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④ 9⎯11장 [이스라엘 문제(問題)]

써니리버 2025. 4. 23. 15:54

                                     
서론(緖論)
1.이스라엘의 위치 (The place of Israel)
로마서는 입문에서 고찰한대로 바오로사상의 집약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의 틀을 세운 책이며, 바오로 이전의 철학과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잇는 주요기점이 되고 사실 요한복음사가의 통찰 외에 바오로 사상을 뛰어넘는 신학은 없다고 학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교가 테오도시우스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고트족의 잦은 침입으로(AD 410년) 시달리게 되는데 원로원으로부터 유일신을 섬기기 때문이라는 그리스도교 국교화 논란이 일자, 다신교 복귀주의에 맞서 집필한 책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입니다(AD413-427, 22권).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의 붕괴는 설명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대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트족의 침입이 있었지만 로마제국을 위협할만한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붕괴는 내부에 있었습니다.사도 바오로의 전도 시기는 전쟁보다 잔혹한 사치와, 쾌감과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귀족들의 탐욕은 경쟁을 부르는 차원이었고 서민들이 즐겨 찾는 검투 경기장에서 시민들은 검투사들의 죽음의 순간을 즐기고는 했습니다. 검투사들을 자신들의 카타르시스를 만족하게 해주는 도구로 보았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서 자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갈망하였으므로 사도행전 17,23이하가 전하는 대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마음을 의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느님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사도는 주장합니다. 바오로 신학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한 것으로써 이른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원론을 펼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 1,21-24) 
그런데, 그 십자가를 처형의 도구로 사용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 그것이 사도가 고심한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본질을 건드리는 9,10,11장은  로마서 논증의 핵심 부분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형에 처한 이스라엘은 하느님나라의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Jerusalem Bible에는 The place of Israel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처지,위치 등으로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 

2. 9⎯11장이 로마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일부의 학자들은 이 부분이 매우 특이한 별도의 구절이라고 주장하고, 일부는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는데 이 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보통은 후자를 따릅니다. 
① 9⎯11장의 단일성
이 부분이 로마서 전체와 구별되는 독자성은 매우 뚜렷합니다. 9―11장을 제외시켜도 로마서는 영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을 다룬 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행동양식을 기술한 12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사도는 9―11장을 첨가하면서 결론을 지연시키는 것입니다. 
② 9⎯11장의 로마서 전체 맥락과의 관계
그러나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기에 9―11장은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논증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자비의 대상에는 어느 백성도 구분이 없고,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사도는 말했습니다. 더욱이 7장에서 강하게 제기되었던 율법의 문제는 율법에 희망을 거는 백성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9⎯11장이 제기하는 문제는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은 하느님나라의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아무튼 전체 맥락과 갖는 중요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9―11장은 문학형식으로나 주제에 있어서나 독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3. 9⎯11장에 대한 신학적 해석
이 텍스트는 글자 그대로 분열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스라엘 태생이라고 해서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며(9,6), 아브라함의 후손 이라고 해서 모두 그 자녀는 아니며(9,7),야곱은 에사우를 제치고 장자권을 차지했습니다(9,10-13). 요컨대 유다는 자기 자신과 결별해 있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유다인들은 거부당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사도는 이중, 삼중의 결별 상황을 직시하고 이 상황을 인정하면서 그 의미를 추구합니다. 단지 그 상처를 거부하거나 기적적인 해법을 찾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보고 이 간격들을 넘어서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다양한 갈등들은 사도 자신에게서 비롯하여 이른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도는 필연적인 결별을 강조하면서도 일치의 끈을 연결시키기에 노력 합니다. 이것이 탁월한 의미에서 교회일치의 문제일 것입니다.
①율법은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죄를 드러나게 할 뿐 그것을 저지하는 힘은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의 자녀들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관점 에서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소유한 백성으로서 조상의 덕분으로 사랑을 받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약속의 자녀로 지칭하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신학적 존재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②사도는 이 모순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애쓰지는 않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스라엘에게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11,26)이라는 빛나는 미래를 열어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의 미래 안에서 인정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갖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의 갈등적 관계를 신학적 실존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유다 회당과 교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신학적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멸시하며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는 이스라엘을 축소시키지 않고 서로의 상황을 인정하도록 초대합니다. 구원의 미래에 스스로를 개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텍스트를 보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자신의 공동체적 상황을 인지하고 하느님의 구원 앞에서 기쁨을 노래하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남은 과제는 모든 것을 은총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4. 9⎯11장 본문
이 텍스트에서 사도의 논증은 치밀합니다. 우리는 사도의 사고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흐름을 알아야합니다. 먼저 이 텍스트는 이스라엘의 비탄스러운 현재를 확인함으로써 시작합니다. 9⎯11장은 비탄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흐름을 거칩니다. Ⓐ첫 번째 흐름은 이스라엘의 분리를 강조하고 Ⓑ두 번째 흐름은 이스라엘 자신을 성찰하는 엄밀하고 일관된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흐름은 하느님과의 최종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질 구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9장
이스라엘의 특권 (The privileges of Israel)
9,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바오로는 이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는 자기의 정직성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을 부인할 수 없는 두 증인으로 내세웁니다(2코린 2,17; 갈라 1,20 참조. 또는 신명 19,15의 두 증인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오로가 여기에서 말하는 “양심”은 어떤 독립체가 아니라,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 안에서 직접 증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9,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①지금까지 사도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의화(義化) 교리를 구약 성경에 의하여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9―11장에서는 이 교리가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과도 부합된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바오로 자신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직접 답변을 하게 됩니다. 
②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택과 함께 하느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구원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인가? 사도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③이스라엘의 각 시대마다 백성전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한 부분만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이, 에사우가 아니라 야곱이, 그리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러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계획에 계속 어떤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행위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당신의 절대적인 자유로 행사하시는 선택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모든 이의 구원을 향하여 움직입니다.
   
9,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⑴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⑵영광, ⑶여러 계약, ⑷율법, ⑸예배, ⑹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⑺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⑻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①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느님께 받은 이름입니다(창세 32,39).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은 야곱의 후손으로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이들을 의미합니다. 이 선택으로부터 모든 이스라엘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②"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직역-아나테마가 되어)."라는 이 불가능한 원의 안에서 유다인 형제들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음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나테마(anathema; ἀνάθεμα)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헤렘(herem)인데 이 말은 하느님의 적과 그에 딸린 인적, 물적 소유를 완전히 파괴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신명 7,26). 이 말이 신약성경에서는 저주의 의미를 띄게 됩니다. 이것을 받은 자는 공동체에서 축출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저주함으로써 그 저주의 내용을 계속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③바오로의 이 극단적인 발언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방법으로 봅니다.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준비되었고, 율법은 지켜졌으나 하느님의 마음은 거절당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는 이들의 특권을 인정합니다. ⑴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⑵영광, ⑶여러 계약, ⑷율법, ⑸예배, ⑹여러 약속, ⑺조상의 후손 등이 그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의 여덟 번째 특권은 ⑻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특혜를 거부하고 앞서의 일곱 가지 특혜에만 머물게 됩니다.

▶헤렘(herem)       
헤렘(herem)은 히브리말로 바친다,근절하다,금한다의 뜻으로 헤렘의 법은 성전(聖戰)에서 취할 행위를 규정한 성스러운 법을 말하는데 이교신앙을 가진 적이란 하느님께 반대되는 민족이므로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다 파괴하여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호수아 10,40 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분부대로 헤렘의 법에 따라 숨쉬는 것이면 모조리 죽여버렸다.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헤렘의 법을 어기고 양과 소와 새끼양들을 취한다(1사무 15,9). 사울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취한 짐승이라고 하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1사무 15,22)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사울을 버린다. 이 전멸의 사상은 신명기 7,1-6에 나타난 대로, 그들을 전멸하고 어떤 계약도 관계도 맺지 않아야 하는데 이유는 그들과의 관계로 이교의 의식에 빠져들 위험을 예방하려는 종교적 차원에서 실행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교신앙의 절대추방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에게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그분을 위하여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공존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충성이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조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피할 수 없었던 우상 숭배의 위험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난 뒤의 생각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투영시킨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유효하다
9,6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8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1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①‘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는 말라 1,2-3을 인용한 것으로 에사우 보다 야곱을 선호하였다는 히브리말식 표현입니다. 이 두 사람이 구원의 역사에서 각각 차지하게 되는 위치와 그들이 수행하게 되는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에사우와 야곱은 갈라서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형제의 결별을 예상할 뿐 아니라 차남이 장남을 앞지르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로마서 9―11장의 핵심 논증과 만납니다. 두 형제 모티브는 에사우-야곱, 이스마엘-이삭악,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다와 유다계 그리스도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대비됩니다. 이 경우 후자가 전자를 앞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시 만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됩니다.
③야곱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지칭 됩니다.에사우는 에돔인을 가리키는데 사도시대에는 로마인을 지칭했습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지금 상황이 역전되어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민족)이 에사우가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성경의 인물들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역할을 종종 바꾸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그야말로 어렵습니다. 

14절부터는 세 가지 질문이 이어지는데 이 질문은 각 단락이 70인역 창세기편 성경인용으로 종결됩니다.이 세가지 질문은 대화의 적수 있는 것처럼 질문응답형식을 취하는 그리스철학(스토아)의 논증방식인 디아뜨리베(Diatribe;διατριβ)를 사용하여 기술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세 가지 질문    
질문[1] 하느님의 공정성 
9,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 쪽이 불의하시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5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탈출 33,19를 인용하여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계획안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게 하려는 것으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그러나 의롭게 된 후에도 노력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로마 12,11;1코린 9,24-27;필리 3,12-14 참조). 

9,17 ‘사실 성경도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려고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 곧 너에게서 내 힘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만드십니다.’
탈출 9,16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이 내용이 탈출기7장에서 15장까지 펼쳐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잘못과 징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로 파라오는 고집을 부리는 가운데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데 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비는 토마스아퀴나스 신학대전1부 신의 본성증명에서 완전, 선, 무한, 불변, 영원성, 오직하나 중 탁월하고 완전무결한 선(善)성을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불필요한가?

질문[2] 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9,19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20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23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렵니까? 27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①멸망하게 되어있는 진노의 그릇들은 하느님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죄 속에 머물러있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예정된 표적이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지는 않고 역전되어질 기회도 주어집니다. 자비의 그릇들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자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말하며 이 자비의 그릇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십니다. 
②남은 자들은 예언자들의 중심주제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작은 일부만이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여 메시아시대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이사 4,3;6,13;10,20;예레 23,3;아모 3,12;5,15 참조)   
③누구도 하느님을 상대로 논쟁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흙이 옹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할 수 없고 망치가 주인에게 이곳을 치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특별한 혈통도, 흠 없는 자신의 이력서도 아니고 스스로 번호 매겨 쌓아 놓은 공로도 아닌 온전한 의탁에 의한 믿음으로의 구원이 가능합니다. 
④행업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 가능하다는 말이 긴 논쟁이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종교적 선행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극단적인 표현을 한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 자신도 노력합니다. 
은총으로 의화 된 후에도 노력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9,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있다" 는 이 말에 오히려 희망을 걸고 충성과 순종을 다하며 감사해야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와 하느님의 선택은 하느님의 탁월한 신성에 의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모순과 갈등이 없는 선택이신데 그것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질문[3]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성  
9,30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은 것입니다.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①다른 민족들, 당시의 그리스철학에 의하면 그들도 끊임없이 의를 추구하였는데 이것은 지금도 그러하듯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도덕적 의로움입니다. 여기에서 추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의미의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인간행위의 성과일수 없으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믿음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②이스라엘이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③‘걸림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스칸달론 σκανδάλον)’은 이사 28,16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오로에게 이 걸림돌은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결국 형제들의 결별과 만남,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역전, 이 모든 것은 자유로우신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한, ‘그분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된 이스라엘의 구원은 남아있는가? 이스라엘의 미래는 무엇인가? 

10장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스라엘 [Israel has no excuse]
두 번째 흐름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성이 구원에 대한 희망의 가능성으로 나아갑니다. 10장에서는 이 구원 가능성을 위한 논증이 전개됩니다.
1.믿음을 통한 구원
10,1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①그들이 여전히 율법과 구체제(舊體制)를 구원원리로 받아들이며 의로움의 틀에 갇혀있는 한 이스라엘은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종식시킵니다. 
②율법주의는 성별된 민족으로 합당하게 살기 위한 법이 마련된 레위기 신학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 레위기의 율법 사상이 결국 유다이즘을 만들었고 이스라엘을 비참한 각고의 세월에서 견디게 한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하느님을 동족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자신이 아나테마가 되어(저주받은 자가 되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 좋다는 비장한 염원을 하는 것입니다(9,3). 
③이 불변의 율법은 수정도 폐기도 불가했습니다. 이 중차대한 율법을 생명으로 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느님 자신이거나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율법의 세계는 종식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는 사도의 발언은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리사이 (Pharisees, Φαρισαῖοι)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해 보다 엄격한 해석과 실천을 내세우던 학파에 속하던 사람들로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두가이와 반대의 입장을 취한 평신도그룹이 바리사이입니다. 이들은 대다수의 유다인들과 소수의 자신들을 구별하여, 율법을 엄수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하고 적대시하였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이 95회나 사용될 만큼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이들은 대부분 예수님과 격렬히 대적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는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었으며, 선한 삶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보상과 징벌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종파는 마카베오 시대의 하시딤(Hasidim 경건한 사람들)의 전통을 답습하였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아니었지만 안티오쿠스의 박해시대에 종교의 자유를 위해 민족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기도합니다. 바리사이는 귀족도 제관 그룹도 아니었고 도덕적으로도 성실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유다교의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엄격했지만 보수파는 아니었으므로 모세오경 외에 성경의 다른 전승도 인정했고 율법 해석을 위해 발전하게 된 구전율법도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 구전 율법이 대대로 전승되고 확대해 나아가 마침내 미슈나라는 별도의 율법서가 편찬되고(기원 후 200년)그 후의 탈무드가 집대성되었습니다. 
이 감동할만한 율법준수자들인 바리사이는 그들의 신심에 따라 일곱 부류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과시파, 태만파, 굽히고 걷는파,계산파,피투성이파,두려움파,순수 경건파. 이들이 모세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만든 지켜야할 세부사항은 613조항에 이릅니다. 유다는 율법준수로 하느님을 만나기 원했으나 불가능했고 이방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이스라엘이 율법이 구원이라는 행업에 매달려 어리석게 살았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의 선행자체도 하느님의 자비가 최종 목표였고 율법준수의 최종 목표 또한 거룩한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순종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 왕명에 굴복하자고 안식일을 더럽힐 수는 없었기에 1000여명이 모두 기꺼이 죽어간 것입니다(1마카 2,29-38). 
사도바오로는 율법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재확인하려 하는 것입니다. 동족의 구원을 아나테마에 걸고 말입니다.
 
10,8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는 신명 30,14를 인용한 것입니다. 일찍이 하느님의 말씀은 너의 입과 마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입니다. 
10,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①주님은 그리스어 키리오스(kurios, Κύριος)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주, 혹은 스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돈(adon)은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경칭으로, 또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대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회당(synagogue)에서 성서를 읽고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나 성스럽게 여긴 나머지 감히 부르지 못하여 아도나이(adonay, 나의 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은 아도나이를 키리오스(주, kyrios, 호격은 kyrie)로, 라틴어 번역본에는 도미누스 Dominus로 각각 번역되었습니다. 본디 그리스말 키리오스는 로마 황제와 헬라신들 공칭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장 높은 자에 대한 칭호를 예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②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닙니다. 
❶믿음은 설교자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응답이다(14-15절). 
❷믿음의 본래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곧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시키시고, 모든 인간의 유일한 주님이시며 구원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4,24; 10,9; 1코린 12,3; 15,1-11; 필리 2,8-11.사도 2,32; 17,31 참조). 
❸믿음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다(6,17; 2코린 10,4-5; 2테살 1,8. 사도 6,7 참조). 
❹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1,17; 3,21-26). 참 의로움은 믿음에서 오고(10,6),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고(3,25), 그리고 믿음을 근거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필리 3,9).의화만이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자체도 그분의 은총이다(2테살 2,13).
❺믿음을 통하여 받는 의로움은 동시에 죄의 용서이고(6,11-14; 갈라 5,24; 콜로 2,12-13),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이며(2코린 5,18-21; 에페 3,12; 콜로 1,22-23),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이다(에페 3,17). 성령에 따른 새 생명과 새 삶이 이 의로움으로 시작된다(갈라 3,2-5; 5,5-6; 에페 1,13-14). 바오로는 갈라 3,26-27과 콜로 2,12에서 믿음과 세례를 연결 짓는다.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신자들은 10,10절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 곧 마음으로 결정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바를 장엄하게 표현해 내는 것이다. 
❻믿음은 참다운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이 지상에서는 완전한 빛이 되지 못하고 나중에 가서야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2코린 5,7).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믿음은 희망과 연결되어(5,1-2; 1코린 13,13; 갈라 5,5) 사랑으로써 움직인다(갈라 5,6). 그리하여 자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함께 언급된다(5,1-5; 1코린 13,13; 에페 1,15-18; 4,2-5; 콜로 1,4-5; 1테살 1,3; 5,8). 현세에서는 믿음이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믿는 이는 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1코린 16,13; 콜로 1,23; 2,5-7). 끝으로, 믿음은 활력이 없는 어떤 보물이 아니라 하나의 삶(1,17),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아가야 하는 삶이다(2코린 10,15; 1테살 3,10; 2테살 1,3). 

2.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스라엘 
디아트리베 형식을 사용하여 연속적인 질문형식으로 구원의 확실성에 이르기까지 논증을 진행합니다. 사도는 질문들을 계속 다져감으로써 미래에 관한 부정적인 측면들을 극복합니다. 
10,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①11절은 이사 28,16을 13절은 요엘 3,5 인용구입니다. 
②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님께 적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첫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였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또한 구약과 신약 곧 두 계약의 연속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10,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19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이 텍스트의 질문 형식을 종합하면, 그들은 말씀을 들었는가?물론 들었다그들은 이해 했는가? 그렇지 않다. 메시지는 전달되었으나 거부 되었다. 11장에서도 다시 디아트리베 질문형식으로 시작한다. 나는 묻는다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셨는가?결코 그럴 리 없다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았고 선택은 마침내 그 목표에 도달했다그러나 그 밖의 사람들은 완고하게 되었다그래서 그들은 끝내 쓰러지고 말았는가?결코 그럴 리 없다 오히려 그들의 추락으로 이방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들이 모두 돌아오게 될 때에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 

10,21“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사야서의 이 인용구들은(이사 65,1-2) 다른 민족들도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특권에 동참한다는 사상을 도입하는데, 이 사상이 이제 11장에서 전개됩니다. 유다교의 주석에서도 이미 이 이사야서 본문이 다른 민족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11장 [하느님의 최종적 구원]
Israel will be saved as well
이스라엘의 남은자 
11,1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 입니다.”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11장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현재의 상황은 구약성경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배척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는 것은 일부 남은 자들(5절)로서 이들이 온 이스라엘백성의 대표가 되고(16절)  전체의 최종적 구원에 대한 보장이 됩니다(25-32절).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남은 자들이 이미 존재하였는데(2-4절) 이 서간이 쓰여지는 순간에도 바오로자신이 이 일부가 지속된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1,2-4는 1열왕 19,10-14를 인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아직도 바알 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남은 자 7000이 있었습니다.

11,5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6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사실 이스라엘도 일부 백성만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이, 이사악의 장자 에사오가 아니라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러나 열외의 사람들도 하느님의 계획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결국은 모든 것이 인류의 구원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들의 반역을, 그들의 참회를 그리고 순종하는 믿음의 의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할이었습니다. 
  
11,7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하고, 선택된 이들만 그것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9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식탁이 그들에게 올가미와 덫이 되고 걸림돌과 응보가 되게 하소서. 10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늘 굽어 있게 하소서.”’
시편 69,23-24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바오로가 식탁을 어떤 의미로 사용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종교의식이 물질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지적으로 바오로의 이 인용문은 유다의 종교행위를 전체적으로 단죄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의 구원을 위한 추락 
11,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①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그리스어 추락(파라프토마 paraptŏma. παραπτώμα) 이 단어는 올바로 서지를 못하는, 걸림, 실책, 범죄, 결핍, 실패 등으로 쓰입니다. 영어는 trespass(정도를벗어나다, 폐를끼치다), offence(반칙,범죄,도덕적인 죄), sin(종교상의 죄) 등으로 번역됩니다. 글자 그대로 의미는 옆으로 벗어나는 것, 잘못된 발걸음으로 추락하는 것 등입니다. 
②대립되는 언어 풍요(플레로마 plèrŏma, πλήρωμα)는 차고 넘침, 완전한 실현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추락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들 모두 구원되는 날 그 축복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비장한 각오로 쓴 이스라엘 문제의 결론으로 봅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 
11,13 “이제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4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15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①이 대상은 유다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믿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②이스라엘이 배척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는 큰 은혜가 세상에 베풀어졌다면 선택된 이 백성이 다시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때의 은혜는 그보다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의 삶은 이전의 삶이 죽음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세상종말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이 시사되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11,16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나머지 반죽도 거룩합니다.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거룩합니다.”
민수 15,19-21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것은 윤리적 거룩함이 아니라 봉헌됨으로써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련성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택과 계약입니다. 맏물은 뿌리처럼 성실한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11,17 “그런데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 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다면, 18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21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2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상적 인자하심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확신을 갖고 온갖 종류의 자만과 오만을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상황 역전 되었다면 언젠가 하느님께서 또 한차례 반전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 반대 상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코린토식 신앙은 구약은 역사일 뿐,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도 받아 놀라운 능력도 행할 수 있으니 유다의 사다리는 치워버리고 부활의 기쁨 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방종, 방만의 자유해석 신앙에 바오로사도는 경종(警鐘)을 울립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   
11,25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26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
주석성경은 이 표현의 정확한 뜻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대가 오리라고 바오로가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의 개념이 아니라 질의 개념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의 완전한 실현으로 알아듣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민족과 온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것은 시간상의 간격이기보다는 일종의 인과관계로 보입니다. 
26-27은 이사 59,20-21;27,9의 인용구입니다.
    
11,28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모든 이방인이 돌아오는 날, 이스라엘은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하느님의 놀라운 경륜을 깨닫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도의 결론입니다. 로마제국 하의 그리스도인들 유다계와 이방계 그리스도, 순수 유다교 등 갈등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하나인 민족이 이중 삼중으로 갈라진 셈입니다. 
②바오로는 이 분리와 결별 상태를 바라보면서 서로의 간격을 넘어서는 공존의 방법을 모색한 것입니다. 사도는 끝내 다양한 그룹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 시키고 연대감을 이끌어낸 일치 신학의 위대한 인물입니다. 어느 쪽도 과소평가 하지 않고 하느님 안으로 초대합니다. 사도는 이스라엘 자체를 자책하게 하였고,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는 원가지인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멸시하며 분열을 조장하지 않기 바라는 놀라운 권고입니다. 
③로마서의 핵심논쟁 이스라엘문제는 11,33-36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에 관한  찬미가로 대 논쟁을 마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에 대한 한스 큉(1928-2021,스위스 루체른)의 적절한 표현대로 
“그는 매우 탁월한 표현으로 자유롭게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열정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였고, 예수님 이후 세세 대대로 그리스도교계에 꺼지지 않는 활력을 주었으며 신학적으로도 완벽하게 예수님을 증언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뚜렷이 그리스도 자체를 표현하여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것이 되었다”. 
<로마서 ④ 9⎯1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