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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서

루카복음서[12] 17장 [공동체생활을 위한 교훈]

by 써니리버 2025. 5. 27.

17─19장은 예루살렘 입성 전의 마지막 교훈들이며, 17,1-19까지는 공동체 생활을 위한 중요한 교훈들을 묶어놓았습니다. 마태 18장에는 ‘교회설교(Discourse on the church➛The Jerusalem Bibie)’라는 소제목이 붙어있으며 하느님 통치 하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를 권고하는 이른 바 교회론적이라 불리는 장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이웃을 겸손하게 섬기라는 말씀과 함께 믿음에 대한 답변을 더욱 깊이 알아듣도록 삽입된 나병환자열사람의 치유사건이 포함됩니다. 이 단락은 루카에만 있는 사료로서 치유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의 처신에 핵심이 있습니다.17,20-37부분은(하느님나라의 도래/사람의 아들의 날) 루카복음 21장 종말설교에 포함됩니다. 

1.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On leading others astray) 17,1-3  
   (마태 18,6-7 ; 마르 9,42-4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17,1-3)
➀‘죄 짓게’의 직역은 걸려 넘어지다(스칸다리스테 σκανδαλισθῇ; 명사 스칸달론 σκανδαλον 장애물, 덫/영어 scandal 물의, 장애물, 덫).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나 계기는 많습니다. 다른 사람 또는 세상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이 ‘세상’은 악의 영향에 조건 지어진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인류를 사탄이 다스리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상이 ‘불행한’ 것이고, 이러한 세상에서 ‘작은이들’에게는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스칸달론은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함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함정이 인간의 현실적 조건임을 잘 알고 계시지만 함정은 운명의 힘이 아니기에 죄의 기회를 피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③일차적으로 ‘작은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당신을 따를 수 없도록 제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④다른 의미로 ‘작은 이들’은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나, 순수한 신앙의 초심자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또는 공동체 안에서 믿음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⑤‘단순하게 믿는다’는 이유로(이성적 근거가 되는 지식 없이) 경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 믿음이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믿음의 테두리를 고수하는 것이 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믿음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교의적 가르침에 수긍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대에게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는 스칸달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조심해야합니다(watch yourselves!).   
⑥그리스도의 자유를 깨달은 자들이 유다적 전통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신교육을 받은 자들은 정통파 태중 교우들을 교리에만 매어있다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점, 사주, 관상도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철학이라면서 괜찮다고 합니다. 내적으로 성숙한 의식 있는 신앙인의 특징은 자신의 죄에 매우 관대합니다. 유죄와 무죄도 자신이 결정하는데 보통은 무죄 선고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편협하신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의 법규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신자들은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을 보면서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⑦‘연자매’는 고대시대에 많이 사용하는 나귀가 돌리는 커다란 맷돌을 가리킵니다. 연자 맷돌은 ‘뮬로스 오니코스’ mulos onikos 뮬로스는 맷돌, 오노스 onos는 당나귀입니다. 그러한 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수장(水葬)은 로마제국이 사용한 십자가형 다음의 두 번째 刑입니다. 예수님의 가혹하고도 비장한 말씀이신데 우회적인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인 즉 남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순수성을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이 죄 짓도록 자신이 동기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슬픈 일입니다. 
  
2.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17,3-4 (마태 18,15; 마태 18,21-22) 
형제적 교정(敎正) Brotherly correction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17,3) 
①형제를 꾸짖는 목적은 형제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오에는 죄를 짖거든 꾸짖으라는 내용이 네 단계로 세세하게 전해집니다(마태 18,15-17; ⑴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⑵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⑶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⑷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쿰란공동체의 ‘규칙서’에 이와 비슷한 규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쿰란의 규정은 매우 엄격하다는 특징을 지니지만, 마태오 복음서는 ‘죄인들을’ 즉시 공동체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일부  완벽 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의 열성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공동체 전체에 알리기 전에 먼저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시도를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하라고 권장하시는 것입니다(레위 19,17; 신명 19,15 참조). 마태오의 이 부분은 많이 수정된 것으로 보며 루카가 대체로 원문을 따른 것으로 봅니다. 
➁‘죄를 지으면’은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의 동사형 하마르티노입니다(동사의 형태 hamartano는 마태 18,15; 요한 5,14; 1코린 15,34; 티토 3,11참조/ 명사 하마르티아는 마태 1,21; 요한 9,41; 로마 7,7; 17,20; 2코린 5,21; 히브 9,26 참조). 하마르티아는 사격할 때 과녁을 벗어나다, 표적을 상실 하다, 목표 지점을 벗어나다, 목표나 목적을 잃다, 빗나가다 등으로 번역되며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이 못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나오는 죄에 해당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③죄가 의식을 어둡게 하고 모호하게 하는 것과 똑같이, 죄는 궁극적으로 의식이 성숙되어야만 극복 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 관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삶의 목표를 빗나갈 것이고 그래서 죄를 지을 것입니다. 오직 자아 인식과 의식화 작업에 투신함으로써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17,4) 
①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인지하고 있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듯 7은 거룩한 숫자이고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에 용서하는데 숫자적인 제한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문장을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창세 4,24의 히브리말 성경 ‘라멕의 노래’는 일흔일곱 번으로 되어있습니다(“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아무튼 이 말씀의 뜻은 무한의 용서가 요구되며 용서의 횟수를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는 용서를 통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➁이러한 무한의 용서개념은 당시 유다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마태 18,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에서용서의 한계점이 등장하는 것 같지만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그렇게 죄인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지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세리나 죄인은 예수님께서 각별한 관심으로 사랑하신 이들입니다. 우리도 한때 세리처럼 이기적인 때가 있었고 이방인처럼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3. 믿음의 힘 (The power of faith) 17,5-6 
(마태 17,20-20 ; 마태 21,21-21 ; 마르 11,22-23)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 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17,5-6)
➀믿음(피스티스πίστις)의 힘에 관한 이 말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믿음에는 작고 큰 것이 없고 믿음 자체가 있기만 하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지금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장차 엄청난 일을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엄청난 위업에 비하면 지금의 믿음의 역할은 겨자씨에 불과하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➁믿음은 사건의 비범함을 믿는 것도, 겨자씨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말에서 바다 속의 산, 또는 바다 속의 나무는 불가능한 일에 대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달라고 청합니다(increase our faith!).제자들은 믿음이 어느 정도는 있는데 그보다 더 키워 달라는 의미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 믿음을 과소평가하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본질적인 설명으로 봅니다. 적고 큰 믿음이 없고 다만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 9,24). 예를 들어 기적적 치유,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 등을 믿지만 마음 안에 믿음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믿음은 신앙을 일으키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➂마태오복음의 병행구에는 산을 옮긴다는 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팔레스티나지역의 특유의 것으로서, 인간의 눈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대상인 ‘겨자씨’, 또 인간의 눈으로 명확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스스로 뽑혀져서 바다에 옮겨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다’를 나타내는 격언적 관용어입니다.
‘산을 옮긴다’는 말이 탈무드에서는 논쟁 중 사소한 것까지 꼬치꼬치 따지는 명민함(그는 산을 뿌리째 뽑는 사람이다) 및 돌이킬 수 없는 결연함(나는 차라리 산을 뽑겠다)등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4. 겸손한 종 (Humble service) 17,7-10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7,7-10)   
겸손한 종이 되라는 이 말씀은 믿음을 더해달라는 요청에 이어지는 교훈입니다. 제자들이라 해도 하느님의 어떤 특권을 요구하거나 어떤 댓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는 공로에 의한 보상사상이 있었습니다. 사도직의 수행은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맡은 바 소명을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전체적인 인과응보사상에 대한 답일 수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제자들의 자세를 천명하는 것으로 봅니다. 루카에만 수록된 예수님의 어록입니다.

5. 나병 환자 열 사람 (The ten lepers)  17,11-19
믿음에 대한 답변을 더욱 깊이 알아듣도록 삽입된 이 단락은 루카에만 있는 사료로서 치유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의 대조적인 처신에 핵심이 있습니다. 레위 13−14장에 의하면 나병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격리된 삶을 살아야하고, 나병이 나으면 부정(不淨)한 자에서 정(淨)한 자의 선언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실 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7,13) 

나병환자 열 사람이 치유를 청하자 예수님께서는(직접 낫게 해 주셨다는 내용은 없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사제에게 가는 중에 나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됩니다(17,14). 그 중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17,15)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7-19)  
①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이었고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호의적인 언행을 저자는 놓치지 않고 첨가합니다. 또한 돌아온 자의 믿음은 그동안 不淨한 자로 살았던 내적인상처의 치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②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병은 나았으나, 그동안 환자로서 받은 상처와 분노 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을 억제하는 힘과 더불어 온전히 치유받기위해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③나병은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셨지만 돌아온 자의 믿음만이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돌아온 사람은 이제 모든 아픔을 딛고 이제부터 믿음 안에서 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믿음의 의미를 일깨우는 예수님의 답변인 셈입니다. 
◈[17,20-37까지 ‘하느님나라의 도래/사람의 아들의 날’은 21장 루카복음의 종말설교에 포함됩니다.] 
<루카복음서⑫ 17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