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치유의 정의 Ⅱ.열 가지 치유의 기적 Ⅲ. 12사도의 파견 Ⅳ.부록; 영적치유
5−7장까지 갈릴래아 선교 첫 부분 산상설교에 이어지는 갈릴래아 선교의 둘째부분 8⸺9장은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열 가지 치유의 기적이 소개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어 고통 받는 이들에게 직접 다가가십니다. 예수님의 열 가지 치유의 기적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경 안에서 치유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1. 치유(治癒)의 정의(定義)
치유는 ‘병을 낫게 하는’의 일반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말 테라페우오(ϴεραπεύω,영어 Therapy)는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의 뜻이며 영어의 cure, heal도 같은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후 ‘구원되었다’고 할 때의 단어는 그리스말 소조(σώζώ)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안전’에서 온 단어로 ‘구원하다’, ‘구출하다’ 라는 동사입니다. 이 밖에 ‘여러 종류의 병으로부터 회복하다’, ‘온전하게 되다’라는 동사 이아오마이(ίάομαι)도 있습니다.
치유에 관한 성서적 이해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치유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통찰이 필요합니다. 다만 환자를 낫게 한 사건이었다면 오늘날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치유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 궁극적 목표였음을 계시하고 있으며 여기에 각자의 믿음이 전제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치유의 근원인 생명이십니다. 이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에, 육적, 영적, 내적치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회복 없이는 죄로 인한 단절로 하느님께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은총의 지위를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각자가 영적 치유의 핵심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치유는 루카 9,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는 말씀에 응답하는 각자의 선택과 중요하게 관련 되어 있습니다.
2.영적, 내적, 육적 치유
①영적치유(靈的治癒)
영적치유는 개인의 영성생활 안에서의 문제점들을 치유하는 것으로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모든 치유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 궁극적 목표였음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관계회복은 신학적인 용어이고 다른 말로 회개 즉,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치유는 하느님구원의 의학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치유자라 표현하셨습니다. 탈출 15,26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
②내적치유(內的治癒)
내적치유는 마음에 입은 상처의 흔적에 대한 치유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의 손길이 깊은 정신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말하며 고통스런 기억들을 어두움 에서 빛으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③육적치유(肉的治癒)
실제적인 병고로부터의 치유를 말합니다. 성경의 육적 치유 전체가 영적 치유의 예표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표징이 의미하는 진리에 관해 증거하고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3.성경 안에서 치유의 의미
성경 안의 예수님의 모든 치유는 통합적입니다. 육적인 불구를 가지고도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여 영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한 몸을 지니고 남의 가정과 공동체를 풍비박산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한 가정과 단체와 사회를 움직이는 숭고한 영혼의 소유자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내적인 흔적을 가진 사람들은 그 상처가 장애가 되어 영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육적 병고를 가진 사람은 그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고 이웃에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치유의 근본은 바로 우리의 올바른 영성생활을 통한 하느님과의 바른관계입니다. 영성생활의 근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영’은 히브리말 루아흐(ruah), 그리스말은 루아흐를 프네우마(πνεῦμα 또는 아네모스 ἄνεμος; aněmŏs)로 번역하였습니다. 라틴어는 '스피리투스'(Spiritus), 영어는 ‘스피릿’(Spirit)이라고 번역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람, 숨, 생명의 힘, 원기라는 뜻으로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을 말합니다. 영속에 생명의 근원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야 정신과 육체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영성은 인간성 본래 모습이며 "하느님의 형상”(창세 1,26-27)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1) 구약성경의 치유
➀이스라엘은 숱한 고난의 역사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반복되는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이끌어주시고 상처난 마음을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사를 여과 없이 기록하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상처를 싸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신앙고백이 구약성경입니다.
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탈출사건은 그야말로 대형의 치유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치료해주시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그들의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마음을 치유하시기 위해 직접 나서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 (탈출 15,26)
➂탈출 이후 또 한 번의 대형치유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은 성전은 파괴됩니다. 이스라엘인들 중 귀족과 장인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되고 남은 사람들은 이주하거나 처형되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정치적 내적 긴장감과 고통으로 유배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나라가 망한 것도 우상을 숭배하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자학하면서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그리하여....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6,24-28)
2)신약성경의 치유
①"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온갖 질병과 병을 고쳐 주셨다"(마태 9,35; 4,23).
②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어 치료 해 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치유사건은 수술이나 처방전 없이 한마디 말씀으로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그는 일어나고, 그 순간 하혈이 멎고, 나병이 낫고 마귀가 나갑니다. 이는 치료의 행위가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낫게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이 모든 치유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루카 7장 백인대장이 말합니다. 굳이 제 종을 치료하시러 저의 집까지 오실 것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시면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영성체 전의 신앙고백문은 백인대장이한 말입니다. 직접 수고스럽게 가시지 않아도 언제든 어느 곳이든 믿음의 영으로 연결된 그러한 믿음으로 치유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감탄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당신의 백성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믿음이었다는 것인데 요한복음서 1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4.성경말씀을 통한 치유
성경은 그자체로 모든 말씀이 우리 신앙의 길에 치유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에서 삶의 기쁨을 찾고 바쁜 일상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삶의 균형을 조절하는 것은 말씀을 듣고 말씀의 신비와 말씀의 힘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 신앙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적인 상처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더 이상 문자가 아니라 살아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1) ‘힘’으로서의 말씀
①말씀은 삶의 균형을 잡고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많은 질문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마태 16,13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15 /“자고 있느냐?” 마르14,37/ “너희도 떠나겠느냐?”요한6,67/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②요한복음서 5장의 벳자타 못가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자의 육적인 상태는 영적인 상태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서른여덟 해나 누워있던 이 사람은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길게 답을 합니다.
“있잖아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애써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물에 들어간다니까요. 그러니 늦게 도착해서 물에 들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데요”
그것이 그가 38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이유였습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하느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 아니라 첫 번째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정말 건강해지고 싶으냐? 꼭 천사가 물을 저어 출렁거리는 그 순간에 들어가야만 낫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십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누워 있던 그 들것을 들고 일어나라! 과거의 흔적을 모두 가지고 일어나라! 일어나려는 결단이 있을 때 가망 없는 상황에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치유 사건은 육적치유에서 영적치유로 나아가는 표징입니다. 병을 나은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몸이 나은 사람으로서 지금부터 펼쳐질 세상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의지의 결단이 필요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마르 10,51 의 티매오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즉시 대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다시 보게 해달라는 간청으로 보아 그는 처음부터 소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자 바르 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눈을 떠야 주님의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보게 한다는 것은 구원의 빛 속으로 이끌어주십사는 상징적인 뜻도 포함될 수 있고 하느님을 인식하는 데 대한 개인의 무지를 치유하시는 의미도 있습니다.
④육적인 치유도 각 개인에게는 고통스럽고 다급하지만, 영적인 무지는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을 다치게 하고 상처도 줍니다. 다급한 것은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 회복일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에 돌아서야하고 모든 것을 팔아서 사야하는 것이 하느님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르 티매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가능했고 은총을 받는 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방법 뿐 입니다. 이 사람은 그 기회를 움켜잡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시는 길이었고 이 때를 놓치면 기회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소경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군중의 저지에도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더욱 큰소리로 외칩니다. 치유에는 나의 믿음과 간절함이 동반됩니다.
2) 치유의 능력으로서의 말씀
하느님께서는 심오한 방법으로 말씀을 통해 자극을 주시고 치유도 해 주십니다.
욥 5,18; “그분께서는 아프게 하시지만 상처를 싸매 주시고 때리시지만 손수 치유해 주신다네.”
호세 6,1-4;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사라지는 이슬 같은 신의로 하느님을 대하였건만 회복의 기쁨과 그 약속은 불성실가운데서도 지속되었다.”
말씀은 우리 삶의 고통가운데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3) 기쁨이며 희망인 말씀
①이제 우리는 성경말씀이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은 씨앗처럼 삶이라는 땅에서 자랄 수도 있고 죽기도하고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때 우리는 말씀의 참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기쁨이 되어야하고 말씀은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합니다. 성경은 어마어마한 기쁨을 누리는 많은 인물을 소개합니다.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때(시편 126,1)/욥의 운명을 되돌리실 때(욥 42,10)/나오미의 운명을 되돌리실 때(룻기 4,17).
②하느님은 오로지 당신의 사랑을 실행하는 그 사랑 안에서만 모습을 드러내실 뿐입니다. 한 말씀만 하시면...이라는 그러한 믿음으로, 아가 3,3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하면서 밤새 도성을 누비는 그러한 갈망으로. 그런데 사람의 사랑은 지나친 갈망으로 마음을 병들게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범죄도 가능합니다. 또한 사람간의 사랑은 깨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소유욕이 없습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내가 그를 질투할 까닭도 없습니다. 달을 보며 누구나 승고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달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누구에게 소유되어지지 않고 넘칠수록 사람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이 그렇습니다. 이 진실만이 우리의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랑입니다.
③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말은(요한 1,14) 여전히 이 세상과 연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의 희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Ⅱ.열 가지 치유의 기적(Ten miracles);8―9장
1.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Cure of a leper); 8,1-4 (마르 1,40-45 ; 루카 5,12-16)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8,1-4)
①나병(영어 leper;그리스어 레프라 λεπρὸς;히브리말 차라앗); 이 단어는 단순히 나병만이 아니라 당시의 의학 수준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악성피부병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는 천형의 나병으로 쓰였습니다. 나병은 유다인에게 가장 철저하게 격리되는 병으로서(레위 13―14) 공동체에서 격리 되는 죄의 표지였습니다. 그들은 나병이 천벌이라 생각하여 병자는 죽기를 자처하면서 음식을 거부하였고, 길에 나서면 어김없이 돌팔매를 당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수 없었습니다.
②그는‘예수님께 절을 하며’ - 그리스 단어 프로스쿠네이(προσεκύνει)는 신에게 경배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는 것입니다. 그는 곧 나았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이르신 후 다만 사제에게 가서 정해진 예물을 드리고 몸이 깨끗해진 것을 증명하라고 하십니다. 죄인으로 격리선언 받은 것을 사제에게 가서 해지 받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병환자 치유는 인간이 만든 경계를 허무시어 당신께서 수행하시는 사명을 밝히시는 표지로서 드러내십니다.
③4절;그의 나병은 치유 되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생길 때까지 침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을 명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아는 유다인들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고 기적과 치유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 수난과 죽음을 받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2.백인대장의 종 치유(The centurion's servant);8,5-13(루카 7,1-10;요한 4,43-54)
노예는 로마인들의 소유물이며 재산목록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를 낫게 하려는 이 사람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람의 인격에 많은 감동을 받으신 듯합니다. 그는 이방인의 집에 유다인들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신교도인 그는 유다의 유일신 종교를 존중하는 인격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에 오실 것 까지도 없이 그 자리에서 한 말씀만 하시라고 부탁드립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이 영성체 전의 기도문에 들어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아무 곳에 있든 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느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예감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의 탁월한 겸손과 이웃 사랑에 감탄하십니다. 민족적, 종교적으로 서로 거리가 먼 예수님과 백인대장이 교리, 종교적, 이념상의 불일치를 넘어서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 위에서 만납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믿음이 일치한 것입니다. 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8,11-12)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의 직역은 “나라의 아들들”로서, 법적으로 이 나라에 소속된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어둠”은 악인들이 벌을 받는 곳을 가리키는데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땅 밑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는 산 이들의 세상 “바깥”에 있는 것으로 제시됩니다(22,13; 25,30 참조). 믿지 않는 이들을 “바깥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마르 4,11; 1코린 5,12-13; 1테살 4,12). 일부 수사본들에는 “쫓겨나” 대신에 “나가”로 되어 있습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악인들이 의인들의 행복을 보면서 느끼는 괴로움과 분노를 나타내기 위하여 성경에서 자주 쓰는 표현인데 마태오 복음서 외의 신약 성경에서는 루카 13,28에만 나옵니다.
3.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8,14-15
베드로의 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머무시는 곳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자 장모는 일어나 예수님의 시중을 듭니다. 본문에서 마태오는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는 말을 생략함으로써, 이 장면을 마르코보다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그리고 시몬이라는 원이름 대신에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베드로라는 이름을 씀으로써, 이 일이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현재와 직접 관련됨을 강조합니다. 마태오에게 이 기적은 다음 단락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업적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17절). 그리고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 신앙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같은 그리스 말이 ‘병에서 일어남’과 ‘죽음에서 일어남’ 곧 ‘살아남/부활’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4.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8,16-17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8,16-17)
예수님께서 마귀 또는 악령을 쫓아내시는 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당시 구마자(驅魔者)들의 소란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구마 행위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에게서는 권능을 지닌 그분의 말씀이 두드러집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어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은 인간의 치유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는데, 이는 구약 성경과 명백히 관련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는 이사 53,4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로 마태오 사가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표징들은 하느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선택을 위한 표징입니다. 8⸺9장에 이어지는 마태오복음서의 치유사건은 ①우리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종 ②선택을 위한 표징, 그리고 10개의 표징들 사이에 ③선택을 촉구하시는 말씀들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부름받은 자의 고난(Hardships of the apostolic calling); 8,18-22 (루카 9,57-62)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8,18-22)
①셈족 말 식 표현에서 따온 사람의 아들은 사도 7,56; 묵시 1,13; 14,14 말고는 복음서에만, 그것도 직간접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만 나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이 칭호를 인자[人子]로 옮기기도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등으로 불렀지만, 그러면서도 이 존칭들보다는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께서 직접 쓰신 전형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아들과 약간 거리가 있는 듯이 말씀하시고(16,27; 24,30), 어떤 때에는 당신 자신과 사람의 아들을 명백히 동일시하십니다(20절; 11,19; 16,13).
②묵시문학의 전통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날에 죄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존재입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칭호로 예수님을 가리킴으로써, 예수님에게서 유래하는 하나의 독창성을 보여 줍니다. 곧 죄인들을 구원하시고(9,6) 메시아 시대를 여시는(12,8)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미래의 심판을 미리 보여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의 예언적 서술과 연결됨으로써, 이 칭호는 유다교와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됩니다.
③유다 묵시문학의 사람의 아들은 영광스러운 존재일 뿐이지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요한의 묵시록이 수많은 묵시문학 중에서 교부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공포와 두려움이 주제가 아니라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영광이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④따르는 무리중의 다른 하나는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운명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이 사람이 따르는 날은 그러므로 연기되어있습니다. 장례의 의무는 유다인들의 기본덕목인데 이를 다른 이에게 맡기라는 표현은 세상과의 결별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단호한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나아감에는 기회가 있다는 뜻이며, 따름의 우선적인 선택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제자가 될 사람의 조건을 분명히 하십니다. 여기에서 죽은 자들은 하느님의 길을 찾지 못한 자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는 내가 주님을 따르는 조건이 자유로워지면 그때(장례도 치르고)따르겠다는 뜻인데 예수님 말씀인즉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풍랑을 가라앉히는 사건은 풍랑과 같은 인생의 자연적 요소들 앞에서, 죄의 용서에 있어서 권한과 능력을 가지신 분을 따르라는 선택을 위한 촉구의 말씀을 치유의 사건들 사이에 배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더욱 철저한 투신을 위한 일화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다(The calming of the storm);8,23-27(마르4,35-41 ;루카8,22-25)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8,23-27)
① ‘풍랑’의 직역은 ‘지진’입니다. 폭풍이 불어오는 호수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지진의 상황은 묵시문학의 고전적 표현이며 종말론적 표상이 되는데 구약성경의 탈출 19,18; 1열왕 19,11; 욥 38,1;40,6 그리고 마태 27,51.54의 예수님의 부활하실 때 등입니다.
②예수님의 기적사화는 ⑴사람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치유사화와 ⑵자연적인 기적사화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자연적 기적사화를 대할 때는 전후의 상황과 그 의미를 바로 보아야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힘으로써 믿음이 얼마나 위협 받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③바다의 풍랑사화는 교회(敎會)생활의 한 모습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의 세상에서 교회인 배 안에서 흔들립니다. 다만 흔들리는 것은 배(교회)일 뿐입니다. 파도에 뒤덮이는 것도 배일 뿐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내가 지금 함께 있지 않느냐?...예수님께서 일어나시어(부활하심과 같은 단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바다는 고요해졌습니다.
5.가다라의 마귀들린 자(The demoniacs of Gadara);8,28-34
(마르 5,1-20;루카 8,26-39)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8,28-29)
①‘가다라’는 데카폴리스지방에 자리 잡은 그리스식 마을로서 갈릴래아 호수 남동쪽 1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있습니다.
②“때가 되기도 전에”와 “여기에”라는 말은 공관복음 병행구 중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이 “때”는 모든 마귀가 완전히 힘을 빼앗기게 되는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으심은 악의 세력에 짓눌린 인간의 최종적 치유를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예고하시면서 이교인들의 땅에서도 활동하심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이 두 말마디는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곧, 이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상기시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③자신이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마귀들린자의 말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됩니다. 무신론은 신의존재를 부정하며 모든 영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있는데 신을 믿지 않으면 무신론자입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므로 불교도들은 무신론에 속합니다. '신이 없는'이란 의미의 부사 ἄθεος(아테오스)는 교회 안에서 신앙인답지 않은 사람에게 쓰였던 말입니다.
④‘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8,31-32)
돼지 떼의 일화는 부차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의 구마사들과 사람들의 사고에 의하면 마귀는 다른 피신처를 찾아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돼지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더러운 짐승이었습니다. 마귀가 들어갈 곳이라고는 돼지 떼였을 것입니다. 돼지들의 익사는 악의 권세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화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거부는 앞으로 제자들의 선교활동에도 따라다니게 될 것들입니다.
6.중풍 병자를 고치시다(Cure of a paralytic);9,1-8 (마르 2,1-12 ; 루카 5,17-26)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1-8)
①“당신께서 사시는 고을”의 직역: “당신의 고을.” 마르 2,1에 따르면 카파르나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세금을 내시기 때문에(17,24-27 참조) 이렇게 불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②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은 병자와 친구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의 직역-너의 죄는 용서되었다. 당시의 사고는 죄로 병이 옵니다. 이 중풍환자는 그들 사고대로라면 죄인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그들 생각에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일어나서 걸었으므로 죄가 사해진 것이 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스스로 죄인이라고 자책하는 환자에게 어느 쪽이 더 빨리 은혜를 알아듣겠느냐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④이 부분은 죄의 용서에 관한 신학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이제 독자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표징들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선택을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Eating with sinners ); 9,9-13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나를 따라라.”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9,9-13)
①당시 세리는 일정 금액을 로마정부에 납부하고 나머지 징수는 세리 마음대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동족을 착취하고 로마정부를 속이는 세리들은 살인자 강도와 동질의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②복음서에서는 세리가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즉시 따라가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 세리는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던지는 도전장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③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이 집은 루카에 의하면 레위의 집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와 마태오복음서 편집자가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레위라는 인물이 마태오공동체의 중요인물임을 감안하여 이 편집자가 마태오로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고 세리를 예수님의 중요 제자가운데 포함시키기 위해 편집자가 이름을 마태오로 바꾸었을 수도 있습니다.
④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不淨)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유다교 라삐들의 중요한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뜨리십니다.
⑤9,13 너희는 가서‘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칠십인역에 따라 호세 6,6을 인용한 구절인데 제사 자체가 원칙적으로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근본 계명을 소홀히 할 정도로 전통적 종교 의식에만 매달리는 자세가 단죄를 받는 것입니다.
▶단식 논쟁(A discussion on fasting);새것과 헌것 (마르 2,18-22 ; 루카 5,33-39)
①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와서 단식 문제를 거론합니다. 우리선생님과 우리들, 그리고 바리사이들 모두 단식 하는데 당신과 당신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세례자요한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그가 죽은 뒤만이 아니라(11,2; 14,2; 루카 11,1; 요한 3,25; 4,1; 사도 18,25; 19,1), 2세기 말까지 존속하였습니다(사도 18,25;19,1).
②신랑의 상징은 일반적으로 하느님, 때로는 메시아, 여기에서는 예수님자신을 가리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즐거운 잔치에 단식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후에 신랑을 빼앗겼을 때 기꺼이 단식에 동참할 것이다는 말씀으로 폭력에 의한 이별을 예고하십니다.
③9,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예수님께서는 새것과 옛것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오신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옛것이 새롭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수정하는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유다교의 전통은 보존되어야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유다교의 전통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7.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8.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9,18-26
①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두 가지 기적사화입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는 이 부인은 군중가운데 있지 못하는 부정한 여인입니다(레위 15,19-3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9,20-21)
모세는 옷에 술을 만들어 달고 술을 볼 때마다 모든 계명을 기억하라고 명했습니다(민수 15,38-41;신명 22,12 참조). 예수님께서도 신심 깊은 유다인들처럼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니셨습니다. 하늘을 상징하는 자줏빛 실 한 가닥이 끼여 있는 이 술은 하느님의 계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 술을 중히 여겼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사실 치유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술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보이지만 예수님을 향한 단순한 신뢰의 이 마음을 예수님은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했었지만 이제 이 여인은 아무 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은혜를 받았을 뿐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하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받기에 가장 적합한 준비입니다. 불행하게도 매우 쉬울 것 같은 이 은총의 받아들임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얼마나 단순해야 하는 것인가?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응답은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 구원(쏘조;σώζώ)이라는 이 용어로서 육의 치유와 구원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대신에 “네 믿음이 너의 병을 낫게 하였다.”로 옮기기도 합니다.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오는 이 말은(마르 10,52; 루카 7,50; 17,19; 18,42)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네 믿음이, 구원을 주는(또는, 병을 고쳐 주는) 나와 네가 관련을 맺게 해 주어 너의 병을 낫게 하였다.’ 둘째, ‘네 믿음이 네가 구원을 받게(또는, 너의 병을 낫게) 준비시켜 주었다.’ 셋째, ‘너의 믿음 자체가 너의 병을 낫게 만들었다.’
②회당장은 가망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에게 생명을 돌려주십니다. 루카복음의 병행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루카 8,53).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9.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10.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9,27-34
27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①이 이야기는 예리코의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신 일화와 흡사하면서도(20,29-34) 마태오 이전 전통에서 유래합니다. 사실 마태오의 고유한 경향과는 반대로,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이들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엄히 분부하시십니다. 이러한 금령의 동기는 틀림없이 눈먼 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의 칭호로 부른(27절) 사실에서 나올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군중이 메시아를 일컫는 칭호입니다. 그들의 메시아관은 정치적이며 복잡하고 집착성이강합니다.
②사람들이 마귀 들린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옵니다. 벙어리가 곧 말을 하자 군중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했고 바리사이 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는다고 말합니다(9,34). 예수님의 활동이 유다인들 사이에 일으키게 되는 논쟁과 분열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이 34절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8⸺9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전함으로써 그분께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면서 또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선명하게 대두시키고 있습니다.
Ⅲ.12사도의 파견(The instruction of the apostles) [10장]
◉10장은 제자들 가르치시고 파견하시는 파견설교인데 9장 35에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5-38)
①마태오는 이러한 예수님 활동의 요약으로 새로운 단락을 준비합니다. 이 새 단락에서는 열두 제자가 파견되고(10,5-15), 이어서 다른 문맥들에서 유래하는 여러 단락들이 덧붙여집니다(10,16-42).
②‘가엾이보다’는 연민하다, 함께 괴로워하다에서 온 동정심, 측은히 여김의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제자 파견의 목적이며 제자들의 사명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일은 이러한 사상에 기초합니다. 마태오는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신 분으로 여기시는(10,6; 15,26; 루카 19,10) 예수님의 자세를 환기시킵니다. 같은 내용이 빵을 많게 하시는 일화와 관련하여 마르 6,34에도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제자들의 사명 수행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곧 착한 목자의 자비심입니다.
③38절의 “수확”은 일반적으로 최종 심판을 가리키는데(3,12), 여기에서는 그 심판이 바로 예수님의 시대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마르 4,29; 요한 4,35-37 참조). 곧 예수님과 제자들의 직무 수행으로 이미 심판이 이루어집니다(10,15 참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다가왔기 때문입니다(3,2; 4,17; 10,7).
1.열두 사도의 파견(The mission of the twelve); 10,1-4
(마르 3,13-19 ; 루카 6,12-16)
10장 전체의 내용은 파견을 위한 말씀으로 묶어 편집된 파견된 자의 태도와 자세를 당부합니다.
①열두 사도의 이름 10,1-4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②사도의 그리스말 아포스톨로스(ἀποστόλους)는 파견된 자, 전권을 위임받은 자입니다. 파견하신 분은 아포스텔레인입니다.참 행복 선언의 말씀을 들은 군중가운데 12이라는 강력한 그룹이 부상하게 됩니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께서 당신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시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도”라는 용어가 그리스 말 본문에서 루카 복음서에는 6번(13절; 9,10; 11,49; 17,5; 22,14; 24,10), 마태오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는 각 1번(요한 13,16에서는 문맥에 따라 “파견된 이”로 옮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2번 나옵니다.
③베드로라고 하는 시몬; 베드로는 아람말 케파(바위)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말 페트로스(petros)는 남성형, 반석은 페트라(petra)여성형입니다. 베드로는 16,18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새 이름을 부여하는 이는, 아버지가 자식들에 대하여 권리를 지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 대한 권한까지 지닙니다(2열왕 23,34; 24,17). 그리하여 그 이름이 효력을 갖도록 그에게 새로운 운명을 지워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새 이름을 지어 주는 분이 하느님이실 경우에 그러합니다(창세 17,5.15; 32,29).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이 부여된 사실을, 복음서들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상당히 나중에, 곧 시몬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에 이어서(마태 16,18), 요한 복음서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첫 만남에서(요한 1,42), 마르코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열두 사도를 뽑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마르 3,16).
④신약 성경에는 사도들의 명단이 네 번 나오는데, 무엇보다도 베드로에 이어지는 세 이름의 순서가 서로 다릅니다. 여기와 루카복음서 6,14 명단에 나오는 순서가 틀림없이 원순서일 것입니다. 마르 3,17에서는 안드레아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뒤로 가는데, 이 두 형제는 베드로와 함께 특권적인 ‘삼인조’를 이룹니다. 사도 1,13에서는 요한이 야고보 앞으로 가는데, 이는 틀림없이 요한이 초대 교회에서 수행한 주요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⑤“열혈당원”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카나내오스인데, 이는 ‘열혈당원, 열성주의자’를 뜻하는 아람 말 칸안을 음역한 것입니다. “열혈당원”은 폭력적인 방법으로라도 유다 국가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종교적 당파의 구성원입니다. 이 두 번째 시몬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이 단체에 속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⑥타대오는 루카복음서에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나옵니다. 타대오에 관해서는 수사본들이 엇갈립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주요 수사본들에는 마르코 복음서의 대부분의 수사본처럼 타대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의 다른 많은 수사본에는 레배오스 또는 “타대오라고 하는 레배오스”로, 또 다른 몇몇 수사본에는 (루카 6,16처럼)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는 “열혈당원 유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열두 명이라는 전통은 잘 보존되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후대에 가서 지역마다 조금씩 잊혔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⑦이스가리옷에 대한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데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해석이 있습니다. ⑴크리욧출신 ⑵예리고 출신 ⑶초대그리스도인들이 붙인 거짓말쟁이 라는 뜻의 호칭 ⑷ 열혈당원이라는 라틴말 시카리우스(sicarius-자객,암살자)의 셈족말 음역 등이 있습니다.
⑧제자들은 여러 계층입니다. 어부, 세리, 혁명당원. 혁명당원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가담하였고 가리옷 유다도 가능합니다. 혁명당원과 세리가 예수님 공동체 아닌 곳에서 만났다면 세리는 암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전에 누구였고 지금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가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보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21세기의 교회안에서도 다양한 학력, 직업 연령 등이 조화를 이루어야함은 물론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 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6-29)
▶열두 사도(apostles;ἀποστόλους)’의 이름; 영어,그리스어
베드로(Peter;Πέτρος)라고 하는 시몬(Simon;Σίμων)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Andrew;Ἀνδρέας). 제베대오(Zebedee;Ζεβεδαίου)의 아들 야고보(James;Ἰάκωβος)와 그의 동생 요한(John;Ἰωάννης). 필립보(Philip;Φίλιππος)와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Βαρθολομαῖος). 토마스(Thomas;Θωμᾶς). 세리 마태오(Matthew;Ματθαῖος). 알패오(Alphaeus;Ἀλφαίου)의 아들 야고보(James;Ἰάκωβος)와 타대오(Thaddaeus;Θαδδαῖος).열혈당원 시몬(Simon the Zealot;Σίμων ὁ Κανανίτης) 그리고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Ἰούδας ὁ Ἰσκαριώτης).
▶사도 마티아 Matthias; Ματθίαν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가리옷 유다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는 11인이 되는데 그 자리를 마티아가 채웁니다(사도 1,15-26). 열둘이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새롭지만, 아브라함과 선조들에게 약속된 12지파의 상속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티아는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 동행한 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사도 1,21-22).
이제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님 안에서 그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이 성취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치유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을 수용하는 행위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제부터 제자들은 이러한 진리를 선포해야합니다.
2. 파견장소 10,5-7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10,5-7)
①기원전 721년에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뒤, 수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혼혈 민족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그리짐산 위에 자기들만의 성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요한 4,20).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순수성이 없는 이들을 유다인들은 멸시하면서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위의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깊은 분단을 인정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데에서는 그러한 분단을 문제 삼으시고(루카 10,30-37; 요한 4,4-48), 부활하신 뒤에는 그것을 없애십니다(사도 1,8 참조).
②이방인과 사마리아 식 혼합 종교 방식을 멀리하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사마리아, 이방인지역에 가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교를 우선 유다로 제한하셨다고 보아야합니다. 현실적으로 제자들은 이방인들에게 나아갈 준비가 아직 되지 못했습니다.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는 사도 바오로가 담당할 것인데 그것을 위해 사도 바오로가 치른 대가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③‘보내다’라는 동사에서 특수 사명을 띠고 파견된 이라는 뜻의 ‘사도’(또는, 사자)라는 명사가 나옵니다. 유다교에도 공식적인 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는 원칙이 통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5,24, 특히 요한 복음서에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이로 말씀하십니다(요한 3,17.34; 5,36-37; 17,3.18 등).
3. 선교사의 자세 10,8-15
10,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은 나병의 치유,마귀를 쫓음과 같은 하느님이 아니면 주실 수 없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0,9-11)
전대를 소지하지 않는 것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수고한 곳에서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의 마땅한 사람은 선교의 협력자가 될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더 좋은 곳을 찾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 포함 되고, 랍비들은 문하생들이 내놓는 것으로 살아가는 권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0,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발의 먼지를 터는 것은 고대근동의 풍습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나의 선교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좌절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면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4. 예견되는 박해 10,16-23 (마르 13,9-13 ; 루카 21,12-17)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10,16-23)
①“의회”는 그리스 말로 쉬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아람 말로 산헤드린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와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구에서만(13,9) 이 말이 복수로 쓰입다. 예루살렘의 “최고 의회”에 준하는 지방의 의회들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루살렘 최고 의회는72명의 대사제, 수석사제, 율법학자, 바리사이 등으로 구성되었고, 지방의회는 그곳 회당에 속하는 유다인 가운데에서 주요 인물 23명으로 구성되는데, 예루살렘의 최고 의회에서 다루지 않는 사항들과 관련하여 법정 구실도 하였습니다. 이 법정은 회당에서 열리고 바로 그곳에서 “채찍질” 같은 체형도 가해졌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는 지방 의회들이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데, 위의 구절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②복음선포는 뚜렷한 목표를 겨냥해야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복음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 상황이 이리 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공격적인 사람들 안에서 자신이 흡수되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슬기로움입니다. 모든 공격에 대항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박해라는 대결상황을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마태오 공동체가 이미 겪고 있었던 유다인들로부터 비롯된 박해로부터 지혜롭게 처신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박해는 서기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끝났으나, 유다인들이 로마에게 사주하여 그후부터는 로마의 박해가 시작됩니다.
③‘다 돌기 전에’는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오심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 예언자들의 방식에 따라 미래의 사건들을 임박한 것으로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5. 복음선포의 자세 10,24-33
10,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열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제자는 스승과 다른 운명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스승처럼 제자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운명이 되며 자신의 모든 행위를 통하여 예수님처럼 자신을 표현하며 신념으로 자신을 지켜야합니다.
10,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이러한 제자들의 선포를 들어야 할 이들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위의 표현에서는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제한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 선포의 대상인 것입니다.
10,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①여기에서 마태오는 인간을 ‘영혼(soul; 그리스어 프쉬케 ψυχική)과 육신(body;그리스어 쏘마 σῶμα)’으로 구분하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의 철학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사고방식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곧 육신은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며 영혼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동물에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삶의 원리,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 그 자체, 생명의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요소를 가리킵니다.
②박해자들은 나를 공격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굴욕감을 주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영역인 이 영혼은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하느님이 계신 고귀한 영역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담대한 신념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③한 닢의 “닢”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서 쇠돈 가운데 하나인 아스를 가리킵니다. 이 말은 현재의 문맥에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왜 죽는지, 또는 누가 죽이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제자들이 죽을 때에 하느님께서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데 제자들이 복음을 위하여 죽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 곧 그들의 죽음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의미를 지니리라는 것입니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예수님의 운명과 결부시키는 증언을 말합니다. 안다고 증언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6. 분열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Jesus, the cause of dissension) 10,34-36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의견충돌의 원인이 예수님 자신이 됩니다. 제자들은 이 모든 대립 상황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데 당시 공동체와 우리 모두에게도 중요한 선택이 됩니다. 여기에서 칼은 폭력이아니라 분열을 의미합니다. 가정 내의 이념의 대립, 율법의 새로운 해석에 의한 대립과 갈등도 포함됩니다.
사실 진실에 직면 한다는 것은 매우 아픈 일입니다. 자신의 위선을 깨어 부수고 알맹이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아픈 일입니다. 진실은 때로 우리 존재를 뒤흔들어 매우 아프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각자 진실에 직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통의 틀을 고수하는 유다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습니다. 너무나 투명하고 눈이 부셔서일 것입니다. 내 일상에 매서운 충고를 주는 칼이 되어 그분의 말씀이 늘 사모치고 각성의 시간이 되고 옷매무새 다시 하듯 정신을 가다듬는 매일의 거울이며 지침이어야합니다.
7. 버림과 따름(Renouncing self to follow Jesus) 10,37-39 (루카 14,25-2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0,37-39)
①준엄하게 들리는 이 단락은 예수님을 직접 추종하는 제자됨의 합당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의 합당함을 의미합니다.
②여기에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필레인(φιλῶν)은, 공관 복음서에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동사 아가파오(ἀγαπάω;명사 아가페 ἀγαπή)와는 다릅니다. 이 필레인이 우리말에서는 ‘좋아하다’로 옮기기도 하는데 친구나 가족을 좋아하다 또는 사랑하다에 사용합니다.
③십자가를 요구하는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로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자주 십자가를 만납니다.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십자가를 만납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진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각 개인의 절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와서 보라 하셨듯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전적인 따름에는 먼저 모든 것을 버리는 고통이 전제됩니다. 모든 것을 얻고도 자기 자신 즉 생명을 잃으면 참으로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자신의 가치추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잃고, 그분을 향한 지고한 신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절제하고 희생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적 관계를 통한 구원 사상이 깃들어있습니다.
④‘얻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발견하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히 자기 목숨을 얻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 목숨을 얻으려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 제 목숨을 확보하고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10,40“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비슷한 표현이 18,5에도 나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라는 생각은 유다교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사도가 어떤 의미에서 파견하신분과 같다고 말하는 근거는 사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그가 실행하는 사명, 그가 수행하는 기능, 예수님께서, 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말씀 덕분에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받아들임’은 단순한 손님 접대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이 전하는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순종입니다.
10,41“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예언자”와 “의인”은 13,17과 23,29에도 함께 나옵니다. 이 용어들은 구약 성경과 유다교에서 자주 쓰는 어휘에 속하는데 여기에서 ‘예언자들과 의인들’은 1세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그렇게 불리던 이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사도들을 가리키는 “너희”와 동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곧 사도들은 구약 성경의 예언자나 의인과 같다는 뜻입니다.
10,4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작은 이들”은 우선 사도들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제자라서”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모든 제자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보다 더 가능성이 크기로는,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박해 때문에 가장 불우하게 된 이들, 그리고 가장 빈곤하게 된 이들일 것입니다.
Ⅳ.부록 영적치유
영을 기초로 하는 개인의 영성(靈性)은 인간의 지성으로 확신하는 가장 이상적인 것을 수용하고, 이것의 실천을 위하여 전 존재를 투신하는 지고의 가치입니다. 영성에는 자신을 지배하는 힘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인간의 총체적 생명과 연관 되며, 생명의 근원자, 창조자, 존재의 터전과도 이어져 있습니다. 영성은 그러므로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영성은 인간성 본래 모습이며 “하느님의 형상”(창세 1,26-27)에서 이해 되어야합니다.
영적인 병은 인간의 정서와 인간관계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고, 심지어 육체적인 질병까지도 초래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영적인 삶을 회복시키는 것이고, 구원은 인간이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리스도께로 향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체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다시 태어나는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함께 일어나게 되며, 영적인 치유는 그 사건을 기초로 가능하게 됩니다.
❋다음 내용은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 <뜨거운 마음으로 With Burning Hert> )의 루카복음서 24,13-35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영적 회복의 3단계를 요약하여 설명한 내용입니다.
1단계 고백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귀향은 허무, 낙심, 환멸, 절망 그런 것 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매우 우울하였습니다. 고대하던 해방을 걸었던 예수님. 한때는 그들의 삶을 온통 바꾸어놓았던 분. 용서,사랑,자비, 관용, 이러한 아름다운 말들이 실재로 그분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참으로 황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그분이 사형을, 그것도 십자가에 처형된 것입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막막하고 어두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가까이 가시어 그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절망을 함께나눕니다. 절망이란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암울한 체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었을 때 다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들 자신 마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던 것을 잃었고, 결혼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면서 자신에게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무언가 월등하게 빛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결혼과 더불어 피차에 가능성을 잃었고, 나이 들어가면서 젊음을 잃었고, 지혜도 총기도 분별도 잃어버렸습니다. 얻은 것이라고는 나이 뿐입니다. 친구도 잃고 사랑도 잃었으니 죽을 때는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이제 잃는다는 것에 만성이 되어 우리들은 마음속에 깊은 상실감들을 간직하고 쓸쓸하게 중년을, 아니면 노년을 혹은 청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때는 젊은 희망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웃을 사랑하고 관용을 베푸는 멋들어진 사람이 되리라고 마음먹은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웬일인지 관용을 베풀기는커녕 이웃의 공격에 방어하는 태세로 살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별로 멋진 인간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실감의 깊은 곳에 더욱 심각한 우리 믿음의 상실이 있습니다.
희망의 상실감, 그것을 회복해야합니다. 기도, 미사, 성사, 즉 신앙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확신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사람들만 스승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신앙생활에서 성사의 치유가, 기도의 평화가, 미사의 찬미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잃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처럼 주님께 우리 절망을 이야기합시다. 나는 모든 것을 주님 당신께 걸었는데 웬일인지 나는 기쁨이 없고 용기가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내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러면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다가오셨듯이 그분이 내게 오셔서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부서진 마음에 그분이 오십니다. 잘게 부수어진 땅으로 빗물이 스며듭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2단계 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절망 안으로 오시어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전례에서 독서, 복음을 선포할 때 ‘주님의 말씀입니다’ 라고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할 때 나에게 말씀은 그 신비와 영을 잃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
듣는 이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대화를 하는 도중 자신들의 마음에 새로운 무엇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 느낌은 그들의 절망보다 강했던 것입니다.
우리생각에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상황을 무조건 받아들여서 희생 잘하고 인내 잘하는 모범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인 즉, 고통은 고통이며 가난은 가난이며 병은 병이고 죽음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각자가 처한 엄연한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주시는 생명이 절망보다 강하다는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존재 한 가운데 죽음 같은 절망을 밀어내버릴 수 있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드디어 영성적 생활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새로운 생명이었습니다.
모자이크는 넓은 면에 여러 빛깔의 조각들을 붙여 빛깔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장식미술입니다. 한 가지 색으로는 장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쁨,고통,근심,성공,좌절 실패 등 우리 삶의 조각들은 나름대로의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사건들은 그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에게 처절한 아픔이던 것이 지금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자이크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 때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 삶 안에 시시각각 생기는 문제들 그 자체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지 말고 그 사건의 전 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떨어져서 나의 인생을 바라볼 때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문제점들을 찾아 다른 빛깔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과 내 삶의 한 부분과, 하느님의 영과 우리의 전 인생이 하나의 물결로 흐르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을 믿을 때, 우리 영혼은 자유롭고 자유로운 비인 마음에 성령은 우리 안에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적인 치유입니다.
3단계 예수님을 모셔 들임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24,28)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24,30)
그들은 예수님을 집안으로 모셔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그분이 ‘떼어주신 빵’을 받아 먹은 후였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성체성사로 오십니다. 그분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순간에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십니다.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예수님의 육적 현존은 더 이상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분이 마음 속에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을 얻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치유입니다. 우리는 길동무가 되어 당신의 현존을 알려주시는 그분의 말씀에 전 존재로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영적 치유는 그러한 과정 동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경험이라해도 그분을 모셔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은 영원히 낯선 나그네일 뿐입니다. 내가 비록 영의 체험을 하고 기도 하는 시간이 24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만 뜨거우면 이웃이 그 불에 대어서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 안에 모셔 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닮게 됩니다.
<마태오복음서 [10]-④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