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전체내용>
1.주님의 기도(11,1-4)
2.끊임없이 간청하여라(11,5-8)
3.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11,9-13)
4.예수님과 베엘제불 (11,14-23)
5.되돌아오는 악령 (11,24-26)
6.참행복 (11,27-28)
7.요나의 표징 (11,29-32)
8.눈은 몸의 등불 (11,33-36)
9.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11,37—54)
주님의 기도 (The Lord's Prayer)서론(緖論)
①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치는 이 기도는 내용은 물론이고 형식에서도 유다인들이 오늘날에도 드리는 18개의 청원기도와 흡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그 단순성, 그리고 자유롭게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유다인들의 기도와 구분됩니다. 이 기도는 당신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해 주십사는 청원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승리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일련의 청원이 나옵니다. 주님의 기도의 복수 일인칭은 신앙인 개개인을 기도공동체로 한데 모으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②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사정에 따라서 서로 다른 청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청원의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로 늘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순서대로 청하기도 합니다.
③주님의 기도는 청원입니다. 그분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라는 전통적인 표현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 전해진 이 기도는 참으로 유일한 것으로서 ‘주님의’ 기도입니다.(②③의 내용은 가톨릭교회교리서 2763-2765: 2857-2865 참조)
④이 기도문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전승되는데 루카복음서의 것이 짧게 되어있습니다. 이 두 기도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다고 확실히 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해당공동체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조금씩 고친 흔적들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애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현재의 기도문과는 다른 형태를 이용하였으리라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문을 현대 언어로 옮기는 데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합니다. 현재의 그리스말 본문은 셈족말(히브리말,또는 아람말)로 된 원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어떤 표현들은 구약성경과 고대 유다교를 잘 알아야 올바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도 용어라든가 표현의 의미에 관하여 의견이 엇갈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문의 어떠한 번역도 완벽에 가깝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1.주님의 기도 (The Lord's Prayer) 11,1-4 (마태 6,9-13)
루카는 마태 6,5-15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내리신 가르침을 1-13절에 모아 놓았습니다. 곧 기도의 본보기인 ‘주님의 기도’(2-4절), 항구히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끈질기게 청하는 친구의 비유(5-8절), 그리고 온전한 신뢰심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라는 권면입니다(9-13절). 루카 복음서의 기도문은 마태오 복음서의 기도문보다 짧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11,1-2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는 계기를 전해주는데 마태오복음에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동기 및 도입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11,2)’고 이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매일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문을 통하여 아버지와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에 우리도 참여시키십니다.
11,1‘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2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Say this when you pray:
‘Father, may your name be held holy,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ach one who is in debt to us.
And do not put us to the test.’”
[주님의 기도 전반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①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아버지의 나라(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가 도래하도록 직접 개입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루카복음은 아버지(πάτερ)로 시작하고 마태오복음은 하늘에(우라노스 οὐρανος)계신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루카 22,42; 23,34.46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같은 식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유다교 문헌에서는 간혹 아버지(파떼르;πάτερ)라는 칭호가 발견되지만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아람어형식의 아빠,아버지(Ἀββᾶ ὁ πατήρ)는 명백하게 마르 14,36에서 전승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호격으로서의 πάτερ는 마태 11,25.26; 루카 10,21에서 나타나며 아빠,아버지 는 로마 8,15; 갈라 4,6에서 보듯이 성령의 감화로 이와 같은 호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들에 나오는 πάτερ의 배후에 언제나 Ἀββᾶ 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예수님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아빠,아버지의 전적인 참신함과 유일무이함은 이 호칭이 하느님에 대한 관계의 중요성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하늘에 계신(저희/너희/내)아버지’라는 말이 루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에게서 직접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마태 23,9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고 되어있는데 아빠,아버지로서 존경을 표하는 일이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빠,아버지의 호칭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경외심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당시에는 존경받는 사람들, 특히 연장자들을 Ἀββᾶ로 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③제자들은 한 분 뿐이신 자기들 모두의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마태오에서 전해지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하늘에서)온 세상을 다스리심과 당신의 부성적 사랑으로 사람들 곁에 계심을(저희아버지)동시에 드러내는 셈족말식 표현법에 상응합니다. 이 부름말에서는 하느님께서 멀리 계심과 가까이 계심, 무한히 위대하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에 대한 친밀감, 그리고 인간이 서 있는 이 땅과 완전함의 장소인 하늘 등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④“이름”은 성경 특히 전례문에서, 하느님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를 공손하게 가리키는 전통적 용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또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다’는 성경과 유다교 문학의 고전적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의 성성(聖性)에 더 이상 무엇을 보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널리 알리며, 그분의 영광을 칭송함을 뜻합니다.
⑤아버지의 ‘거룩함’(하기오스 ἁγιος)이 드러나는 것은 종말론적 청원으로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청원한다는 뜻입니다.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뜻이 실현되도록 조치하십사는 적극적인 청원입니다. 이 청원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려는 당신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서 손수 실현시키시는 것이 여기에서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뜻은 인간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동조가 있어야 실현되고 세상 종말에는 인간의 뜻과 이루는 완벽한 화합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그리고 이 실현은 지금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성서와 유다교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가운데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권능과 영광을 지니신 분, 의로우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식으로 드러나심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 만민에게도 해당됩니다.
⑥전반부의 청원은 우리가 아버지를 향하도록, 아버지를 위하도록, 곧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이 청원은 ‘우리자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탄원은 이미 구세주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지 않으셨으므로, 이 간청들은 우리가 희망하는 가운데, 이제 그 최후의 성취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요청에 하느님께서는‘있는 나’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탈출 3,14).‘있는나’의 히브리어는 에흐예 아쉘 에흐예 'Ehyeh-‘Asher-'Ehyeh. 에흐예는 ‘나는 ...이다’의 뜻입니다. 아쉘은 관계대명사인데 번역하면 “나는 ...이다”. 히브리어의 에흐예는 히브리동사 hayah ‘있다’ 에서 연유되었다고 봅니다. 그리스말은 이 단어를 존재자로 번역하였습니다(영역; I am THE BEING/ I am who I am.; 70인역 그리스어 ; 에이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이름을 밝히시지만 사실 완전하게 번역되지 못하는 문장입니다. 후에 히브리말 에흐예는 YHWH라는 神聖4문자로 전해졌는데 바빌론 유배이후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제 2계명에 따라 금지되었고 아도나이(Adonai) 주님, 또는 하-셈(ha-shem)으로 불렀습니다. BC 200년 70인역에는 YHWH에 모음a와 e를 첨가하여 Yahweh라고 발음하였는데 최근 임의로 성문자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여 옛 라틴 말 성경과 나중에 나온 예로니모 성인의 대중 라틴 말 성경(Vulgata)번역본들에서도 네 글자는 히브리 말 아도나이(Adonai,주님)과 그리스 말 퀴리오스 (Kyrios,주님)에 해당하는 라틴 말 도미누스(Dominus,주님)로 대치 되었습니다.
[후반부]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①후반부는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청원으로 개인의 필요인 동시에 공동 염원입니다.자신들의 일상을 위해 하느님께 구하라는 솔직한 청원입니다. 다른 심오한 뜻은 없습니다. 이 청원들은 우리의 생명 유지를 위한 양식을 얻고, 죄를 치유받기 위한 것이며,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위한 우리의 싸움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양식”을 “오늘” 주십사고 청하는 반면, 루카 복음서에서는 “날마다” 주십사고 청합니다.
②‘일용할’의 그리스말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에 해당하는 말은 어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데다가, 그리스도교 문헌에서만 사용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과 번역이 제시됩니다. Ⓐ생존에 필요한, Ⓑ내일 필요한(이 내일을 먼 미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청원도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필요한(많은 번역서들이 이 해석을 따릅니다), Ⓓ어원과는 관련 없이 성체성사의 빵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일용할’을 해석할 수는 없지만 이 청원이 미래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님이 확실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로 살아갔듯이 그날의 양식을 욕심 없이 청하는 기도를 명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③예수님께서는 각각 삶의 처지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매일의 양식을 도와주시고 악조건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날마다 나에게가 아니라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세상에 굶주림의 비극이 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인 처신에서나 인류 가족인 그들과의 연대에서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하면서 음식 및 소비의 절제를 실행하며 나누는 것은 기본적인 윤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다음에 이어지듯 사람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①마태오 복음서에는 “저희도 용서하였듯이”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오의 ‘용서하였듯이’는 과거 완료 형입니다. 마태오는 형제에 대한 용서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실행되어 있어야하는 완료형으로 말하는데 루카는 “저희도 용서하오니”의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루카는 다른 이들을 용서해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속되는 한 늘 되풀이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②‘잘못한(오페일론, ὀφείλον)’과 ‘잘못(오페일레마타,ὀφειλήματα)’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본디 성경의 언어에서나 일반 언어에서나 사람들 사이의 법적 상업적 채무를 뜻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못한 빚을 지고 있다는 는 뜻입니다. 이러한 채무는 고대에서는 자신이나 가족이 종으로 팔려가거나 감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상이 유다교에서는 하느님 앞에선 인간의 상황을 규명하는 데에 이용됩니다.하느님은 채권자이시고 인간은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라는 것입니다. 같은 표상이 죄인의 상태를 가리키게도 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빌리고 빌려 주는 것이 일상사이기 때문에, 사람들 간의 채무상 ‘빚’으로 옮기면 이러한 표상을 약화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잘못”이 하느님께 끼친 손상과 죄인의 가련한 처지를 더 잘 드러낸다고 봅니다.
③이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진 빚을 탕감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 ‘탕감’은 자기의 죄를 속죄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의무와 형제들에 대한 의무를 밀접히 연관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 자신도 형제들을 용서할 것을 하느님께서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밝히십니다. 자신의 몫인 용서를 매번 상기하는 것이며 용서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④형제를 용서한다고 우리가 받을 용서를 벌어들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다만 기도의 순수성과 마음의 진실이 전제될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과거로 표현된 “용서하였듯이”라는 말이 드러내고 루카는 용서하오니의 진행형으로 나타냅니다. 자신의 몫인 용서를 매번 상기하는 것이며 용서의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자비심을 동시에 고백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원수를 용서하기에 이르러야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⑤‘죄’로 사용된 그리스말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을)빗나가다, 실패하다, 기회를 놓치다의 뜻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①루카 복음서에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이 청원에 이어지는 “저희를 악(또는, ‘악한 자’)에서 구하소서.”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튼 루카도 “유혹”이 ‘악한 자’ 곧 사탄의 짓이라고 말합니다(4,2.13; 8,12-13. 그리고 22,31).
②그리스말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보통 유혹으로 번역하고 시험, 시련 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이 시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 아니라 죄의 시련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유혹은 몰락시키려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목적을 지닌 사탄의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아닌 유혹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죄는 유혹에 동의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유혹은 걸려 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시련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기회가 됩니다.그러므로 유혹 자체를 없애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시련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 시련은 외부에서 오기도하지만 내부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③“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말하는 것은, 죄로 이끄는 길로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이 청원은 분별력과 용기를 주시는 성령을 간청하며, 깨어 있을 수 있는 은총과 끝까지 항구하게 하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④마태오에서 이어지는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는 사람의 모습으로, 또는 세상의 상황으로 실제로 다가오는 악을 말합니다. ‘악’으로 사용된 그리스말 포네로스(πονηρός)는 아픔, 고통이라는 명사형 포노스(πόνος)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며 명사로는 악한자, 악의를 가진자, 악을 행하는자 입니다. 여기에서의 악은 어떤 추상적 악이 아니라 인격적 악, 제자들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악의에 찬 능력을 가진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청원은 분별력과 용기를 주시는 성령을 간청하며, 깨어 있을 수 있는 은총과 끝까지 항구하게 하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⑤미사 전례서에서는, 주님의 기도문 다음에 복된 희망을 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의 표현으로써,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청원을 이어 나갑니다. 미사 중 주님의 기도 끝에 하는 ‘아멘’은 사제의 이어지는 기도문 다음에 합니다.
⑥후대의 사본에는 주님의 기도 마지막 구절 다음에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따라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 입니다 아멘" 이 첨부됩니다.
2.끊임없이 간청하여라 11,5-8
(The Jerusalem Bibie;The importunate friend;친구의 절박한 요청)
루카복음에만 있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문맥, 그리고 루카가 이를 다음의 11,9-13절에 적용시킨다는 사실은, 이 비유의 의미가 바로 기도를 끈질기고 절박하게 친구가 요청을 하듯 그렇게 하라는 권고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루카가 비슷한 뜻을 부여하는 18,2-5의 비유와(과부의 끈질긴 요청에 할 수 없이 들어주는 불의한 판관의 비유) 여러 공통된 특징을 드러냅니다. 이 두 비유는 본디 한 쌍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대근동지역에서는 손님에 대한 친절이 최고의 선이었습니다. 음식,숙박시설 이러한 필요가 여의치 않았던 시대에는 최고의 친절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밤중 빵을 얻으러 찾아온 친구는 자기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들린 친구를 위해 빵을 꾸러간 것입니다(11,6). 이미 잠자리에 든 친구는 문을 열지 않고 안에서 줄수 없다고 말합니다(11,7). 그러나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는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겠지만 문밖에서 줄곧 빵을 달라고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준다는 것입니다.
11,8“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우정 때문이 아니라, 앞서 말한 불의한 판관처럼, 자기 마음이 편해지려고 벗의 청을 들어줍니다. 사람도 결국은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몹시 성가시게 해서 원하는 것을 기필코 얻어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귀찮아하던 그도 마침내는 주듯 인간들의 세계도 이러한데, 하느님과 우리의 우정이야말로 인간들의 우정에 비할 바가 없는데 애당초 주시기로 작정한 하느님께서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단락에 이어지는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말씀의 서두입니다.
3.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11,9-13 (마태 7,7-11)
(The Jerusalem Bibie: Effective prayer;간단없는 기도)
11,9“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10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12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①‘주실’것이다의 직역은 “주어질.”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러한 수동태는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그분의 행위를 조심스럽게 가리키는 방식입니다.
②마태오 복음서의 ‘빵과 돌’이 루카 복음서에서는 ‘달걀과 전갈’로 대체됩니다. 루카의 본문은 10,19에 나오는 뱀과 전갈의 언급에서 착상을 얻었을 수 있는데 루카 복음서의 대조가 마태오 복음서의 것보다 더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11,13“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①13절의 ‘성령’이 마태 7,11에는‘좋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루카에게는 그의 작품인 사도행전에 자주 언급되듯이,여기에서의 성령(프네우마 πνεῦμα)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여기에 “성령”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②우리는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무엇을 또는 어떤 일을 간절하게 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으로 무엇을 청해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해가 되는지 아십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의미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빵을 사랑으로, 생선을 믿음으로, 달걀을 희망으로 풀이했습니다.
③‘너희들’과 ‘아버지’라는 대비논법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 애쓰듯이 선하신 하느님께서 간절한 청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4.예수님과 베엘제불 (Jesus and Beelzebul)11,14-23 (마태 12,22-30; 마르 3,20-27)
11,14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루카는 이렇게 마귀를 이를테면 일종의 병의 원인으로 간주합니다. 13,11.16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4,39 각주 참조). 반면에 마태 12,22에서는 마귀가 들린 결과로 병이 생깁니다.
11,15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①적대자들은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자 예수님을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 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사탄은 큰 용과 악마의 늙은 뱀(묵시 12, 9), 베엘제불(마르 3,22; 마태 12,24; 루카 11,16), 벨리아르(2코린 6,15),악마,마귀,뱀, 붉은 용, 용, 옛날의 뱀, 속이는 자, 원수, 악한 자, 이 세상의 우두머리, 유혹자, 살인자, 거짓말쟁이, 적대자....등으로 묘사되어 있고, 단순하게 악의 세력들을 모두 일컬어 마귀나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마귀의 세력은 미신행위를 하는 세계의 여러 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 뒤에 자신을 감추고 미신 행위를 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②베엘제불(Beelzebub; Βεελζεβοὺλ)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블레셋 땅 에크론의 신 바알즈붑(2열왕 1,2), 또는 ‘파리들의 바알’로도 해석 합니다(바알에 파리라는 뜻을 지닌 즈붑을 합성한 말 -희생 제물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는 신). 아람어 be 'el (주인) 히브리어 zebul(집) 즉, 마귀집의 주인으로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베엘제불은 우두머리 마귀의 이름가운데 하나입니다.
③사탄,마귀,악마
그리스말의 사탄(satan, σατανᾶν; 적대자, 거역하는 자)은 히브리말의 사탄과 아람말의 사타나를 음역한 말입니다. 사탄 또는 마귀(다이모니아 δαιμόνια 루카1,17; 영어 devil)는 복음서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 건설에 반대하는 원수의 이름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것들입니다. 악마(惡魔 디아블로 διαβόλου, devil)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파괴하며 혼란과 어둠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강한 증오와 자만심으로 하느님께 대항하고, 인간의 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영혼을 침범하지는 못하며, 인간의 의지를 또한 완전히 점령하지 못합니다(마르 5,2-4). 신약성경에서 사탄은 악행의 장본인으로 등장하며 악마와 같은 개념으로 하느님께 대적하여 인간에게 불행과 멸망을 가져오는 악의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익숙한 악마 개념은 이러한 신약의 가르침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서 사용한 악의세력에 대한 명칭들은 다양한데 악마 또는 타락천사로 사용하는 루치펠은 실제 성경 원문에 "루치펠" 또는 "루시퍼"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루치펠을 사탄과 동일시한 것은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의 견해가 시초였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루치펠과 사탄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을 언급하면서 그가 하늘에서 추방당했다고 여겼습니다(묵시 12,7-9; 루카 10,18). 이것으로 사탄 = 루치펠 같은 형태가 완성되었습니다. 몇몇 신학자들의 추론에 의하면 그가 천사로서 하늘에 있던 때의 이름이 루치펠이며, 지상에 떨어진 후부터 사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어: Lucifer루시퍼, 라틴어; Lucifer 루치페르, 히브리어: הֵילֵל 헬렐).
11,16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늘”은 당시의 유다인들이 직접 언급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고 그분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관습을 15,7.18.21; 20,4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이 절은 29-36절(요나의표징)을 준비하는 구실을 합니다.
11,18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19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①마태 12,27에서는 “너희의 아들들”을 “너희의 제자들”로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일반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아들들”을 달리 해석해야 합니다. 히브리 말에서 “아들”은 어떠한 집단에 소속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곧 여기에서는 그냥 ‘너희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너희의 구마자(驅魔者)들’을 가리킵니다. 루카는 사도 19,13에서도 에페소에 있는 유다인 구마자들을 언급합니다.
②예수님의 구마가 베엘제불의 힘이라면 그들 역시 베엘제불의 힘에 의해 구마를 할 것입니다. 당시 마귀 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소란하였습니다. 그들 생각에 마귀가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나가는 것을 보니 마귀두목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번 선을 선으로 보지 못합니다.
11,20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 “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루카의 고유한 것으로서, 탈출 8,15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처음에는 모세의 기적들을 부정하다가, 마침내는 “하느님의 손가락”이 이룬 작품이라고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새로운 모세’이신 것입니다(마태 12,28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써 하느님나라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드러내십니다. 새 시대는 어떤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예수님자신의 행위로 열립니다. 또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으십니다.
5.되돌아오는 악령 (Return of the unclean spirit) 11,24-26 (마태 12,43-45)
11,24“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25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26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①고대인들 생각에 사탄이 사는 곳은 ‘물 없는 곳’ 즉 사막입니다. ‘일곱 악령’은 어떤 사람이 처한 심각한 상황을 말할 것입니다.
②어떤 사람에게서 나온 더러운 악령이 광야를 헤매다 갈 곳 없자 먼저 있던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악령은 그 사람 영혼이 다시는 악이 침범할 수 없도록 말끔하게 정돈된 것을 보았으나 그의 영혼이 메마르고 공허하다는 사실 간파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마귀를 데리고 들어와 이번에는 자리를 잡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형편은 회개하기 전보다 더 나빠지게 됩니다. 공허한 영혼은 마귀의 좋은 집입니다. 죄를 피하는 노력도 인간이 해야 하는 절제의 생활 중 하나이지만 더욱 좋은 방법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③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다교에서 빌려 온 마귀와 관련된 표상들을 가지고,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가 다시 그 손아귀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이야기하십니다. 종종 마귀가 떨어져나간 사람들 중에도 다시 그러한 상태가 되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부분은 예수님시대에 예수님께 치유되었으나 마지막 심판 때에 더 나쁜 상태가 되리라는 것으로, 시대의 악한 상태(11,29)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④예수님께서는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시기 때문에, 불행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보지 않으시지만 그러면서도 회개한 이들에게 그들을 노리는 위험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마태 12,43-45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악한 세대”에 적용됩니다(마태 12,45).
6.참행복 (The truly happy) 11,27-28
11,27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28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말씀은 8,21과 직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당신 어머니와의 육친 관계와 대립시키시면서까지 신앙의 위대함을 선포하십니다. 이 선포의 대상은 11,14-23절의 대적자들과 반대되는 모든 신앙인입니다. 루카는 이 구절에서 마리아에 대하여 무슨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복음서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묵상하는(2,19) 전형적인 신앙인입니다(1,45).
7.요나의 표징 (The sign of Jonah) 11,29-32 (마태 12,38-42; 마르 8,11-12)
11,29“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30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의 청중은 그분께 자기들이 경탄할 만한 “표징”을 요구합니다(1코린 1,22;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일어난, 또는 엘리야가 일으킨 기적들을 표징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표징이 되는 여러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이 세대가 한 가지 요나의“표징”밖에(또는, 마르 8,12에서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요나는 니네베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며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도시 전체가 회개합니다.‘요나의 표징’ 핵심은 회개입니다. 유다는 기적은 요구하면서 기적의 메시지에는 눈을 감습니다.
②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두 그분의 존재와 구원행위를 가리키는 단 한 가지 표징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분 자신이 표징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③요나가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후 다시 살아난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죽음의 영역에서 사흘 후 부활하실 것입니다.
11,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11,32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①그리스도의 표징은 영원한 생명과 직결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이’는 구원사를 계승할 뿐 아니라 구원사를 능가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동시대인들과, 솔로몬과 요나의 말을 받아들인 옛날의 이교인들을 대조시키십니다.
②요나가 설교를 하여, 곧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여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다고 32절은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과 관련해서도 같은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원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복음서를 저술한 루카는, 바로 이 부활을 예수님의 표징 그 자체로 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이러한 연유로 “그러할 것이다”라는 미래형이 쓰인다). 마태 12,40은 더 나아가서, 사람의 아들이 “땅속에” 머무르실 사흘을 예시하는 뜻으로,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냄에 따라 표징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요나는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후 다시 살아나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땅속에서, 죽음의 영역에서 사흘 후 부활할 것입니다.
③31절과 32절 내용의 순서가 마태오 복음서에는 거꾸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본디의 순서일 것으로 봅니다. 루카는 이 단락을 설교에 이어지는 회개로 끝을 맺으려고 순서를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④솔로몬 임금은 성경에서 “지혜”의 화신과 같은 존재입니다(1열왕 3; 5,9-1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우시다는 것입니다. 루카는 특히 예수님의 “지혜”를 강조하고(2,40.52; 21,15),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솔로몬의 즉위식을 상기시킵니다(19,35-38).
⑤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준비하는 역할 때문에, 요나를 비롯한 다른 모든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7,26-27). 예수님께서는 더더욱 그러하십니다.
⑥남방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왔으나 솔로몬의 지혜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예수님자신의 일생을 통한 지혜, 그분의 수난과 죽음으로 얻어지는 하느님나라의 구원보다 더 큰 지혜는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이’는 예수님과 솔로몬의 비교가 아니라 유다인들이 가장큰 지혜로 솔로몬을 여겨왔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8.눈은 몸의 등불(The parable of the lamp) 11,33-36 (마태 5,15; 6,22-23)
11,34“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35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36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
①등불의 비유가 반복되어 나옵니다(8,16).루카가 예수님 자신을 표징으로 소개하는 이 문맥은 표징을 가려내기 위해서 분명하게 보라고, 곧 믿으라고 촉구하는 기능을 합니다.
②“등불”이 사물을 보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눈”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둘 다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눈과 등불’의 표상이 지니는 교훈이 나옵니다. 눈은 어둡지 않아야 볼 수 있습니다. 전 단락(29-32절)에 이어지는 이 구절에서, 루카는 “이 세대”가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보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는 불신(不信)의 어둠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③온몸이 환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환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위의 말씀은 이렇게 내적으로 빛에 차 있으면, 외적으로 주어지는 영적인 빛도 충만히 누릴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肉眼이 맑아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듯이 心眼이 맑아야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갖 잡념과 사악한 생각을 멀리하고 하느님께로 향할 때 심안이 맑아질 것입니다.
④‘맑다’의 직역은 단순하다, ‘성하지 못하다(흐리다)’의 직역은 ‘악하다’로 종종 해석됩니다.
9.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11,37—54
The Pharisees and the lawyers attacked (마태 23,1-36; 마르 12,38-40; 루카 20,45-47)
서론(緖論)
이 단락에 나오는 질책의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마태 23장에도 나옵니다. 루카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난과(39-44절) “율법 교사들”에 대한 비난을(46-52절) 나누어 소개합니다.
대중의 무관심보다 더 나쁜 것은 지도자들의 경건한 자신감입니다. 이 들 세 그룹이 바리사이, 율법학자 그리고 제관들입니다(제관들에 대한 책망은 성전정화사건에서 다루어집니다).
율법학자(scribes, γραμματεῖς)들은 유배이후 형성된 고등교육을 받은 신학도로서 여러 해에 걸친 학습을 한 후 任職式을 통해 율사가 됩니다. 바리사이(Pharisees, Φαρισαῖοι)는 기원전 2세기 전반 헬레니즘화에 대항한 투쟁에서 형성된 평신도 운동이었고 이들의 지도자들이 율법학자입니다. 본디 이들 출신성분은 모든 영역과 계층으로서 오십만 인구 중 육천 명이 바리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유다역사가 요세프스의 고대사(古代史)).
바리사이에 대한 질책은 엄격한 계명 실천과 과잉공로사상으로 인해 마지막 날 공동체의 신심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주장과 연결된 것입니다. 루카에서 보게되는 ‘어느 바리사이 집’이라는 틀은 바리사이가 유다의 사고를 대표하기 때문이고 더러 에수님께 호의적인 바리사이도 있었습니다. 정결례와 관련하여 종교적 의무에는 성실하면서 사랑과 정의를 외면하는 백성들의 영적지도자들을 책망하는 이 장은, 바리사이에 대한 세 가지 불행선언, 율법학자들에 대한 세 가지 불행선언이 들어있습니다. 본디 예수님께서 하신 단절어들을 저자가 여기에 한데 묶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11,37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38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식사 전에 손이나 몸을 씻는 것은 일종의 ‘목욕재계’로서,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이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마르 7,3-4). 바리사이들은 사제의 제물 드리기 전의 손 씻는 예식을(탈출 30,18) 따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배척하시고(마태 15,20), 그분의 제자들은 이를 준수하지 않습니다(마태 15,2; 마르 7,2-5).
11,39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들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신앙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첫째 요구 사항으로 가르치시는 내적 신앙이 대비됩니다(16,15. 그리고 마태 15,1-20; 마르 7,1-23 참조).
11,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절은, 왜 하느님께서 외적 신앙과 이러한 신앙의 율법주의에 만족하실 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11,41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자선”은 루카가 매우 중히 여기는 주제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루카만 이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12,33; 16,9; 19,8; 사도 9,36; 10,2.4.31; 11,29; 24,1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그리고 6,30; 18,22; 21,1-4에서는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와 병행으로 이 주제를 언급한다). 아마도 루카 자신이 병행구인 마태 23,26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바리사이들이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릇이나 기물들을 뜻합니다(티토 1,15도 참조). 종교적 의무에는 성실하면서 사랑과 정의를 외면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11,42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운향”(芸香)은 야생풀입니다. 라삐들은 신명 14,22-23의 십일조 규정을 모든 경작 식물에 적용시키는데, 야생 식물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많은 라삐가 운향은 십일조 규정에서 제외된다고 여겼지만, 루카만은 이를 여기에서 언급합니다. 바리사이는 법규에 집착하면서 그 행동에 안심하고 만족해 했습니다. 본디 십일조는 한 해 作農소출의 십일조입니다(신명 14,22). 박하, 운향은 향료로 쓰는 야생풀인데 더러 경작하기도 하지만 소출은 매우 적습니다. 전통적인 십일조 관습을 아주 작은 농작물에까지 확대하여 실행하면서, 그러나 정의를 실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11,43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장터는 마을 사람들의 공적인 생활이 전개되는 곳이었습니다. 윗자리에 서기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은 바리사이들의 권위 행사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텍스트는 바리사이를 포함하여 규정과 계명 뒤에 자신을 숨기는 공동체와 개인의 모든 위험,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이용하고 종교적 명분으로 약한 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위험 등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바리사이적 위험이 등장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고 우리도 관련되어있습니다. 영적 오·남용의 위험은 오늘도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11,44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팔레스티나 땅의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봉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하의 자연/인공 동굴이 많이 쓰였습니다. 천연동굴을 무덤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봉분묘(峰墳墓)처럼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무덤은 1년에 한번 회칠을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이 잘 모르고 지나다가 부정하게 되어 성전전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취한 조치였습니다. 무덤을 밟거나 몸에 닿으면 부정(不淨)하게 됩니다(민수 19,16).
루카는 이 부정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바리사이들의 은폐 행위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까지 다 아십니다(16,15).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을 무덤인 줄 모르고 가까이 하기 때문에 모두 不淨을 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그러한 말씀은 자신들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자 율법교사를 꾸짖는 세 가지 불행이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는 평신도 열성신자들이지만 율법교사는 고등교육을 받은 신학자들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질책을 합니다. 그들은 법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합니다.
11,45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율법 교사들은 보통 때에는 자신들을 바리사이들과 구분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들과 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유다교 사상과 생활을 이끄는 지도자로 질타하시어, 그러한 구분을 드러내십니다.
11,46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짐’은 율법전체를 가리키는 유다교의 표현방식입니다. 무수한 율법 세부사항의 짐을 만들어 선량한 백성의 어깨에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도 대지 않고 그짐을 주로 바리사이들이 집니다. 바리사이는 율법학자들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죄 안 짓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계명의 실수 없는 준수를 위하여 613개의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1킬로미터입니다. 그래서 더 멀리 가야할 때는 일 킬로 지점에서 다시 밧줄을 치면 밧줄 끝부터 다시 1킬로미터를 갈수 있었습니다. 율법교사들의 죄는 그들의 교육, 재판, 사회적 지위 등에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설교하나,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신학적 신분에 뿌리를 둔 이 들의 죄입니다.
11,47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로 이러한 말씀의 현실성이 확인되었습니다. 대(大)헤로데 시대부터 팔레스티나 땅에서 “예언자들의” 거창한 “무덤”들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것을 속죄 하라고 촉구하면서 스스로는 조상들이 살해한 것보다 더 가공할 만큼 예언자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1,48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교 지도자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예언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살아있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은 예언자들만 칭송하니 무덤을 만드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언자를 거절하고 성서구절 인용하기 즐겨하는 예언자의 무덤을 만드는 자들.
11,49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23,34는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루카는 이렇게 “사도들”을 이야기합니다. 루카는 틀림없이 자기가 자주 언급하는 복음 선포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 23,34에서는 예언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예수님이신 반면,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지혜” 곧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11,50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직역: “…… 모든 예언자의 피가 (하느님에 의해서) 이 세대에 요구될 것이다.” 살인에 대한 판결을 드러내는 칠십인역 구약 성경의 이 표현을, 신약 성경에서는 루카만 이용합니다(창세 9,5; 42,22; 2사무 4,11; 시편 9,13; 에제 33,6.8).
11,51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는 내용상 덧붙인 말입니다. 아벨과 즈카르야의 살해가 히브리 말 성경에서는 처음과 마지막 살인입니다(창세 4,8-10; 2역대 24,20-22). 그래서 이 둘은 성경 역사에 나오는 범죄 전체를 대표합니다.
구약성경의 첫 被殺 아벨(창세 4장), 마지막 被殺 즈카르야(2역대 24장)의 두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드는 것은 이 죽음이 전쟁 또는 사고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비롯된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는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의 비극입니다. 이 세대는 각각의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축적되어온 모든 죄를 갚아야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 전해지는, 곧 마카베오 시대의 순교자들 같은 그 이후의 살해자들이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문장이 팔레스티나적 관점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책임도 세습된다는 성경의 연대성에 관한 생각에 따라, 이 “세대”가 조상들이 저지른 모든 잘못에 동조하고 나섰기 때문에(48-49절) 그것들에 대한 벌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1,52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마태 23,13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질책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는 “지식의 열쇠”가 나오는데, 루카에게 “지식”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문장은 마태오 23,13‘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놓아두지 않는다’와 병행문인데 마태오복음이 어록을 충실하게 옮긴 것으로 간주됩니다.
11,53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54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바리사이, 율법학자, 제관들 세 그룹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관계하고 있는 신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눈에는 이들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루카복음서 [7] 11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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