 됩니다(에제 10,18-19). 이 영광은 메시아시대에 돌아와 (에제 43,1-9), 정화되어 거룩하게 된 새 공동체의 특징을 이루게 됩니다 (이사 60,1). 바오로는 이러한 영광의 상실과 복구라는 주제를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키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업적에 적용합니다.
②속량(그리스말 아폴뤼 트로시스 ἀπολυτρώσεως, 영어 리딤드 redeemed-되사다, 약속을 지키다): 구약 성서에 동사 ‘뤼트루 스타이’ 로 쓰이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가리키는데 사용 되었고 노예들을 풀어줄 때 사용되는 몸값의 의미도 있습니다(1코린 6,20). 사도가 사용하는 이 몸값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속함을 의미하며 이 구원을 위하여 지불된 값은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놓은 값진 성격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이때 치룬 값이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에페1,7;1베드1,19).
③의롭게 하다의 명사형 ‘의로움(정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 또는 ‘의롭게함’은 신학용어의 ‘의화’로서 로마서에 40회 정도 사용 됩니다. 이 어휘들은 갈라티아와 필리피서에도 사용되는데 사도는 이 주제를 네 가지 방향으로 전개 시킵니다.
▶성서에 나타난 바오로의 의로움
❶의로우신 하느님(1,17;3,5.21.26;10,3; 2코린 5,21). 이는 당신 자신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구원계획에 늘 성실하심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이른바 분배의 정의가 아니라 지고하고 왕적인 것으로서 구원을 베푸는 정의입니다. 그것은 인간 역사 안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 행동의 변함없는 성격으로서 그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이 의로움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계시되고 또 복음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❷의로움의 활동은 죄를 지어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죄스러운 인간과 관련하여 행사됩니다(3,23-24). 이 의로움은 은혜로운 판결로 그 절정에 다다르며 그리고 인간에게는 다만 겸허한 수용과 믿음의 순종이 요구됩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인한 속량 덕분에 거저 받는 의화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노력과 정의로 이루었다는 오만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무상적인 행동으로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이 창조됩니다. 이 무상의 의화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안에 성령의 생명을 일으키시고(8,2)성화의 길이 시작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1코린1,30).
❸이 무상적인 의화는 최후의 심판까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 합니다.
❹이모든 바탕을 자기의 업적이 아니라 의롭게 해주시는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고 중개해주시는 그리스도에 둔다는 것이 바오로의 결론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3,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속죄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본디 지성소에 모셔진 계약궤를 덮는 속죄판(힐라스테리온 hilastèrion)을 가리킵니다. 해마다 한 번의 속죄일에 대사제가 지성소로 들어가 이 판위에 황소의 피를 뿌립니다. 이러한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이 지은 죄들이 용서되는 것입니다(레위 16). 바오로는 구약의 속죄의식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 속죄는 믿음으로 베풀어집니다.
3,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①그리스말 믿음(피스티스πίστεως;영어 faith)는 페이도πειθώ 확신하다에서 온 단어입니다.
②루터(Luther,Martin 1483-1546)는 로마서를 번역하면서 ‘믿음으로’를 ‘믿음으로만’- 오직믿음으로 (sola fide) 옮깁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이 ‘만’ 때문에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이러한 번역자체가 바오로의 생각을 왜곡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는 이 구절에서 죄인이 의롭게 되는 데는 그 사람의 어떠한 공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사도에게는 믿음만이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오로가 로마서를 그리스말로 쓰기는 하지만 셈족식 사고를 하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언어학적 관점에서도 ‘만’이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으로’와 ‘믿음으로만’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의화 곧 의롭게 되는 것, 그리고 율법의 실천과 믿음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 또는 실천적 믿음의 의미와 기능과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입니다.
▶Luther, Martin의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sola sciptura), 의인(義認)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sola fide)는 95개조 조항의 반박문으로 교회의 윤리 및 신학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교황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반포한 대사를 공포하고 대사부(大赦符)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지시하였습니다. 이때에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부를 면죄부(免罪符)로 착각하여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517년 10월 31일에 교회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대주교에게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는 편지에 ‘95개항의 신학 명제’를 작성, 동봉하여 보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1521년 1월 3일에 공포된 교황 교서‘Decet Romanum Pontificem’에 의해서 공식으로 파문 되었습니다. 내적인 개혁운동으로서 시작한 것이 서구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초래한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성사와 교권을 부정하고 신교로 분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가톨릭교회에 깊은 자성의 기회가 되었습니다.교황이 제왕을 파문하던 중세기에 교회의 권력과 더불어 부패도 생긴 것입니다. 루터의 95개 조항을 정치적으로 이용 하려던 이기적인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오로사도가 로마서를 통해 심혈을 기울인 교회일치는 로마서 연구에 의해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
야고보서간 이후에 로마서가 집필 되었다는 설에서는 로마서가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를 반박 했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야고보서간이 로마서 이후에 집필 되었다는 견해에서 보면 야고보서간은 바오로의 사상(sola fide 솔라피데)를 단편적으로 받아들인 ‘오직 믿음으로’그룹을 형성한 사람들에게 강력한 반응 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간에서 문제 삼은 것은 죽은 믿음을 소유한 자에 대한 질책이며, 바오로로 또한 죽은 믿음이 구원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야고보서가 주장하는 것은 한 개인의 믿음에 따른 실행을 말하는 것이며, 바오로의 믿음은 신앙의, 교의적 차원에서의 믿음과 실행입니다.
사도 17,18에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토론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를 주도하는 두 가지철학 사조입니다. 에피쿠로스의 본래 목적은 인간의 행복 추구였는데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 대중에 의해 쾌락주의로 전락되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엄격한 자기절제로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며 절제와 극복이 정신의 최고 수준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중세기의 가톨릭이 스토아학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양극단의 사상을 가진 사회로 믿음을 가지고 들어간 분이 사도 바오로이십니다. ‘오로지 믿음’은 선행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의 핵심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 있습니다. 사도는 믿음을 통한 의화가 구약의 주제임을 상기시키고자 아브라함을 재조명합니다.
4장
아브라함의 믿음 The example of Abraham
사도바오로는 아브라함을모든 믿는 이의 선조로 여깁니다. 이것이 4장의 핵심사상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을 통한 의화가 구약성경의 근본 주제임을 보여주려 합니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상성이라는 모티브입니다.
4,1 ‘그렇다면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10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은 다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입니까? 할례 받은 다음이 아니라 할례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13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7,1‘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2“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5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10너희가 지켜야 하는 계약, 곧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창세 17,1-14)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과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은 것은 아흔아홉이 된 어느 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할례의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무상성은 아브라함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이로써 사도는 두 계약의 -구약과 신약- 신학적 일치를 확립합니다.
▶‘의로움(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독일)은 죄는 그 본질상 하느님 앞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인간의 자만이며, 그리하여 인간은 현재의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 덕분임을 잊는다고 말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간의 종교적 모든 자만이 깨뜨려졌습니다. 지금 얻은 이 깨달음을 포함해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도 장애가 됩니다. 그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 18,9-14 참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매우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루카 18,11).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했다’ [The Pharisee stood there and said this prayer to himself→Jerusalem Bible]그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립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경건함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진심을 예수님께서 못 보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희사, 단식, 기도, 율법준수를 통한 희생을 예수님은 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준수자들의 자신감은 예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자신의 삶 전체를 파괴시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18,13-14)
누가 자신이 의롭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또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면 될까요?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은 하느님만이 부여하실 수 있는 은총입니다.
사도바오로가 생각한 구원역사에서는 약속과, 믿음과, 율법이 수행하는 기능들이 서로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상속은 하느님께서 해주신 약속에 바탕을 둔 믿음을 통하여 받습니다. 율법은 나중에야 등장한 것입니다(갈라 3,6). 또한 이러한 율법도 7,8-12에서 자세히 설명되듯이 범법 사실을 드러내고 또 죄가 하느님 진노의 대상임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통합됩니다(3,20). 우리자신의 능력으로 또는 윤리적인 행업으로, 모든 것이, 심지어는 구원도 우리 노력에 달려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비관론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로마서 ① 1⎯4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