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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서

마태오 복음서 [2] 3―4장 하느님나라의 선포 [The Kingdom of heaven proclaimed]

by 써니리버 2024. 10. 22.

1. 세례자 요한  2.예수님의 세례  3.광야의 유혹  4.갈릴래아 전도의 시작  5.예수님의 첫 제자

3장에서부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마르코, 루카복음서처럼 

❶세례자요한의 설교(The preaching of John the baptist;3,1-12) 

❷예수님의 세례(Jesus is baptised;3,13-17)

❸광야의 유혹(Temptation in the wilderness;4,1-11)

❹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고(The first four disciples are called;4,18-22)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는 4단계로 구분됩니다.
 
1.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Ἰωάννης ὁ βαπτιστὴς)
(마르 1,1-8 ; 루카 3,1-18 ; 요한 1,19-28)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3,1-2)
①유다광야는 마태오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표현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광야는 예루살렘에서 남쪽 헤브론까지 이어지는 산들과 사해 또는 북쪽의 요르단강 하류 사이에 있는 황량한 산악지대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광야에 오늘날의 수도원과 같은 쿰란공동체의 유적지가 발견되었고 부근에서 구약성경 수사본들을 포함하여 많은 문헌들이 발견되었습니다(1947년). 마태오는 지리적인 관심보다는 광야의 성서적인 의미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는 세례자요한이 생활하는 곳을 가리킬 것입니다. 
②세례자는 회개를 요구하며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세례자의 출현과 회개의 외침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상과, 선민의 의무인 율법준수가 구원이라는 당시의 사고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③보통 회개라는 말로 사용하는 ‘돌아오라’는 의미의 메타노이아(metanoia;μετάνοια)는 구약성경에서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 ‘니함’과 ‘슈브’를 그리스적 思考로 번역, 70인역(LXX;Septuaginta)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니함’이 돌아섬의 내면의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라면 ‘슈브’는 돌아섬의 외적 상태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εῖω)는 마음을 바꾸다,뉘우치다,회개하다의 뜻이며 명사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입니다. 본디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사람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타노이아는 인간의 내.외적인 면의 회개를 서술하는 단어로서 영어는 conversion(굿뉴스바이블;바꾸다, 회심, 귀의하다, 전환), repent(예루살렘바이블;후회하다, 뉘우치다) 등으로 번역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회개를 요구하시는데 세례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세례자의 경우 회개의 동기가 되는 요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탁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④하느님을 직접 발음하기를 삼가하는 유다의 관습에 따라 마태오복음서는 ‘하느님의 나라’대신 ‘하늘나라’라고 씁니다. 마태오 복음서 그리스 말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12,28; 19,24; 21,31.43에만 나옵니다. 여기에서의 하늘나라는 이 나라가 천상적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께서 땅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은 장소가 아니라 거룩함의 영역을 뜻합니다. 
⑤그리스어 ‘나라’ 또는 ‘왕국’은 그리스말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차원으로는 다스림, 왕권, 통치권을 의미하고 다른 의미로는 영역 또는 공간의 뜻이 있고 영토적인 의미로서는 왕국, 국가, 제국 등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나라는 하느님께서 행사하시는 주권, 통치, 활동을 뜻합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하느님께 속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⑥‘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⑴이 나라가 바로 옆에까지 와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왕국의 보편적이며 임박한 도래 또는 돌입을 예고하신다. 
⑵이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것이다. 또 이 말은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인격체와 활동 속에 은밀하게 시작되었지만 즉시, 모든 이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광야 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3,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이사 40,3은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고 되어있습니다. 마태오를 비롯한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칠십인역에 따라 이사 40,3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말 본문과는 달리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들은 칠십인역의 “우리 하느님”을 “그분”으로 고쳐, 이 성경 구절이 예수님께도 적용될 수 있게 만듭니다.쿰란공동체는 광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신약성경은 ‘광야에서 외치는’세례자의 역할로 이해하였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로 오시는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것입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3,5-6) 
이 “세례”는 요한이 모든 이에게 단 한 번만 주었기 때문에,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이 매일 거행하던 침수(沈水) 의식, 곧 정결례(淨潔禮)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는, 유다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유다인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정화해 주는’ 의미의 세례와도 같지 않습니다. 요한은 백성의 회개를 촉진시켜, 결국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를 준비시킵니다(11절).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3,7-8)
①바리사이 사두가이가 함께 등장하는데 본디 이 두 파는 직무가 다르지만(블로그 sunny river 신약성경입문참조) 복음서에서는 다른 의미로 함께 거론되며 다른 곳에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함께 나옵니다.그런데 루카 복음서의 병행 구절에는(3,7-9) “군중”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②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이 세례자를 찾아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속죄의 예식을 조석으로 거듭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 예수님에 의하면 경건한사람들의 회개가 힘듭니다. 경건한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인이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바리사이들의 격렬한 적개심을 일으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경건함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는 이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부릅니다. 광야의 독사는 숨어 있다가 공격하며, 지진 등 위험이 감지 될 때 독사가 제일 먼저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③진노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종말의 심판이 곧 내리리라고 예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온순하고 겸손한 종으로(12,18-21),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진노에서 구해 주시는 분으로(1테살 1,10)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④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특정한 신심행위나 도덕적인 행동이아니라 사람의 전반적인 행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의 삶으로 회개를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속죄 의식, 단식, 기도의 결과를 행실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는 물론 하느님의 은혜를 만나는 성사이지만 하느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단호한 의지가 동반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3,9-12) 
①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당장에 만드실 수 있다! 선민의식도 분쇄하는 세례자요한! 말라키예언 이후 400년 침묵을 뚫고 울려온 외침! 그는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이정표였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가리켜 주고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죄의 근원을 넘어서는 법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요한은 의로움을 회복하는 길을 회개의 세례에서 찾습니다. 
②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백성의 회개를 촉진시켜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를 준비시키는 정화(淨化)의 의미를 지닌 세례입니다. 구원의 세례라는 이 외침은 大회개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상과, 선민의 의무인 율법준수가 구원이라는 당시의 사고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부르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세례는 물의 세례로서 하느님나라를 시작하는 입문일 뿐입니다.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③성령의 그리스말 프네우마(πνεύμα)는 바람, 영, 숨의 뜻입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뒤에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은 다른 차원의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불 역시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이면서(말라 3,2; 즈카 13,9) 또한 하느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를 성령의 세례와 불 즉, 심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④물의 세례도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의 세례는 특별한 의식의 세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돌입하게 되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의 의미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3,3).”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존재 방법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믿는 이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한다(로마 6,3-5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사람은 과도한 욕심,공중누각과 같은 꿈, 과거의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묻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깊이 잠든 사람은 쉽게 깨울 수 있지만 잠든 척 하는 사람은 결코 깨울 수 없다고 했다. 
불교의 선(禪)어록집에 大死一番이 있다. 가도와키 가키치신부의 <선과 성서>에서 대사일번 절후소생을 한 인간의 단호한 결단으로 언급한 부분이 있다. 크게 한 번 죽는다는 이 말은 불교에서는 비움의 실천을 말하는데, 전등록에서 진 선사(先師)는 ‘반드시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 스스로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놓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만은 안 된다고 한다. 진 선사는 말하기를 大死一番하여,한 세계를 단절하고 다시 태어나는 절후소생 絶後蘇生 하면 비상하고도 아름다운 삶이 있다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다 (마르 1,9-11 ; 루카 3,21-2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3,13-16) 
①세례자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말리는 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주실 세례가 자기의 수세(水洗)보다 우월함을 설교에서 드러내었듯이, 예수님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이 구절은 세례자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 제자들 사이의 논쟁이 될 만한 모순을 분명히 종결합니다. 당신이든 나든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전 생애가 사실 이 한마디 말에 담겨있습니다.
✽예수님 생존시부터 1세기의 교회시대까지 세례자요한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세력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그리스 말 쉬네드리온 συνέδριον, 아람 말 산헤드린Sanhedrin; 유다인들의 민사와 종교 문제를 다루는 최고 의회)에 의해,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표현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셨고 로마황제에 대항한다는 산헤드린의 고발로 로마인의 손에 처형되셨다. 반면 세례자요한은 헤로데에 대항하다 운명한 순교자로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요한복음서는 세례자요한에 대해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 1,8) 고 증언한다.
②유다인들은(죄가 없으므로)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침수의식은 이방인의 개종의식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획기적인 운동이 세례자를 통하여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회개운동을 시작한 이 시기가 백성들 앞에 나서야할 때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③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충실성을 가리킵니다(5,6.10.20; 6,1.33; 21,32).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그 뜻이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뜻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그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 또는 예수님의 이 세례가 승리의 구세주를 고대하는 유다인들의 꿈(정치적 해방을 기대하는 메시아觀)에 대해 처음으로 공적 반론을 제기한다는 사실입니다.
④성령을 비둘기 모습으로 많이 표현하고 있지만, 이 “비둘기” 상징에 관해서는 아직도 만족할 만한 설명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라, 비둘기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 창조 때에 심연의 물 위를 감도신 성령을(창세 1,2) 비둘기 모습으로 연상한 또 다른 유다인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복음서의 이 비둘기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킨다고 여깁니다. 
노아의 방주에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온 비둘기(창세 8,11)를 연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
①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섞여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복음서 전통은 예언 말씀을 상기시킵니다(17절). 죄인들과 어울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인용구는 2사무 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 2,7과(“너는 내 아들”) 이사 42,1을(“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합성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아직 이사 53장처럼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은 아니지만,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이사 42,2. 그리고 마태 12,18-21), 또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는”(이사 42,4) 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태오는 이러한 구약 성경 본문들을 섞어, 임금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예수님 안으로 합치고 있습니다.여기에서 ‘마음에 들다’는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선택의 의미입니다.
②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울려 퍼진 말로서 메시아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적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며 성령이 내리신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세례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드러난 예수님의 공현(Epiphaneia)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당신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현존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드러났으며 예수님의 생애 중 중요한 시기마다 나타났습니다. 
③온 백성이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십니다(마태 3,13-17; 마르 1,9-11;루카 3,21 참조). 예수님께서는 함께 세례 받는 자들과 구별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백성의 한 가운데 서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과 連帶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회개가 하느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마르 1,12-13 ; 루카 4,1-13) 

광야의 유혹 사화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유래하는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태오와 루카는 이 이야기를 논쟁 문체로 전하면서, 당신의 적대자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의 우월성을 드러냅니다. 
마르 1,12-13의 광야의 유혹사건은 매우 간략하게 기술되어있는데 그 간략한 문장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고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고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로 기록합니다. 학자들은 ⒝를 창세 2,19; 이사 11,6-9를 근거로 첫 사람으로 인하여 잃었던 낙원이 회복되고, 사탄이 정복되었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드는 하늘의 문이 열린 것으로 해석합니다. 
신명기에서 가져온 인용구들이 가리키는 것처럼(신명 8,3; 6,16; 6,13),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련을 받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등장하십니다. 또한 광야의 유혹사건이 세례와 연관되어 기술되는 것으로 볼 때 이 유혹사화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는 존재의 의미 곧,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적 목적 달성을 위해 당신의 영적능력을 이용하시지 않을 것이며, 기적을 통해 당신을 신비한 방식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새로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새로운 모세로도 그려 냅니다. 이러한 이중의 예형(豫型)을 통하여 그는 메시아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또 예수님의 세례와(3,13-17) 바로 이어짐으로써, 이 유혹 이야기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곧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모든 자녀는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셨듯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4,1-2)
①40일의 의미
40일은 한 세대가 지속되는 기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긴 시간을 가리킵니다. 또는 모세가 하느님의 산에서 지낸 시간(탈출 34,28), 엘리야가 걸은 40일(1열왕 19,8),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낸 40년을(민수 14,34)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세상에 굴복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새로운 백성을 탄생 시키십니다. 
②악마/마귀/사탄
악마(영어 devil;그리스어 디아블로 διαβόλου)/ 마귀(devil;다이모니아 δαιμόνια)
사탄(satan; σατανᾶν)/ 베엘제불(Beelzebul; Βεελζεβούλ)
성경에서 마귀들은 여러 명칭으로 불립니다. 사탄은 큰 용과 악마의 늙은 뱀(묵시 12, 9), 베엘제불(마르 3,22; 마태 12,24; 루카 11,16),벨리아르(2코린 6,15)등으로 묘사되어 있고, 단순하게 악의 세력들을 모두 일컬어 마귀나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베엘제불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분명하지가 않은데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베엘제불은 우두머리 마귀의 이름가운데 하나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미신행위를 하는 세계의 여러 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 뒤에 자신을 감추고 미신 행위를 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말의 사탄(σατανᾶν; 적대자, 거역하는 자)은 히브리말의 사탄과 아람말의 사타나를 음역한 말입니다.사탄과 마귀는 복음서에서 하느님에 반대하는 원수의 이름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것들 입니다. 악마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파괴하며 혼란과 어둠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마르 5,2-4). 그들은 강한 증오와 자만심으로 하느님께 대항하고, 인간의 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영혼을 침범하지는 못하며, 인간의 의지를 또한 완전히 점령하지 못합니다(마르 5,2-4). 신약성경에서 사탄은 악마와 같은 개념으로 인간에게 불행과 멸망을 가져오는 악의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악마 개념은 이러한 신약에서 나왔습니다. 그밖에 악마 또는 타락천사로도 사용하는 ‘루치펠’은 실제 성경 원문에 이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몇몇 신학자들의 추론에 의하면 그가 천사로서 하늘에 있던 때의 이름이 루치펠이며, 지상에 떨어진 후부터 사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름도 혼란한 악마는 사람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혼합시키며 악을 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사탄은 성서구절을 다른 의미로 인용하여 그리하여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성서의 말씀에도 자기중심적인 악의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입니다.

첫 번째 유혹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3-4)
①예수님의 생애에는 “유혹자”가 여럿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유혹의 의미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16,1)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19,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22,18)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22,35)
②신명 8,3의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탈출 16,4와 연관되어있습니다. 광야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는데, 낮추시고 굶기다가 먹이십니다. 그 이유는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말씀에 따라 백성들은 척박한 광야의 내일이 보장 안 되는 불확실한 음식 앞에서,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지를 시험받아야했습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의 유혹은 허기진 예수님에게 기적 억제라는 시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만 사용될 것이며 세상과 타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마는 기적을 행하도록 유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단지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거룩한 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위험한 유혹을 말합니다. (신명 8,3)

두 번째 유혹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4,5-7)
①성령께서는 광야로 예수님을 인도하여 앞으로 다가올 수난을 극복하는 힘을 주는 반면 악마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죽음을 피해보라고 유혹합니다. 악마의 말은 시편 91,11-12를 인용한 것입니다. 신명 8,3처럼 이 시편 말씀도 정확히 메시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모든 이스라엘인에게 해당됩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인용하는 사탄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더욱 근본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어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명 6,16을 인용한 것입니다. 
②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주제인데(탈출 17,2-7;민수 14,22; 시편 78,18)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참으시는지 보려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며,⒝이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느님의 선하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독선을 증명하기 위해 하느님을 끌어들이거나 자신의 모순적인 행동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서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스스로 악에 걸려 넘어지는 일입니다.   

세 번째 유혹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4,8-11)
①‘경배하다’의 그리스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무릎을 꿇다, 부복하다의 뜻으로서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완전한 복종을 뜻합니다. 악마는 권력과 명예를 탐내는 사람들의 지배자입니다. 그러나 세상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악마는 명예와 권력을 수난의 시련 없이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제시 하지만, 사람이 행하는 모든 열매는 수고의 대가이며 그 길을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②여기에서 ‘시중을 들다’는 ‘식탁에서 시중들다, 먹을 것을 주다’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에게서 먹을 것을 받으십니다. 이 음식은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제안을 거슬러, 당신 자신이 직접 마련하기를 거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연하게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일용할 양식도 하느님께 청하여 받으라고 가르치십니다(6,11). 또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매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면서 하느님 계획에 대한 당신의 일치를 확인하십니다. 
③광야의 유혹사화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일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 노예가 되기 때문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악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매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루카복음의 사화에 의하면 사탄은 틀림없이 다시 돌아옵니다.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④재물, 명예의 유혹은 기도생활 성실하게 하면서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하느님께서 보호해주시는지,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보게 뛰어내려보라는 신앙의 의혹을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열심히 기도해봤지만 뭐가 달라지느냐고, 그러니 이 모든 일이 내 믿음조차 다 헛일 아닌가라는 의혹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의혹은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겪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인간과 같은 입장에서 겪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준 것은 세상의 악이었습니다.
⑤지금까지 성경의 번역에 따라 ‘유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일부 학자들은 ‘유혹’을 ‘시련’으로 수정해야한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유혹은 죄로 이끌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의미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죄의 유혹을 받아 항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유혹을 받는 예수님이 아니라 시련을 당하는 예수님으로 이해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말 페이라스모스 (πειρασμός)는 검사, 시련, 시험의 의미가 강합니다. 

◉사순시기
광야의 유혹 사화는 예수님생애의 중요한 사건으로서 십자가의 수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주년은 사순시기의 첫 주간에 바로 이 복음을 읽고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듯이  교회는 우리를 광야로 가라고 합니다. 광야는 시련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합니다. 사순시기는 한 신앙인이 자신을 구체적으로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도록 마련된 시기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각 개인이 교회전례의 가장 장엄하고 성대한 부활대축일을 준비합니다.   
가톨릭 전례주년은 재림 때까지 계속되는 인간 구원 역사 안의 주요한 사건들을 해마다 기념함을 말합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주일(主日)입니다. 주일은 일 년을 주기로 주님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면서 다양하게 경축됩니다. 이는 거룩한 절기와 축일들로 나뉘어 있고, 주간 평일에도 전례 시계에 상응하여 미사가 거행되며, 다른 전례 역시 이에 따릅니다. 부활 주일(復活主日)을 정점으로, 일 년의 전례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구속 신비의 기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반 연력과 구분하여 전례력(典禮曆, annus liturgicus) 혹은 성력(聖曆, annus sacer)이라고도 하며, 성주간과 성인들의 축일을 날짜순으로 배열하여 작성한 교회의 연력(年曆)입니다. 교회력의 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1월1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사회력과 달리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첫 주의 일요일에 전례력이 시작됩니다. 
대림시기는 11월 말경부터 4주간, 성탄시기는 성탄 대축일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부활시기는 부활 주일부터 부활 후 40일 성령 강림 주일 전까지, 연중시기는 성령 강림 주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입니다.  교회력이 최종적으로 정비된 것은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 때의 일입니다.
◉재의 수요일 (라틴어  Feria Ⅳ Cinerum ; 영어  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첫날로 사순 제1주일 전(前) 수요일을 말합니다. 이날 교회가 미사 중에 참회의 상징으로 재의 축성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행하는 데서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에서는 지난해 성지 주일에 축성한 성지(聖枝)를 태운 다음, 사제가 그 재를 찍어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며 얹는 예절을 행합니다. 이때 사제는 창세기 3장 19절을 인용하여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말합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shall return.”창세3,19]

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원한 삶을 구하라는 장엄한 외침인 것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1세(재위 : 590∼604)에 의해 사순절의 첫날로 성립되었고, 1966년 바오로(Paulus) 6세(재위 : 1963∼1978)는 성금요일과 재의 수요일에 전 세계교회가 단식과 금육을 지킬 것을 명하였습니다. 재는 물건이 타고 남은 잔재입니다. 이는 인간이 범한 죄의 잔재로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상징합니다. 욥은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잿더미에 앉았습니다(욥 2,8).
 
4. 갈릴래아 선교 (마르 1,14-15 ; 루카 4,14-15)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4,12)
‘잡혔다’의 직역은 ‘넘겨졌다’인데 이 동사는 예수님과 관련해서도 쓰입니다(17,22; 26,2; 27,2.18.26).이러한 동사를 수동태로 쓴다는 것은 사람들이 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 시간을 이끄신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요한이 잡히고’는 구약이 끝나고 새 약속의 시대가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4,13-16) 
①갈릴래아는 지리적으로 이교문화가 흡수되기 쉬운 개방된 도시였습니다. 유다는 갈릴리 지역사람들이 이방문화에 많이 접촉되어 분명히 믿음을 잃었을 거라고 여기면서 그들을 이방인처럼 멸시하였습니다. ‘갈릴’은 여호 9,19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가 분배받은 땅입니다. 이 지파들은 본토 가나안을 제거하지 못했고 처음부터 가나안 문화와 혼합되었습니다. 아마도 가나안 토착문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 합니다. 
②이사야 8,23-9,1을 인용한 이 구절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지닌 예언자적 의미를 명확히 하려고 마태오는 이 부분을 크게 바꾸어 인용합니다. 이 말씀이 마태오복음서 전체를 특징짓게 됩니다. 보통 세례자 요한 또는 에네세(The Essenes,Ἐσσηνοί)와 다른 예언자들이 광야로 물러나거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를 선택하십니다. 이사야에언자가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은(북왕조) 아시리아제국에게 큰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교(異敎)의 “어둠”에 가장 크게 위협을 받고 있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을 선택하십니다. 마태오는 자기의 복음서 전체에 걸쳐 이 사실을 상기시킵니다(2,22; 3,13; 4,23.25; 28,16 참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4,17)  
하늘은 누구나 바라볼 수 있듯이 보편성과 초월성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바라볼 수는 있으되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이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인 나라입니다. 출발의 선택과 가는 길의 여정이 없이는 도착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선택은 회개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동전 하나의 앞뒤처럼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시작하셨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일을 시작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설교 직무를 장엄하게 개시하셨음을 뜻합니다. 이제부터 그분께서는 말씀과(5,1─7,29) 행동으로 (8,1─9,34)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첫 제자들 The first four disciples are called (마르 1,16-20 ; 루카 5,1-1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4,18-22) 
①기원후 1세기의 유다교에서, ‘따르다’ 동사는 보통 라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드러내는 존경과 순종, 그리고 스승을 위하여 수행하는 여러 가지 봉사를 뜻합니다. 보통 제자가 스승 라삐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부르신 경우 즉시 순종합니다. 특히 복음서의 제자들은 단순히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과 결부되어 협조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그분 수확의 일꾼으로서 스승의 일에 참여합니다. 
②요세프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갈릴리 호수에는 매일 고기잡이 배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업에 종사했음직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협조자들을 그들의 가족과 직업에서 떼어놓으시고 ‘사람을 낚는’그들의 직무를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따름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시어, 그것이 제자들이나 군중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바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16,24).
③마태오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은 루카복음처럼 드라마틱하지도 의미 심장 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마태오의 제자 들은 마르코처럼 우둔하여 통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표현도 없습니다. 마태오의 제자들은 깨닫고 인식하는데 있어서 이방인들과 구별이 됩니다. 그들은 왜 부르시는지와 제자들의 소명을 단번에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따라나섭니다. 그들은 곧 배와 가족을 남겨둔 체 따릅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무엇인가 포기해야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서면 하느님은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들려서 보내십니다. 
④4장에서 부르신 제자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 4명인데 10,2에 사도라는 이름으로 12제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열두 사도(apostles;ἀποστόλους)’의 이름
베드로(Peter;Πέτρος)라고 하는 시몬(Simon;Σίμων)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Andrew;Ἀνδρέας). 

제베대오(Zebedee;Ζεβεδαίου)의 아들 야고보(James;Ἰάκωβος)와 그의 동생 요한(John;Ἰωάννης). 

필립보(Philip;Φίλιππος)와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Βαρθολομαῖος). 

토마스(Thomas;Θωμᾶς). 세리 마태오(Matthew;Ματθαῖος). 

알패오(Alphaeus;Ἀλφαίου)의 아들 야고보(James;Ἰάκωβος)와 타대오(Thaddaeus;Θαδδαῖος).

열혈당원 시몬(Simon the Zealot;Σίμων ὁ Κανανίτης) 그리고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Ἰούδας ὁ Ἰσκαριώτης).

6.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다 (루카 6,17-19)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4,23)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나라의 통치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선포입니다. 또한 복음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모든 실천적 지침까지 담은 그 선포의 내용, 곧 마태오 복음서 전체를 가리킵니다. 첫 전도 여행은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십니다. 다니시지 않으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 사는 길을 제시하시는 산 위의 설교 부분이 5―7장까지 이어집니다. 
<마태오복음서 [10]-②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