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② [1―5장] 교회의 시작
[사도행전 전반부]
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머리말 (1,1-5)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1,1-5)
①이 단락의 시작에서 말하는 ‘첫 번째 책’은 루카복음서를 가리킵니다.
②‘처음부터’ 다룬 예수님의 행적은 예수님의 사명수행 시작 이후, 구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를 뜻합니다.
③이 본문은 사도행전 전체의 핵심이 되는 구절로 예수님께서는 수난 후 즉, 부활과 승천사이의 40일이 경과하는 동안 줄곧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성령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현존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십일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승천의 순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간을 말할 것입니다.
④성서와 유다교의 전통에서 40일이라는 숫자는 자주 계시의 기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시나이산에서 모세의 40일 체류(탈출 24,18), 엘리야의 40일(1열왕 19,8), 에즈라의 40일(에즈 14,23-45). 특히 광야의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당신의 사명을 준비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왕국과 연관을 맺는 40일 동안 당신의 교회를 준비시킵니다.
⑤하느님나라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 설교의 주제이며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이 하는 설교의 주제가 됩니다.
⑥물의 세례도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이루면서 요한의 세례와 구분을 짓는 요인이 됩니다.
승천하시다 (1,6-11)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6-8)
①제자들이 이스라엘국가의 복원이 실현되리라고 믿었던 유다인들의 희망을 대변하며 묻는데 예수님의 대답이 사도행전의 함축적인 내용이 됩니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이 수행할 증언의 시간과 장소가 동시에 펼쳐집니다.
②예수님의 지상 활동을 주도하신 분이 성령이었듯이 이제 사도들의 사명을 주도할 성령은 사도들에게 직접 개입할 것이고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받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힘은 더러 사람들의 특이한 행동 - 예언, 치유, 신령한 언어 - 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례와 관련하여 성령을 받게 됩니다.
③증인-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 나가야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수행해야할 증언의 공간이며 사도행전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목격적 증인들, 그 선포는 참으로 대단한 파문이었습니다. 보통 순교자로 번역되는 영어의 martyr은 그리스어 증인, 증거로 사용하는 단어 마르투레스(μάρτυρες)에서 온 말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증거는 곧 순교(martirio)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④1,2의 ‘승천’의 직역은 ‘위로(=하늘로)들어올려지다’ 1,9의 ‘하늘로 오르시다’를 직역하면 ‘위로 들어올려지시다’로서 같은 의미이며 루카 24,51 하늘로 ‘올라가셨다 (아네페레토, ἀνεφέρετο)’의 직역은 ‘들어 올려지셨다’.
⑤사도행전에서는 승천을 부활 후에 일어난 예수님의 여러 발현의 끝맺음, 그리고 사도들의 사명수행의 출발점으로 제시합니다. 하늘로 오르는 가시적(可視的) 승천기는 루카복음서(24,50-53)와 사도행전에만 있는 것으로, 엘리야의 승천기(2열왕 2,1-18)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승천기로써 예수님시대를 종결합니다. 승천사건의 근본적인 실재성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 높여졌으며 주님으로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모습은 가시적인 증명을 수반합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 예수님은 비가시적인 존재가 됩니다.
⑥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구름은 성경에서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표징인 이 주제를 강조하게 할 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갔으며 또 다른 존재, 영적인 존재로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현존의 형태를 멈추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름에 싸여’는 신적 현현의 고전적 표현입니다.
⑦‘다시 오심’은 귀환의 의미보다는 항구적인 현존이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난 후 40일의 현현이 끝나고 당신의 영광으로 되돌아갈 결정적 순간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사람으로 오신 것 확실하다면 어느 날 영광의 모습으로 돌아가심도 확실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모습으로 제자들 곁에 계시지 않지만 교회의 삶 안에서 현존하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그들은 돌아와서 자신들의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⑧저자는 승천과 오순절을 의미 있게 다루는데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수난과 부활사건에 비해 중요성으로는 적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신약성경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승천과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승천(昇天)
유일하게 루카만이 승천에 관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결론으로 루카복음서 마지막에(루카 24,50-53), 다른 하나는 오순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사도행전의 서두 부분에 위치해있습니다(사도 1,1-14). 구약성경에서 승천하는 두 인물은 에녹(창세 5,24)과 엘리야(2열왕 2장), 일부 유다전통은 여기에 에즈라의 승천도 첨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스승의 영적상속자로서 이 몫을 청하는데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내가 떠나는 것을 본다면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고 엘리사는 하늘로 올라가는 엘리야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떠나는 것을 보고 성령을 받게 됩니다(2장).
◉주님승천대축일 (라틴 Sollemnitas in Ascensione Domini /영어 Solemnity of Ascension of Our Lord)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하늘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지상에서 예수님의 가시적 선교가 마감되고 영광스럽게 되신 인간성으로 천국에 다시 들어가 영원히 아버지 곁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사도들에 의해 목격되었는데(마르 16,19, 루카 14,51, 사도 1,9) 사도행전에 의하면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고(1,12) 부활 40일째 되는 날에(1,3) 승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 자체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서간편에서도 암시적인 부분이 보입니다(필리 4,8-10: 히브 4,14; 7,26; 8,1: 1베드 3,22; 1티모 3,16). 예수님께서는 성령 강림 대축일 때 성령을 보내시고 마지막 날 온 백성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이날 복음을 낭송한 뒤에 파스카 초의 불을 껐습니다. 현재는 세례성사와 장례 미사 때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기념하여 파스카 촛불을 켭니다.
승천의 주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야를 벗어 나셨으나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시작이요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물리적으로는 우리 곁을 떠나셨으나 영적으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표지들, 곧 봉사자들과 회중, 말씀과 특히 성체성사(그분의 실재적 현존으로)에서 현존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가톨릭대사전;가톨릭용어사전;전례사전 참조)
2.예루살렘교회의 시작 (1,12-26)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1,12-14)
①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때 신도는 120명으로 이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모태입니다. 저자는 이 기도모임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했음을 전해줍니다. 주님의 형제들은 특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을 때에 통상적으로 쓰이는 명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②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스승을 배반한 유다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는 11인이 되었는데 그 자리를 마티아가 채웁니다(1,15-26).
◉사도 마티아 (Matthias; Ματθίαν)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가리옷 유다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는 11인이 되었는데 그 자리를 마티아가 채웁니다(사도 1,15-26).열둘이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새롭지만, 아브라함과 선조들에게 약속된 12지파의 상속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티아는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 동행한 이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도들과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할 사람입니다(사도 1,21-22). 이러한 마티아의 천거 이유는 예수님의 생애동안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함께하는 것이며 열두사도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들이 수행하는 첫째 사명에 동참하는(1,8) 전제조건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사도’ 라는 칭호의 정의처럼 보입니다. 또한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필요했던 누가 사도인가?에 대한 답이됩니다.
③사도의 그리스말 아포스토로스(ἀποστόλους)는 ‘보냄을 받은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아포스토로스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이 말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티아의 유다주의자들은 바오로의 권위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바오로의 교리 일체를 거짓교리로 선동하고,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아포스토로스 사도가 아닌 바오로의 가르침은 헛되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의 구원이라는 복음을 외면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서 1장과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명 수행의 원천이시며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심을 상기시키면서 또한 자신의 사도권과 메시지가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입증합니다.
④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베드로의 주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도들의 행동을 주도하는 첫 번째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그의 위치와 역할을 재인식 하게 됩니다.
3.성령 강림 (2,1-13)
1) 성령강림의 현상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2,1)
①이 집은 1,13의 120명이 모여 기도하던집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처음 매 맞고 풀려난 후, 또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찾아간 집은 마르코의 집인데 같은 집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마르코는 마르코복음에서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겉옷을 빼앗기고 알몸으로 도망친 젊은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2,41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움직인 삼천 명가량이 세례를 받는 것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②오순절은 파스카축제가 지나고 오십 일째 되는 날로서 본디 밀 수확을 끝내고 하느님께 맏물을 바치는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탈출 23,16; 34,22; 레위 23,15-21; 신명 16,9-12). 신약성서시대부터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은 것, 곧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것을 경축하는 축제가 되기도 합니다. 즉 계약 갱신 축제입니다. 이 축제를 기해 많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강림의 무대가 되며 이 성령강림은 일종의 언어폭발로 드러납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설교가 나자렛에서 시작합니다(루카 4,16-30). 여기에서는 사도들의 설교가 예루살렘을 출발점으로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2-4)
①오순절의 이러한 사건은 유다전통이 기술한 시나이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계약을 받기 전에 시나이산 밑에 모여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탈출 19,16-18...‘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 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민수 11,25-27 ‘그때에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그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1사무 10,6 ‘그때 주님의 영이 당신에게 들이닥쳐, 당신도 그들과 함께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면서 딴사람으로 바뀔 것이오.’
②사도들 외에도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이 이 오순절 때의 사도들처럼 말을 합니다(10,46;19,6;1코린 12―14). 아무튼 사도들은 독특한 열광의 상태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 언어로 말함’은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말로 알아듣는 것으로서, 사도행전의 저자에게는 이것이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의 주된 모습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이렇게 바벨탑에서 깨어진(창세 11,1-9) 언어의 혼란을 복구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③시나이산에서의 하느님의 음성은 산 위,구름에 가려, 타오르는 불과 우렛소리와 함께 산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떨고 있었지만(탈출 19,16;20,18) 바로 이곳에서는 하느님의 음성이 사람들의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도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보편적 차원을 미리 보여줍니다. 아무튼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새로운 백성에게 생명을 주고 새로운 계약 안에 결정적으로 이 백성을 자리하도록 하기 위해 사로잡으십니다.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그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그러나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2,6-13)
2,9-10에 열거된 지방의 이름들은 대충 유다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당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 전체를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여기와 6,5에 나오는 ‘유다교로 개종한 이’는 유다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선택된 민족에 들어간 이들을 가리킵니다.
2)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기도하였고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 첫 번째 공동체-교회-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이끄는 근본적 원동력은 바로 약속 되어진 그 성령의 능력이며, 따라서 성령 강림의 사건은 사도행전 전체를 이끄는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해지게 될 광대한 사건을 미리 준비하고 있으며, 그 사건의 주체가 바로 하느님의 새 백성, 그리고 그 백성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영, 즉 성령임을 저자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언어들의 의미
①2,4의 ‘다른 언어들’은 ‘이떼로 글로쏘레리아 hetero glossolalia’가 아니라 ‘제노레리아 xenolalia(외국어)’, 즉 자신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령께서 가르쳐 주는 대로 외국어로 말한 것으로 봅니다.
②사도행전 8장부터 복음은 유다를 떠나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장면이 묘사되며(8,26-40), 사도행전 9장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바오로의 회심사건이 소개됩니다. 저자는 사도행전의 커다란 하느님의 프로그램을 염두에 두고 2,1-13을 그를 위한 서곡처럼 준비하며, 단순한 ‘glossolalia’(방언,이언-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가 아니라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xenolalia’(외국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을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이해한다)의 사건이 성령 강림 사건의 중심에 있다고 보도하는 것입니다. ③성령 강림 사건은 새로운 계약의 시작, 즉 하느님과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가 맺는 계약의 시작이며, 뒤집어 말한다면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수용할 주체인 ‘교회’(ecclesia)가 비로소 성립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4) 교회 창립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에서(창세 11,1-9) 설화적 기능을 뛰어넘는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깨진 바벨탑 사건과의 연관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새로운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열림을 통해 새 창조가 시작됨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를 여는 힘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그의 코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셨듯이, 불같은 혀들이 갈라져 그들 위에 내려앉을 때에 하느님의 새 백성은 새롭게 태어남을 체험하였고 세상으로 퍼져나가 하느님나라를 완성으로 이끌기 위한 그리스도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고 야망의 탑을 쌓던 바벨탑의 사람들은 본래 하나의 언어였는데, 같은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사로 다른 언어를 서로 알아듣는 영적일치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 (聖靈降臨, Pentecostes, Pentecost)
예수님부활 후 제50일에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강림한 사건으로 사도행전 2장 1절-41절에 근거합니다. 이는 구약성경과 유다교의 종말론적 기대를 성취시킨 사건이며 구원적, 메시아적 사건이자 교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기대는 성령강림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자 '죄의 용서'(사도 2,38; 5,31; 10,43)와 '성령의 선물'(사도 2,38; 1,5; 2,4; 4,31)을 받는 등 메시아적 축복을 통하여 구원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결과였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 (Dominica Pentecostes, Solemnity of Pentecost)
성령강림대축일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이동 축일입니다(사도 2, 1-13).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Pentecost는 50일째 날을 뜻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순절(五旬節) 축제를 말합니다. 이 축제는 추수절 또는 맥추절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날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실을 되새기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은 유다인들의 종교적 3대 축제일⑴파스카축제(유월절,踰越節,過越節) ⑵오순절(五旬節) ⑶초막절(草幕節)의 하나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일 만에 지내기로 되어 있었으며 후에는 시나이산의 사건과 연관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탈출 19)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냈습니다. 이러한 오순절 날에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나, 주님부활대축일이 구약의 유월절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듯 성령강림 축일도 구약의 오순절과 깊은 관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요한 14, 26; 루카 24, 49 참조), 부활주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으며, 베드로는 성령 강림의 징표를 확인하였습니다(사도 2, 15 참조). 성령강림 이후 공동체의 내적 생명이 쇄신되고 베드로의 설교와 더불어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이날은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날은 예수성탄 대축일과 부활 대축일과 함께 구세사의 절정을 이루는 날로서, 이 축일은 전야 미사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일 미사에는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령에 관한 구절을 발췌하여 만든 '성령 송가'를 비롯하여 독서와 복음, 미사경문을 통하여 성령에 대한 신학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4.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2, 14-42)
1) 선포 kerygma
①베드로의 오순절설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됩니다. 베드로의 이 강론은 사도들이 유다인들에게 하는 설교의 기본구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특정 사건을 선포하는 일도 포함되는데 이는 베드로가 한 다른 설교(3,13-16;4,10-12;5,30-32;10,36-43),그리고 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한 설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13,17-41). 곧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신 일입니다. 여기에다 예수님 생전의 사명수행이나 그분의 재림이 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선포되는 일들은 옛 계약을 잇는 것으로 제시되고 주님과 메시아로 등극하신 예수님에게서 실현되는 예언들을 성취하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즉,
❶예수님의 수난➜❷예수님의 부활➜❸예수님의 다시 오심➜❹옛 계약의 성취.
②하느님의 구원계획 전체를 보여주는 베드로의 설교는
❶회개➜ ❷세례➜ ❸용서➜ ❹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로 맺습니다.
③이 설교에서 성령강림의 현상이 언어폭발로 드러난 표징을 베드로는 요엘서의 옛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그날에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그 크고 찬란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어둠으로, 달은 피로 바뀌리라.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17-21: 요엘 3,1-5)
④하느님의 계획 2,22-23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2,22-23)
사도행전에 따르면 구원의 역사는 ‘계획’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21,14;22,14)확정되고 그분의 손에 의해 실현되는(4,28.30;11,21) 계획에 따라 전개됩니다. 하느님의 예지(豫知)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고되는 구약성서에서 이미 시작된 이 계획의 실현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기에 따라(1,7)예수님께서 오심과 더불어 결정적인 단계에 들어섭니다. 사람들의 어떠한 반대도 어떠한 몰이해도 필연적인 이 실현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3,21).하느님의 이 계획을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첫째 의무로서(20,27),이들은 자기들의 설교에서 이 계획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상기시키게 됩니다.
2) 설교의 마지막 선언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지만 그 자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2,33-36)
①34-35는 시편110의 인용입니다. 시편 110,1 칠십인역의 ‘주님’은 ‘퀴리오스Κύριος ’입니다. 그러나 히브리말시편에서 첫째 주님은 ‘하느님’이고 둘째 주님은 아도나이 ‘주인’입니다.
②이 시편은 공관복음에도 인용이 되어있습니다(마르 12,35-37 ; 루카 20,41-44; 마태 22,41-44). 이 일화를 듣는 대상은 복음서마다 다릅니다. ⒜마태오복음은 바리사이들에게(마태 22,41-46), ⒝마르코복음은 불특정 다수의 청중들에게(마르 12,35-37), ⒞루카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관하여 사두가이들에게 하신 말씀에 동의하여 찾아온 율법학자들입니다.
③공관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에 얽매이지 않고 다윗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우위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다윗의 후손’과 ‘다윗의 주님’은 둘 다 유효한 말이면서 다른 차원과 관련됩니다. 즉 ‘다윗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성의) 차원에서, ‘다윗의 주님’은 미래에, 부활후의 그리스도와 관련됩니다(로마 1,3 참조).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인정하시면서도 이 칭호를 피하시는 것은 유다인들의 다윗가문 출신 메시아사상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으로 봅니다. 루카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다윗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의 잉태임이 강조됩니다.
④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들어올리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시편 110에 나오는 당신 오른쪽의 주님으로 즉위시키십니다. 그리고 2,25-28의 인용된 시편 16,8-11;132가 이야기하는 메시아로 등극시키십니다. 하느님 계획의 이러한 결말을 선포함으로써 사도들의 설교는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에서 예고된 메시아(그리스도 Χριστὸς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그리스어이며 히브리어는 ‘메시아’)이십니다. 주님(Κύριος)이라는 칭호도 메시아적인 뜻을 지닙니다. 시편 110,1에 나오는 ‘나의 주님’ 역시 메시아 임금입니다.
3) 설교의 결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2,37-41)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집니다 (8,16;10,48;19,5;22,16).이러한 표현은 세례를 받는 이가 그 ‘이름’ 곧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는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들에게, 이어서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사도들이 수행하게 되는 선교의 도식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세례의 범위와 성령과의 연관은 아주 다양합니다.
▶여기에서는 세례→성령, 10장 코르넬리우스 집에 모인사람들은 성령→세례입니다.
① 세례에 관한 언급 없음 - 4,4
②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이 세례가 이루어지기위해서는 권위를 가진 사람의 안수에 의해 채워져야 한다 - 8,14;19,2
③반대로 다른 경우 세례의식은 성령을 받기에 충분하다 -2,38
④또 성령의 충만은 세례를 선행하며 이 세례는 마치 지금의 견진성사와 같이 베풀어지기에 이른다 - 10,44
⑤그러므로 세례와 견진의 실질적인 형성이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교회의 실천이 처음부터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저자는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에까지 완전히 다르게 실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증언은 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잡성을 잘 고려하고 있습니다.
(세례의 범위와 성령과의 연관;Etienne Charpentier Une lecture des Actes des Apotres. p72)
초대교회는 성령의 인도 없이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고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고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에 충만 해서 살았습니다. 숨 막히는 박해의 공포 앞에서 보여준 의연함도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에 그들 평생 처음으로 가슴의 맨 밑바닥을 내려치는 벅찬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의혹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성령의 체험이었습니다. 아무튼 삼천명 가량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언어폭발의 현상을 보고 포도주에 취했다고 비웃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언어폭발 장면에서는 마음에 감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왔다고 했습니다.
5.첫 신자들의 공동체의 생활 요약
전반부에 예루살렘 신자공동체 생활 요약 부분이 세 번 나오는데 ❶2,42-47 ❷4,32-37 ❸5,12-16입니다. 이 세 요약은 공통된 요소들과 구조의 유사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세 요약을 함께 다룹니다. 이 생활의 주를 이루는 요소는 ⒜기도, ⒝사도들의 가르침, 그리고 ⒞형제적인 나눔입니다. 이러한 요소들 안에서 각 요약에서는 문맥과 관련하여 한 가지 주제가 강조됩니다.
1) 공동체생활에 관한 첫 번째 요약- ‘기도’ (2,42-47)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2,42-47)
①첫 번째 요약에서 말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아마도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전례까지 포함되는 ⒝친교는 공동체 생활에서 첫째가는 두 구성요소입니다. 이 전례에는 성찬례와 기도가 내포됩니다.
❶신자공동체의 일치 ❷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킴 ❸재산의 공동 소유 ❹성찬례의 거행 ❺온 백성에게 호감을 받음.
②‘신자들’은 그리스말에서 ‘믿다’동사의 현재분사형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된 것입니다.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는 이 명칭의 사용은 사도행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첫 공동체를 특징짓는 일치와 화합, 형제적 친교,재물의 공동소유 등을 즐겨 강조할 뿐 아니라 이상적으로 그리기까지 합니다.
③재산의 공동소유에 관하여는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집,저집으로 기도하러 다니는 것을 보면 에세네파 사람들처럼 재산을 모두 처분한 것 같지는 않아보입니다. 재산전부를 처분한 사람도 있지만 모두 함께 모여 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재물을 나누어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핵심일 것입니다.
2) 공동체생활에 관한 두 번째 요약-‘나눔’ 4,32-37
❶재산과 재물의 공동 소유 ❷사도들의 기적과 신자들이 받는 은총❸바르나바의 소개
❹공동체에서 단죄되는 첫 번째 사건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일화
①두 번째 요약의 핵심주제는 재산과 재물의 공동소유입니다. 이 공동소유는 쿰란공동체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예외없이 실행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고 저자는 분명히 몇몇 넉넉하게 가진자들(예를 들어 바르나바의 경우처럼)에게서 볼 수 있는 너그러움을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에게 적용하면서 거기서 하나의 표본이면서 그리스도공동체가 항상 본받을 수 있는 이상형을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다만 사도행전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34절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유일한 이상형은 가난이 아니라 사랑의 이상형입니다. 4,32에 의하면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었기 때문에 넉넉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재산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 나눔은 이상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입니다.
②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단죄 [5,1-11]
초대교회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 재산헌납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습니다. 성령의 활동이 불길 같던 상황에 왜 이 일화를 저자는 소개하는 것일까? 본래 자기 재산을 자유로 처분한 이 부부의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 사건은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교회안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구체적인 교회이며 이상의 실현을 향하여 전개되지만 항상 죄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재산과 관련된 거짓말이 ‘쿰란규정’에서 금하는 첫째가는 죄입니다. 재산공유에 동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자유였습니다. 진실은 그리스도교의 생명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죄에 무력해지지 않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부부의 단죄를 온 교회가 두려워하였다(5,11)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자의 핵심입니다. 누구도 교회의 성장을 멈추게 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는 의문시 되는 대목이기는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눔 공동체의 초기 상태에 대한 일종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반에 모범적인 바르나바가 소개되고 그 후에 이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이야기가 등장한 초기공동체의 노력과 전후의 상황과 전개를 보면서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③교회라는 용어가 사도행전에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단죄 사건에서 처음으로 나오는데, 이 용어는 앞으로 특정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신자들의 모임, 어떤 지역에 구성된 신도의 집단, 그리고 작은 공동체들의 총체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리스 말에서는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 (ecclesia/ἐκκλησία)가 시민들의 토론 모임을 의미하고, 구약성서에서는 특히 사막에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모임’에 ‘카할’을 사용 하였고 카할을 번역한 말이 ‘에클레시아’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예루살렘의 첫 제자 또는 신자집단을 사도들의 증언으로 탄생하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하며 성령에 의해 힘을 받는 공동체로 특징을 지은 다음에야 비로소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용서에 대한 복음적 자세뿐 아니라 베드로의 자세와도 모순이 되기 때문에 의문시되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목적은 공동체를 수호하려는 초기공동체의 노력일 것입니다. 재산공유에 동참하는 것은 처음부터 각자의 자유였는데 이 부부는 자신들의 소유를 얼마간 남기고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공동체를 속입니다. 진실은 그리스도교의 생명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죄에 무력해지지 않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부부의 단죄를 온 교회가 두려워하였다’고 사도행전은 말합니다. 그것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도행전의 핵심입니다. 누구도 교회의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단원의 끝에 부록으로 정리되어있습니다.
3) 공동체생활에 관한 세 번째 요약-‘사도들의 기적’ (5,12-16)
❶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킴 ❷한마음으로 모여기도 ❸백성들의 존경을 받음 ❹치유사건
5,12-16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요약입니다. 사도들의 기적에 관한 상세내용은 베드로와 사도들의 행적에서 언급됩니다.
6.베드로와 사도들의 행적 요약 [3장⎯4,31]
3장⎯4,31까지는 문학적으로 한 단락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이 단락은
❶기적이야기 (3,1-10)➜❷그 기적의 의미를 밝히는 설교(3,11-26)➜❸베드로와 요한의 체포와 재판(4,1-23)➜❹공동체의 기도(4,23-30)➜❺그에 따른 성령의 내림과 설교의 재개 (4,31)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전하는 기적들의 수가 많은 것에 놀랍니다. 이것은 경이로움으로 뒤덮여있습니다. 기적들은 교회가 말씀만이 아니라 또한 행동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그 역사성에 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그럼으로써 오늘날 교회인 우리가 우리와 함께 사는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보이는 표징’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자문해야하는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불구자를 고치다 (3,1-10)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3,6)
①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하러 성전으로 갔을 때의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으로 나올 때 베드로는 항상 서두에 기술되며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유다인들에게 정해진 기도시간은 이른 아침, 오후세시, 그리고 해질 무렵 세 번입니다.
②이 치유는 사도행전의 첫 기적사건입니다. 이밖에도 다른 표징과 이적들이 사도들의 설교 후에 일어나는데 이러한 표징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표징을 통하여 선교사들의 신원과 그들의 설교를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③사도들의 기적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놀람을 자아내고 이에 기적의 의미를 밝히는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집니다(3,11-26).이 설교에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부활하신 분 자신을 뜻하는 ‘이름’과 ‘이름’에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5,41;21,13) 신자들은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2,38), 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이름’의 배경을 이루는 이러한 신학은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서 매우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름에 관한 믿음은 바로 이 기적을 가능하게 해주신 예수님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④믿음이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 단락에서 불구자의 믿음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5절‘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에서 그의 믿음이 내포되어있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나자렛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믿음이 그를 구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다 (4,1-22)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4,1-2)
서로 서로 느슨하게 연계된 바리사이와는 달리 사두가이들은 파(派)를 형성한 사제 계열로서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특수하고 특권적인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친정부(親政府) 세력인 사두가이들은 어떤 소요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민중의 동요를 염려하여 사도들을 수감하는데 수감 이유는 부활 선포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처단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요원의 불길로 다시 일어납니다. 참으로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 (The Sadducees; Σαδδουκαῖοι)
사두가이파는 고위 제관들과 귀족계급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에 있었던 유다교의 한 종파입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의 삶의 또 다른 구심점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성전을 세상의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종말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곳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유다인 성인 남자는 모두 성전 유지를 위하여 해마다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제의(祭儀)와 전례의 기능은 아론 집안의 후손 가운데에서 뽑힌 사제들이 수행하며 레위인들이 그들을 보조합니다. 사제들은 대사제의 권위 아래 엄격히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인들의 민사와 종교 문제를 다루는 최고의회의 의장직도 맡았습니다. 그들은 솔로몬 시대 제사장 차독의 후예이며 보수적 현실주의적인 상류 계급으로서(1열왕 2, 35참조) 셀레우코스왕조 시대에 헬레니즘에 동화되었던 계층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인데 토라의 권위만 인정하고 율법학자들이 발전시킨 구전 전승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사후의 상선벌악, 마귀, 천사, 묵시문학적 사고 등 새로운 개념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성전례와 율법 가운데서도 제물 봉헌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기위해 융통성 있게 대처했으므로 세속의 통치자들에게도 기꺼이 협력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뒤엎는 질서 교란을 가장 두려워하였고 로마 제국의 통치일지라도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질서가 유지되어야 자기들의 녹봉(祿俸)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간주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에 의하여 자기들의 권위가 강력히 부인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그들이 생각할 때 유다인의 나아갈 길이란 모세오경의 율법에 따라 성직자들이 다스리는 제의 공동체를 변함없이 유지해 나가는 것 뿐 이었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자, 전적으로 성전에 종속되었던 사두가이들도 자연히 몰락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공적 유다교는 오로지 바리사이적 경향으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4,7)
이제 예수님의 이름이 논쟁의 중심에 서게됩니다. ‘이름’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결국 ‘그’, ‘그분’을 뜻하는 지시대명사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 홀로 구원자이십니다. 구약성서에서 예고되고 예시된 구원이 장차 15장에서 전개되는 위기의 핵심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신앙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는 사도들의 설교로 선포됩니다.
15,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모세의 전통이 구원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위기로부터 예루살렘사도회의가 시작되고 교회는 성령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맞는 답을 얻게 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4,12-1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태도를 보고 놀랍니다. ‘담대함’은 자신감, 확신 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까지 의미하는 이 명사사가(또는 관련된 동사도 함께)사도행전의 전체에서 증언자들의 특징을 이룹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름, 그리고 설교와 함께 일어나는 표징과 이적을 통하여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주님에게 바탕을 둔 이 담대성은 믿음의 한 면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전과 후에 그분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이 증인으로서 잠자코 있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활하시어 구원자가 되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4,13-22에서 최고의회는 명백한 표징이 있으니 달리 방법 없었으므로 대책을 논의한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한 후 풀어줍니다.
◉최고의회
최고의회의 그리스 말은 쉬네드리온 συνέδριον, 아람 말 산헤드린Sanhedrin입니다. 그리스어 쉬네드리온이라는 말은 ‘대여섯 명이 모여 토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있습니다. 훗날 이말은 ‘의회’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고 유다인들도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예루살렘 중앙의회는 사제와 평신도(바리사이,율법학자) 71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방에도 23명 정도의 의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헤드린의 임원 71명은 모세를 보좌했던 ‘칠십 명의 원로’(탈출 24,1)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순수 이스라엘 혈통에 도덕적 흠이 없어야했고 율법과 언어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속한 지역의 재판관도 겸했고 종신직이었습니다. 이렇듯 산헤드린은 팔레스티나뿐 아니라 유다인이 정착한 곳이면 어디서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산헤드린의 주요 업무는 할라카(Halakha) 곧 유다인의 ‘일상 법’을 공표하는 일이었고 대사제의 임명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성전 예절에 관한 것은 모두 집전할 수 있었지만 속죄제(욤 키푸르)만은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사제는 대사제입니다. 산헤드린의 판결은 벌금형이 주를 이뤘고 가끔은 실형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에는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 실형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최고의회’에 끌려 가셨고 사도들 역시 그곳에서 신문을 받았습니다.
3) 다시 최고의회에 선 베드로; 가말리엘의 충고 (5,17-42)
4,28‘최고의회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자신들이 겪은 일과 최고의회가 한 말을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29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①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금령을 공공연히 무시하자 대사제와 사두가이들은 사도들을 다시 체포하여 공영 감옥에 가두는데 이 감옥은 4,3에서보다 더 엄한 감금 형태를 말할 것입니다. 다시 최고의회에 선 베드로는 5,29-32에서 다시 한 번 핵심적인 선포를 하는데 이 구절은 2,14-42 베드로의 오순절설교에서와 같이 사도들이 하는 설교의 짧은 요약이며, 이 설교들은 회개와 용서를 알리고 있습니다.
②사도들의 신분은 물론, 임명된 보조자들도 장인출신입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유다 지도층의 당혹감은 실로 컸습니다. 신학적 지식이 없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은 수준에 놓고 교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의 제자인 타르소 출신 바오로는 이 새로운 종파의 태동을 위험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③사도들은 ‘그 이름’때문에 받는 모욕을, 모욕 받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합니다(5,41).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그분의 참 제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되었음을 알고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되어 그분을 선포하고 그리스도 자신이 되어 수난을 받고 그리스도 자신이 되었으므로,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불안, 두려움, 회의, 죄책감 모든 것을 넘어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통찰 안에, 성령의 능력은 전적으로 드러나고 과거로부터 벗어난 제자들은 상처 받은 자들을 치유하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체험, 즉 고통 중의 기쁨을 깨닫는 것은 치유를 청하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부록 附錄]
교회 (敎會; 라틴어 Ecclesia; 그리스어 ἐκκλησίᾳ;영어 curch)
1.교회,그리스도의 나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교회 헌장은 ‘교회는“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교회를 정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라를 위하여 양 떼를 모으시고 그들의 목자가 되셨으며 새로운‘행동 양식’ 과 고유한 기도도 가르쳐 주셨습니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장 3항, 5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764항 참조).
마태오 복음서 5장 20-48절에서 장중하게 울리는 예수님의 음성은 “너희는 이렇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의 여섯 가지 반대명제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교회헌장에서 말하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행동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 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말은 완성하다,채우다,이루다 라는 뜻을 가진 플레로(πληρῶ)의 미래완료형 플레로싸 πληρῶσαι 입니다. 곧, 채워서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으므로, 교회로 불러 모으신 양떼 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의 가까이 온 나라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가까이 온 나라입니다(마르 1,15 참조). 구약시대에도 ‘주님의 왕국’, ‘주님의 다스림’이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구약성경의 하느님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사고는 구원의 개념이 하느님의 호의에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인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따르는 길입니다. 교회헌장이 천명(闡明)한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교회,그리스도의 성사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 (교회 헌장, 1항).
거룩하시며 또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인성이 이루신 구원의 업적은 교회의 성사들 안에서 드러나고 작용하는 구원의 성사입니다. 일곱 가지 성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펼치시는 표지이며 도구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간직하고 이를 나눕니다. 비록 교회가 도구이기는 하지만 은총을 간직하고 나눈다는 유비적(類比的)인 의미에서 교회를‘성사’ 라고 부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74항).
인간과 하느님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성사가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문제가 21세기의 현대인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격적 만남이 더는 불가능 했다면,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인격적 만남이 가능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선포는 사실 이천 년 전 하나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고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의 매우 인상적인 인물에 그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사의 근원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만납니다. 이 교회는 마태오 복음 28장20절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그리스도를 모신 교회이며, 그분의 사랑과 말씀과 은총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성사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당신께서 성령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교회와 성사를 생각할 수 없고, 교회 없이 그리스도와 성사를 대면할 수 없으며, 성사 없이 그리스도, 나아가 교회와 일치할 수 없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말씀 하실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순간에 자신이 박해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강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 곧 교회 안에 그리스도는 현존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교회를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사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은 볼 수 없는 은총을 보이는 표징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교회 안의 모든 전례는 따라서 성사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힘인 은총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성사의 표지로써 은총을 예시하며 실재로 은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은혜와 더불어 불가피하게 아픔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또한 교회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는 유일한 장소이기도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진리를 알도록 도와주며, 이끌어주고, 심화시켜 줍니다. 교회 안의 전례와 성사 안에서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키워 주십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많은 성인들이 이 교회 안에서 성장하였고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대한 영적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3.교회의 이름과 표상
인간은 그 속성상 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개인의 이상이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이 그 공동체와 맞지 않을 때 실망과 긴장감을 경험하면서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독립하려는 열망 또한 지닙니다. 교회는 이러한 소속하려는 열망과 독립하려는 양면성을 가진 인간의 욕구를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바람직한 공동체일 것입니다. 교의헌장 ‘교회의 신비’ 1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므로,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유대로 더욱 가까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여야 할 교회의 이러한 직무는 현대의 상황에서 한층 더 절박해지고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장, 교회의 신비 1항)
1) 교회의 이름(敎會; 라틴어 Ecclesia; 그리스어 ἐκκλησίᾳ;영어 curch)
‘교회’에 해당하는 그리스말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ᾳ)’는 시민들의 토론 모임,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정치 집회, 일반 국민들의 운집 등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백성의 집회(‘주님의 회중’신명 23,2; ‘주님의 회중’1역대 28,8;‘하느님의 회중’;느헤 13,1)를 가리키는데 칠십인 역(70人譯; LXX;Septuaginta)이 ‘에클레시아’로 번역하였습니다. 교회 또는 공동체모임, 집회, 회중을 뜻하는 히브리 말 ‘카할’(qahal; 聖會)을 번역한 말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식을 처음 가진 곳이 시나이 산이었는데 이 첫 집회를 ‘카할’ 이라고 하였습니다. 집회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히브리 단어로 ‘소드’와 ‘에다’가 있는데 유다광야에서 은거하며 살았던 쿰란공동체는 이 두 낱말로 하느님의 선민(選民)인 자신들을 지칭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단어가 대중라틴말성서에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틴어 Ecclesia)’’라는 의미로 도입되면서 그리스도교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는 스스로를‘교회’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그 집회의 계승자임을 자처합니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볼 때‘교회’는 다음의 세 가지를 의미 모두 포함 합니다.
❶전례적 집회(1코린 11,18; 14,19.28.34-35 참조),
❷지역 신자 공동체(1코린 1,2; 16,1 참조),
❸온 세계 신자 공동체 전체(1코린 15,9; 갈라 1,13; 필리 3,6 참조).
이러한 세 가지의 의미는 서로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서 모으시는 백성으로서, 교회는 지역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전례의 거행, 특히 성체성사를 위한 전례적 모임으로 실현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로 살아,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52항 참조).
교회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이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실천적인 삶과 연관된 것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소명은 ‘하느님나라의 선포’이며 이 단어는 교회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 이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면서 예수님과 함께 지상의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 소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할 것을 자유 의지로 결정한 사람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에 복종할 것을 서약한 ‘하느님백성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일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면 이미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회중’(느헤 13,1)은 하느님께서 몸소 불러 모으신 공동체이며 베드로(πέτρος)라는 반석(πέτρᾳ)위에 세우시는 교회(ἐκκλησία)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베드로가 기초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저승의 세력도 교회 앞에서 무력할 것입니다(마태 16,18 참조).
2)교회의 상징
①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❶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 곧 새로운 창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머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이 ‘머리’에서 시작하여, 하느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팽창해 나아갑니다. 교회의 이러한 역동성은 ‘몸의 성장’으로 ‘하느님 집의 건설’이라는 표상에 이르게 됩니다.
❷‘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데 모으다’는 2세기의 교부 이레네오 이후 그리스도교신학의 중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리용(Lyons)의 주교 이레네오(Irenaeus)는 최초의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이자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 동(東),서(西)교회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는데 그는 이단에 대항함에 있어서 주교의 지위, 성경, 현존하는 신학적.종교적 전통 등 교회의 전통적 요소를 강조하는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❸하느님의 축복은 교회로부터 전 세계로 향합니다. 우리 몸은 각 부분이 공동체 안에서 자기구실을 다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영양분을 받아 자랍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사랑으로 완성해나갑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책임감은 머리와 몸처럼, 혼동되거나 따로 떨어질 위험 없이 둘 사이의 밀접함을 드러냅니다(가톨릭 교회교리서 753항 참조).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2-23;콜로 1,18).
에페소서에 의하면 세상의 화해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을 가르던 장벽을 없애는 것과 직결됩니다. 이민족들도 이제는 정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됩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어떤 이론이라든가 어떤 체제를 매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 그리고 이 공동체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이 공동체야말로 하느님의 ‘신비’를 명백히 드러내는 실체입니다. 에페소서에서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함’ 곧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있는 실체입니다.
②교회, 양 우리이며 문이신 그리스도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교회는 양 우리이며 그 유일하고 반드시 필요한 문(門)은 그리스도이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54항 참조). 문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는 통로입니다. 문은 거절되기도 하고 환영받기도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예수님은 문이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에 이르는 문을 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자아를 만나게 해 주는 문이시며, 하느님의 은혜를 나누어 받는 장소의 근원입니다. 이러한 ‘양 우리의 문’이라는 표상은 교회를 이해하는데 참으로 적절한 것입니다.
③교회, 하느님의 포도밭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며(1코린 3,9;마태 20,1-14;21,33-43 참조)포도나무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자주 심판의 경고를 듣습니다(이사 5,1-7; 예레 2,21 참조). 특별히 이사야예언서 5,1-7의 포도밭 노래는 응답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비탄이 잘 담겨있습니다.
요한복음서 15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이시며 그 가지들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요한 15,5 참조). 포도나무의 비유는 한 몸의 지체라는 바오로사도의 표현에 상응하며 한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받는 사랑의 일치가 그 핵심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입니다. 마땅히 가지는 자신의 나무에 머물러야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교회 헌장, 6항에 의하면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머무릅니다.
④교회, 하느님의 집
❶예수님께서는 집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되셨고 그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마태 21,42; 사도 4,11; 1베드 2,7; 시편 118[117],22), 그 기초 위에 교회는 사도들의 헌신에 의해 지어졌습니다(1코린 3,9-10 참조). ‘예수님’ 이라는 기초 덕분으로 교회는 견고한 결속력을 지닙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56항 참조).
❷교회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내 아버지의 집”(요한 14, 2 참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기희생적 죽음으로 ‘아버지의 집’의 문을 여십니다. 집은 편안한 곳, 평화가 보장되는 곳으로 우리가 잘 아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집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우리의 정신이 머무는 곳입니다. “너희를 위해 내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는 식의 이러한 표현에 대하여(요한 14,2-3 참조)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표현과 더불어 ‘내가있는 곳’은 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고 미래가 현재에 이미 와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과 통교의 실현을 교회가 가능하게 해줍니다.
❸‘아버지의 집’은 루카복음 15장 11-32의 저 유명한 비유에서 그가 돌아 가고자 했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몰락한 자신의 영혼을 되찾고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합니다. 책임을 지기에 너무나 무거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살 길을 찾고자 합니다.그러한 인식(認識)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명(命)에 따라 양들을 치고 보살피며, 길 잃은 양들이 아버지에게 향할 수 있도록 돕는 안전한 집입니다. 고난의 여정 길에 야곱은 다시 베텔로 갑니다. 에사우를 피해 고향을 떠날 때 처음 하느님을 만난 곳입니다. 다시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창세 35,1-11). 베텔은 곧,‘하느님의 집’입니다.
4.교회의 시작과 발전
1)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준비된 교회
①그리스도교 신자단체의 출현은 역사적 사실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경륜으로서 교회는 우주창조에서 부터 암시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준비되었으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설립되어 세상에서 완성되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비를 탐구하려면 삼위의 계획안에서 그 기원을 묵상하고, 역사 안에서 그 점진적인 실현을 묵상해야 합니다.
②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 안에서 생명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 ‘하느님의 가족’ 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점차로 형성되고 실현되어 갑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치가 죄로 파괴된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죄로 야기된 혼돈에 대한 하느님의 반작용이 바로 교회라는 불러 모음입니다.
③하느님의 선택으로 이스라엘은 장차 모든 민족을 모으는 징표가 될 것이지만(이사 2,2-5; 미카 4,1-4 참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겼음을 비난하고(호세 1장; 이사 1,2-4; 예레 2장 등 참조) “새 계약” 을 예고합니다(예레 31,31-34; 이사 55,3 참조). 이 새로운 계약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셨습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2장 9항;가톨릭 교회교리서 758-762항 참조).
2)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①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 교회의 신비 1항은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그리스도이시다”로 시작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성경에서의 빛과 어두움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의 죄성(罪性)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변화하려는 의향이 없는 상태가 어둠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장5절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 입니다.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지금도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 빛은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관통하는 빛이며, 영적 존재의 삶과 소유 본능의 삶을 관통하는 빛이며, 파스카의 빛이며, 가톨릭교회교리서 748항 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말고 다른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리스도의 자신인 빛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빛이 그리스도 자신인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비치고 있습니다.
②첫 제자들 이후 예수님께서는 많은 신앙인들을 부르십니다. 이들은 온갖 데에서부터 나와 그분을 따르며 십자가를 통하여 성부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그분을 빛 자체로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곁에서 누리는 참 생명으로 인도해주는 길을 밝히고 또 그 길을 걸어가게 해주는 빛 이십니다(요한 8,12 참조).
3)교회의 초석 12제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12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 (아포스토로스, ἀποστόλους)’라 부르셨습니다(마르 3,13-19;마태 10,1-4; 루카 6,12-16).예수님을 따르는 열두 제자와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는 권한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분의 운명에도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마르 10,39 참조). 스승을 배반한 유다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는 11인이 되었는데 그 자리를 마티아가 채웁니다(사도 1,15-26). 열둘이라는 숫자는 야곱의 아들 12지파에서 나온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과 선조들에게 약속된 12지파의 상속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며(마태 19,28)새 예루살렘의 초석(礎石)이 될 것입니다(묵시 21,14 참조).
4)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회; 교부들의 교회론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안에서 정립된 공동체이고, 그리스도께서 손수 모으신 하느님백성의 모임이라고 리옹의 이레네오는 말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에 관하여 몇몇 교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①리옹의 이레네오
교회론을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일치된 영역 안에서 전개합니다. “교회는 매일 매일 체험되는 실재이고, ‘말씀’의 계시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 업적과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세상의 회귀(回歸)에 앞서 주어진 현실이다. 또한 교회는 프네우마, 곧 영과 성부와 성자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안에서 정립된 공동체이고, 하느님 자체이신 성자께서 손수 모으신 하느님백성의 모임이다.”
②로마의 히폴리토
교회를 구원사의 범위 내에서 고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일치를 이루시고 강화하시는 성령의 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지으신 혼례복이다.”
③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교회의 구성원은 성령에 연관됨으로써 서로 간에는 물론이고 하느님과도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 속에 살기 위하여 교회에 선사하신 것이 성찬례이기 때문에, 만일 사람들이 성찬례를 통하여 성령에 연관된다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상호간에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④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교회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주이고, 유일한 양 우리이며, 그리스도의 유일한 양떼이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부이고, 유일한 비둘기이며, 어머니입니다. 또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백성입니다. 치프리아노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풍부하게 흐르는 영은 그 어떤 경계 안에도 가두어 넣어지지 않으며, 어떤 공간적인 지역 위에서 속박하는 울타리로 제한될 수도 없습니다. 영은 지속적으로 흐르고, 풍요롭게 흐르며, 우리 마음은 단지 목말라하고 열려져 있어야 하며, 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가 하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마음과 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⑤암브로시오
세례 받는 자는 ‘영의 날인’을 받습니다. 사도의 편지에서 읽듯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2코린 1,21-22;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말씀의 씨앗과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곧 그리스도교 백성을 낳습니다.
⑥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바오로를 따라 교회를 그 머리가 그리스도인 몸으로 규정합니다. 교회 자신은 ‘비둘기’라 불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이 불어 넣어진 존재로서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곧 교회 안에 있으면,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지극히 높으신 삼위일체 전체의 성전입니다.
⑦그레고리오 7세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를 위한 자유와 고유한 권리를 요구하였고, 이완된 교회규율을 다시 세우고 교회를 평신도들의 힘(정치적인 힘)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을 목표로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당연하게도 국가적인, 실로 군주국적인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교계제도, 특히 교황으로부터의 자주적이고 완전한 사회로 파악되는 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작업한 신학적 주제들은 계속해서 교회론에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에서의 교회는 계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성사들을 통해 하나가 된 신자들의 전체로서, 그리고 영이 불어넣어진 몸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⑧19세기와 20세기 초반
르네상스, 자유주의, 산업혁명 등에 이은 19세기의 정신적인 혁명은 교회를 자극하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권위라는 표지 안에서의 복구를 주장하는 전통주의와 교황지상주의가 그것인데, 이들 운동은 이미 뿌리를 내린 교황직을 새로이 견고하게 하고, 교황체제 군주국으로서의 교회를 전개코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발견된 중세기적이고 교부적인 신학이,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쇄신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⑨교회론 안에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가시적이고 제도적이며 직무적인 면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게 되었지만, 1943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관한 회칙;미스띠치 꼬르뽀리스,Mystici Corporis)’에서 교회를 순전히 법제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게 됩니다. 회칙은 하느님께서 인간 몸에 생명과 건강과 성장을 위한 자체의 수단을 주신 것처럼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당신 신비체를 위해 성사들을 주셨다고 지적하였습니다.
⑩서방신학의 교회론은 그 원천을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두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神중심적이고 성령론적인 교회론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5.교회의 특성
1)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
우리는 교회를 말할 때 ‘하나인 교회’ 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하느님나라에 모아들이는 하나인 목표를 가진 그 공동체를 우리는 하나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지향하는 교회는 거룩하며 이 교회는 보편성(普遍性)을 지닙니다. ‘보편적인’ 이라는 뜻의 ‘가톨릭’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보편성의 교회이기에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하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보편적 교회로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같은 신앙과 같은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이러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톨릭교회(Ecclesia catholica)’라고 표현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가톨릭교회가 있다’는 말에서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2)가시적이며 영적인 교회
우리는 오직 신앙의 눈으로만 교회의 가시적(可視的) 실재와 더불어 하느님의 생명을 지닌 영적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리와 은총을 널리 베푸십니다. 교회는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가시적인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3)인간과 하느님의 결합의 신비인 교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계획의 목적인 당신의 신비를 교회 안에서 완성하고 계시하십니다. 교회는 마치 신랑과 결합하듯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때문에(에페 5,25-27 참조) 이제 교회도 신비가 됩니다. “신비”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행됩니다(에페 3,9-10;콜로 1,25-27 참조).
4)일치를 이루는 성사로서의 교회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교회의 구성원은 성령에 연관됨으로써 서로 간에는 물론이고 하느님과도 하나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 속에 살기 위하여 교회에 선사하신 것이 성찬례이기 때문에, 만일 사람들이 성찬례를 통하여 성령에 연관된다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상호간에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하느님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성사가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6.교회와 성령
1)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①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나를 증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5,26 참조). 이 말씀은, 교회공동체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성령을 통해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회를 쇄신시키고 심화시킨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성자께 지상에서 이루시도록 맡기신 일이 성취된 다음,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되셨다...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 가까이 나아가며...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그리고 바로 성전인 신자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여 주신다...성령께서는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장 4항,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②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여 바라보던 때,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던 때, 배타적인 세상과 교회의 이원론(二元論)을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재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본 노선을 공의회는 성령론적 측면에서 요약하였습니다. 한처음 창조 때부터 활동하시며 이 세상 안에 충만하여 계시는 성령께서,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교회에 주어졌고 교회 내부에서 오늘도 구원 활동을 수행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교회가 세상에 대한 개방과 대화와 선교를 통해서 그 외연(外延)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③성령은 세상과 교회의 제도 안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친교의 일치를 가능하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일치는 교회 내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증진과 세상을 위한 봉사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전통을 통하여 교회는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연속성의 보증은 성령이십니다. 교회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언어를 가진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소명을 지니고 있으며 성령은 모든 것을 일치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④성령은 교회의 가시적 측면을 영적 차원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이루어내신 성령께서는 일치와 통합에 있어서도 그 근본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교회를 인도하고 거룩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도록 인도합니다. 성령에 의한 선교의 일치는 교회제도에 우선하는 것이며 교회의 조직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2)오순절의 성령강림
①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언어의 표징을 통하여(사도 2,1-13) 만방에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은 각 개인에게 내렸기 때문에 개인적인 관계로 머뭅니다. 이것은 성령과, 교회, 교회 안의 개인이라는 신비로운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성령은 이 새로운 백성에게 생명을 주고 완전히 사로잡으십니다. 이들은 오순절에 그들 평생 처음으로, 가슴의 맨 밑바닥을 내려치는 벅찬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의혹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성령의 체험 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슴 저 깊은 곳에 남아있는 마지막 의혹을 밀어내고 환희와 감동에 젖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②사도행전은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해 갔는지를 서술합니다. 이 교회를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약속 되어진 그 성령의 능력이십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새로운 계약의 시작, 즉 하느님과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가 맺는 계약의 시작이며,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수용할 주체인 ‘교회’가 비로소 성립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③성령의 강림은 바벨탑에서 깨어진(창세 11,1-9) 언어의 혼란을 복구하는 성령의 능력이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로 다른 언어를 서로 알아듣는 영적일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에게 입김을 불어넣으셨듯이, 불같은 혀들이 갈라져 그들 위에 내려앉을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새롭게 태어남을 체험하였고 이들이 세상으로 퍼져나가 하느님나라를 완성으로 이끌기 위한 그리스도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을 확신하였으며 자신들이 성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④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와 결합된 그 순간부터 성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넘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분은 성령이시며 우리가 성령을 만나야 하는 곳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입니다. 성령은 교회가 선사 받은 보배로운 은총이며 우리가 그토록 절실히 요청하는 영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인 교회 안에 성령과 함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실 것입니다(마태 28,19-20).
7.그리스도인의 소명(召命)
1)교회는 그리스도 현존의 표징인 공동체
초대(初代)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한 몸임을 깨달았습니다(갈라 3,26-28 참조). 이들의 친교는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증거 하는 형태로 시작되었고, 이웃에 대한 봉사 안에서 이웃으로 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자기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며 증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였으니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수난의 이유를 참으로 깨달은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교회의 목표들을 실행한다는 것이 각자에게 부단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현존의 표징인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지상 생활동안 하셨던 일을 계속 하시는 것이기에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보증하는 보이는 표징인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가져오는 도구입니다.
2)교회공동체를 위한 교훈
‘교회설교(Discourse on the church)’라는 소제목으로도 전해지는 마태오 복음 18장은 하느님 통치 하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를 권고하는 이른 바 ‘교회론적(敎會論的)’ 이라 불리는 장입니다.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한 구체적 조건이 무엇인지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마태 18,1-4 참조). 공동체를 위한 설교는 ‘누가 가장 큰가?’ 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전체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는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겸손의 덕(1-4);개인적인 야망과 이익을 양보하는 순수한 헌신과 봉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②책임감의 덕(5-7);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행위와 말, 생활습관 등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항상 의식하면서 스스로 책임을 의식해야합니다.
③자기희생의 덕(8-9);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장애가 되는 내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잘라내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④관심의 덕(12-14);하느님의 인간 개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그대로 작은 자를 향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⑤권면의 덕(15-18);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잘못에 대하여 敎正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터하지 않는 자의적인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⑥친교의 덕(19-20);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지양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공동의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⑦용서의 덕(23-25);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께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교회를 갈등과 긴장이 상존하는 공동체로 봅니다. 당시 공동체와 21세기의 공동체는 사실 너무나 흡사합니다. 바오로 서간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우리는 같은 문제를 지닌 공동체를 발견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하나의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구성원들 상호와 그들을 이끌어야하는 공동체의 책임자들에게 공동체의 나아갈 길을 또한 상기 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과, 봉사와 섬김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직, 그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거룩한 삶에 참여하는 사제직을 수행함으로써 교회의 사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전해야합니다.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각자는 자기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인의 숭고한 의무를 새삼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4장 34,35,36항 참조).
[이 내용은 <교회와 성사>에 관하여 2017년 작성한 원고입니다]
<사도행전② 1⎯5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