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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46권 기본정보

구약성경46권 기본정보[8] 예언서② [예레미야서]

by 써니리버 2026. 4. 16.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18권입니다. 이중 4권의 大예언서는 이사야서.예레미야서.에제키엘서.다니엘서입니다. 大예언서에 이어지는 성경목록은 소(小)예언서는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예레미야와 관련되어 성경목록 예레미야서 다음에 위치하게된 애가와 바룩서를 제외한 호세아서,요엘서,아모스서,오바드야서,요나서,미카서,나훔서,하바쿡서,스바니야서,하까이서,즈카르야서,말라키서 등 열두 권입니다.(예언서입문은 본블로그 sunnyriver 구약성경46권 기본정보[8] 예언서① 입문참조)

46-30.예레미야  JEREMIAH ;ΙΕΡΕΜΙΑΣ(약칭 예레/Jr) 

1.이름과 저작년대
예레미야의 이름은 ‘이르메야후’ 또는 ‘이르메야’로 발음되는데 ‘주님께서 세우신다’, ‘주님께서 높이신다’, 또 ‘주님께서 던지신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예언서들과 함께 유배에서 돌아온 후 편집된 예레미야서의 최종 편집자는 분명 ‘신명기계’ 학파에 속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BC500-400년 사이에 이사야서3부가 먼저 편집되고, 예언서 전체는 BC 2세기말까지 최종 편집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원전 6세기 후반 팔레스티나에서 문학과 신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이 문헌들을 수집하고 주해하고 간추려 묶으려는 노력과 함께 연구와 편집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결론들을 이끌어 내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제국의 출현과 유다왕국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한 인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향하여 고독하게 나아가는 불나비였고 타오르는 통렬한 빛이었으며 그리고그는 수난 받는 종이었습니다. 
  
2.고독한 예언자 예레미야
①이스라엘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예언자 중 예레미야만큼 용감하고 비극적인 인물은 없었습니다. 비교적 긴 생애에 걸쳐 고통스럽게 전해야했던 하느님의 말씀은 유다는 멸망하게 되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깨어져버린 그릇’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선포 때문에 예레미야가 당한 고통은 종교사에서 감동적인 장이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에제키엘과 함께 유다의 죄를 폭로했던 타오르는 통렬한 빛이었습니다.
②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가족들에게서조차도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혼인잔치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며 혼인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데 하느님께서 자애와 자비를 거두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호소합니다(16장).예레미야는 스스로 고독한 삶을 살면서 기쁜 목소리, 즐거운 목소리도 그치게 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야합니다(16,10-13). 예레미야는 옥에 갇히고 혹사를 당하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집트로 끌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애를 마치는데, 아무도 그의 무덤을 기억조차 못합니다. 
③예레미야의 고독은 그의 본성과는 관계없습니다. 그의 고독은, 그를 압도하고 그의 의지를 온전히 사로잡은 외적 힘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 외적 힘은 예언자에게 유다 백성 한복판에서 고독을 행동 양식으로 삼도록 강요하는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주님의 말씀이다󰡓(1,4)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예언을 규정하는 통상적인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이다’ 라는 예언 전달을 위해 이와 같이 사실상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말씀이 기쁨이 되고(15,16), 때로는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기도 합니다(23,29). 말씀이 드물게 그를 찾거나, 다시 그에게 내릴 때까지 형벌처럼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듭니다(42,7). 
④예레미야가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울여야 했던 그 노력의 흔적은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은 현대의 주석가들이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부르는 대목입니다(11,18-23; 12,1-6; 15,10-21; 17,12-18; 18,18-23; 20,7-13.14-18). 이 고백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고립과 소외, 주어진 열악한 조건에 대하여 신랄한 불평을 털어놓지만, 이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예언직의 일부라는 사실을 듣고 확인할 뿐입니다. 
⑤예언서의 첫 부분에서 다른 대화들도 발견되는데, 젊은 예레미야가 말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헛고생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소명 이야기(1,4-10), 그의 예언직의 주요 요인이 되는 초기 환시들(1,11-14), 유다 사회에 내린 하느님 심판의 정당성을 예언자가 인정하게 되는 대목(5,1-6), 끝으로 나라를 황폐시킨 가뭄을 그치게 하려고 그가 헛되이 노력하는 대목을(14,1─15,9) 들 수 있습니다. 

3.예레미야의 전기적 자료
①예레미야의 활동은 유다 역사의 마지막 50년에 걸쳐 행해지는데 요시야왕 13년인 627년부터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인 588년까지의 인물입니다.
②1,1에 따르면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그의 집안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아나톳이라는 마을 출신이며, 사제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1,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습니다(1,6). 이 두 가지 전기적 정보는 예레미야가 기원전 650-645년경 태어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1,2가 제시하는 숫자는 예레미야의 소명 일자에 관한 후대의 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실제 소명 일자는 기원전 609-608년경일 것이라는 가설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기원전 626년에 예언 소명을 받았다는 가설들은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연대에 관한 근거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가 요시야의 저 유명한 개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우리는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 활동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③예언서 후반부에서 예언자의 삶에 관한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08년 성전 입구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가 결국 그를 궁지에 몰아넣고(26장. 7,1─8,3) 기원전 605-604년에는 그때까지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해 둔 신탁들을 기록하여 처음으로 출간합니다(36장). 기원전 594년에는 다른 예언자들과 논쟁을 벌이고(27─28장),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론의 유배자들에게 편지한 통을 보내는데 이 편지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29장). 기원전 588-587년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치드키야 임금과 그의 대신들과 겪은 갈등,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활동한 내용이 32─35장과 37─44장에 담겨 있습니다. 

4.예레미야의 직무 시기 
①첫 번째 시기
❶예언 소명 때부터(연대 불확실) 결정적으로 카르크미스 전투가 전개된 기원전 605년경까지입니다. 아시리아는 주변 국가에 대한 폭정을 멈추고, 유다는 요시야 치하에서 상당한 번영을 이루며 안정된 시기를 맞습니다. 이를 계기로 요시야 임금이 영토를 넓히고 온갖 개혁을 시도하여 유다는 널리 독립을 누리게 됩니다. 
❷기원전 609년에 요시야가 사망하자 국가는 몇 년 동안 이집트인들의 세력 아래 놓이지만, 이것이 그리 힘겨운 속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요시야에게만 치명적이었던 므기또에서의 소규모 접전을 제외하고는(2열왕 23,29) 유다 왕국에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레미야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사명에 맞닥뜨립니다. 즉, 북쪽에서 솟구쳐 일어나 유다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무적의 군대가 쳐들어오리라고(특히 4─6장 참조), 곧 너무 늦기 전에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어떤 희망도 남기지 않을 무자비한 군대가 들이닥치리라고 예고한 것입니다. 
❸유다 백성과 그 지도자들은 자만에 빠져 있으며, 그들의 체제가 흔들림 없이 지속되리라 확신하고 있는 중입니다. 유사시에 그들은 최후의 피난처인 성전과, 이 성전의 역사 깊은 신성불가침성에 의지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②두 번째 시기
❶기원전 605년부터 587년, 곧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이며, 예레미야는 이 시기에 예언 활동 전반에 걸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❷외적의 침입(바빌론)에 관한 그의 예언은 갑작스러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제 유다의 독립도 끝장날 판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유다의 정치를 책임진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대다수의 지도자들은 독립을 되찾기 위한 정책을 결연히 선택하는데 이들은 이집트와, 바빌론의 위협을 받던 인접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지도자들은 네부카드네자르 제국의 속국이 되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유지하겠다는 희망으로 바빌론의 보호를 받아들일 태세였습니다. 
❸친바빌론파는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였던 아히캄(26,24), 예루살렘 함락 이후 그 지방의 행정관으로 임명된 아히캄의 아들 그달야, 신탁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도록 예레미야를 도왔던 인물인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 그들입니다. 바룩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임무 수행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일종의 속기사로서의 그저 평범한 ‘서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바룩은 소페르, 곧 국가의 비서로서 거의 수상과 같은 고위 관료였으며, 바빌론 제국 행정 구역의 수장이 된 그의 형제 스라야처럼(51,59)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룩의 영향력은 사람들이 그를 친바빌론 세력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부추긴 핵심 인물로(43,3) 취급할 정도였습니다.
❹바빌론 세력에 대한 예레미야의 입장은 매우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유다가 독립된 강국으로서 정치와 종교의 이중 통치 질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성적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백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3,22─4,4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이 백성이 마음으로부터 정의를 수호하고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바빌론제국이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5,1-3; 22,13; 23,5-6 참조).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제국 한복판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든 이의 안녕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이 공동체가 조상들의 나라로 돌아온 뒤에, 옛날 주님과 맺은 계약을 더욱 심화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❺이제 하느님께서는 국가의 멸망을 선언하시고는 전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분께서는 바빌론 제국 한가운데에서 당신의 심판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든 이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변화된 공동체를 창조하려고 하십니다. 이 공동체는 조상들의 땅으로 행복하게 귀환한 다음 예전에 주님께 다짐한 약속들을 내적으로 훌륭하게 심화시켜 나갈 것입니다(31,31-34). 
③예레미야 예언 활동의 세 번째 시기
기원전 587년 이후, 곧 예루살렘 붕괴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바빌론 제국이 백성들 가운데 몇몇 계층을 강제 이주를 시켰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다 땅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잔류민들 사이에서는 세 가지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⑴그달야를 중심으로 친바빌론파 대열에 섰던 우두머리들이 주도한 경향으로서, 이들은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였으며 예레미야는 그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⑵암몬 임금의 지원을 믿고서 냉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이스마엘 휘하의 사람들로서 이들은 오히려 폭력적인 행동을 통하여 투쟁을 지속하고자 하였습니다(41,1-10 참조). ⑶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규합한 사람들로서 이집트로 망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망명 계획을 만류하던 예레미야의 신탁에도(42장) 아랑곳하지 않고, 세 번째 부류는 당초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예레미야까지 끌고 갑니다(43,1-7). 그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지막 자취는 머나먼 이집트 땅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맙니다(43,8─44,30).

5.역사적 배경
1)유다왕국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  
바빌론 유배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587년까지 두 번 있었습니다. 바빌론은 칼데아 왕조에 의해 세력을 확장하였고, 609년에 아시리아를 제압합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605년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의 느코에게 승리합니다. 이 결정적인 바빌론의 승리로 팔레스티나의 종주국도 바뀝니다. 
①1차 유배 BC 598/597년(2열왕 24,10-16)-네부카드네자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면 공격을 단행합니다. 즉위 3개월 된 열여덟살의 여호야킨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고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는 왕궁과 성전의 기물들을 앗아가고,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하여 모후와 왕비들, 지도층인사들, 귀족, 장인들을 포로로 데려갔고 그 가운데 사제 에제키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배간 이들의 숫자기록은 열왕기와 예레미야서가 다르고 사실 정확한 숫자 확정은 불가능합니다. 가난한 백성은 노동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자국에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의 후임으로 그의 삼촌 마탄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꿉니다(2열왕 24,17-20;2역대 36,10).
②2차 유배 BC 587년(2열왕 25,1-21);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치드키야는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성전은 전소(全燒) 되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7월 말의 일입니다. 예레 52,12에서는 “초이렛날”을 “초열흘날”로 바꾸어 기록 했습니다.약탈을 당한 궁궐과 성전은 불에 타 파괴됩니다. 유다 왕국이 망한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친위대장 느부자르아단(2열왕 25,8)은 바빌론 문헌에도 나오는데, 나부세리디남이라는 이름으로 왕궁 관리들의 목록 맨 위에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이어지는 2열왕 25,9-18는 바빌론이 성전을 불태우고 성전의 기물들을 갈취한 물품내용, 포로들을 열거하는 내용입니다(2열왕25,19-21). 바빌론지배국은 유배된 이들의 땅을 도시와 지방의 하층민들에게 분배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빌론의 조치는 소지주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더불어 그들은 정복자에게 확실한 충성심을 보이게됩니다. 50년후 유배자들이 돌아와 자신들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면서 돌아온 자들과 유다 땅에 남아있던 자들 사이의 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2)그달야의 죽음과 예레미야  (2열왕 25,22-26) 
그달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민족들에게 바빌론제국에 충성을 권고하자, 유다의 왕족 느탄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달야를 살해한 후, 예레미야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합니다. 그달야는 예레미야에게 도움을 준 아히캄의 아들이며 친바빌론파로서 예레미야와 뜻을 같이했습니다. 이집트로의 피신은 예레 41,16─43,7에 나오는 긴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피신 장소는 아마도 엘레판틴, 아수완, 이집트 북부, 그리고 델타(나일강 삼각주)의 유다인 거주 지역들이었을 것입니다.
3)여호야킨이 바빌론 임금에게 은전(恩典)을 입다
여호야킨(유다는 바빌론제국에 의해 세워진 치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중인 치드키야의 조카 여호야킨이 유다의 마지막 임금이다)이 바빌론에 수감된지 37년째 되던 해에 에윌므로닥이 등극하여 유다 왕을 선대(善待)하여 임금 여호야킨을 감옥에서 풀어 주었습니다.(2열왕 25,29-30) 유다 임금 여호야킨의 유배살이 제삼십칠년 열두째 달 스무이렛날이었습니다. 이 해는 기원전 561년입니다. 에윌 므로닥은 바빌론 이름으로, ‘므로닥 신의 사람’입니다. 그는 기원전 561-560년에 다스렸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유배자들은 메시아적 희망의 상속자들이요 그 희망을 위탁받은 사람들입니다(예레 24,4-7). 예레 52,34에는 “죽을 때까지”라는 말이 덧붙여지는데 바빌론의 행정 문서에 여호야킨 임금의 이름이 배급 식량을 받는 사람들의 명단에 나옵니다.

6.치드키야(Zedekiah;Σεδεκίου;597-587)와 예레미야 
유다 땅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한 인사들은, 우유부단한 치드키야 임금을 끼고 친이집트 정책을 폅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사주를 받아, 독립을 쟁취할 뿐 아니라 바빌론에 빼앗긴 기물들을 되돌려 받게 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만이 이러한 정치적, 특히 종교적 오판, 광신적 민족주의에 맞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고, 유다 왕국은 끝내 바빌론에 다시 반기를 듭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바빌론의 시대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몇 부분을 통하여 유다의 마지막임금 치드키야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신하들이 감옥에 가둔 예레미야를 풀어주지도 않고 동조하지만, 하느님께 기도를청하고 마음의 불안 때문에 은밀히 예레미야를 찾아가서 묻기도 합니다.(예레 37,2-17 참조)    
유다임금 여호야킨은 바빌론 유배를 가서 살아있으니 사실 치드키야는 바빌론이 여호야킨 대신 세워놓은 임금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권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치드키야의 상황은 많이 어려웠습니다.  
치드키야는 여호아하즈와(2열왕 23,31)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요시야 임금의 셋째 아들입니다. 
유다고대사에 의하면 치드키야의 두 아들은 살갗을 벗기고 혀를 뽑고 살해했다고 전해지며 임금 치드키야도 매를 맞은 후 눈이 뽑혀 놋쇠사슬에 묶여 끌려갔습니다(2열왕 25,1-7). 유다의 역사가 바빌론제국이 세운 치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유다 땅에서 그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유다왕국은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전소되었습니다. 치드키야는 바빌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예레 52,11은 “죽는 날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를 덧붙입니다. 마지막 임금의 고통과 함께 유다인들은 불타버린 예루살렘성전과 망해버린 조국을 비통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일부의 유다인들(왕족,사제,장인 등)은 2차유배시 바빌론 땅에 유배되었고, 상당수의 유다인들은 본토에 남겨져 땅을 분배 받고 바빌론 제국의 지배아래 살았습니다. 그 기간은 5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바빌론 땅에서 뒤에 나오는 제2이사야와 에제키엘과 함께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의 구원을 희망하였습니다.

7.민족에게 거부되는 예레미야의 예언직
예레미야는 북쪽에서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군대가 쳐들어와 유다 전역과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단정합니다(4―6). 예레미야는 자기 동족에게 회심을 촉구할 책임을 맡았지만 그들이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이 백성은 자신들이 세운 체제가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백성은 예언자의 통렬한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과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3,23).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레미아를 ‘마고르 미싸빕’ 곧, 사방에서 공포가! 라고 부릅니다(20,10). 바룩이 전한 두루마리를 한 조각씩 찢어 불에 태우는(36,23.여후디가 서 너 단을 읽을 때마다 칼로베어 태운다)여호야킴 임금의 행동은 예레미야의 설교가 첫 번째 시기에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바빌론 임금이 여러 차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휩쓸고 있는 형편인데도 유다의 지도자들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8.예언 소명의 진정성
①예레미야예언자의 삶을 뒤흔드는 온갖 문제들 가운데, 자신이 예언자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문제였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서 자체만 보더라도 예레미야와 같은 자격으로, 그리고 그 곁에서 예언자로서 지위와 특권을 주장하던 다른 사람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26,20-24), 아쭈르의 아들 하난야(28장),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치드키야(29,21), 그 밖에 여러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익명의 예언자들(2,8.26.30; 4,9; 5,13.31; 6,13-14; 26,7-16; 27,16-18), 예레미야가 때로는 심한 말을 퍼부으며 그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는(23,9-40) 예언자들(14,13), 또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예언자들을(4,10) 열거할 수 있으며, 바빌론 유배자 가운데에도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29,1).예언자가 그들을 ‘거짓 예언자’로 구분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고독은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면을 지닙니다. 예레미야는 신중하게 적용해야 하는 몇 가지 윤리적 기준을(23,14.17.22; 29,23) 내세우는 것 말고는,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분류하거나, 자신만큼이나 확신을 갖고 메시지를 옹호하던 다른 예언자들 앞에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어떤 객관적 기준도 내놓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②예레미야의 특이한 소명의 진정성과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핵심을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셨다면, 어찌하여 예레미야 혼자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홀로 외롭게 그 진리를 외쳐야 했는가? 그는 자신의 고유 직분에 관해서는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실만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예언자는 외톨이, 적응 불능자, 끊임없는 반항자로서 슬픈 운명을 살아가야 하는가?하느님의 단호한 응답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것이며, 오히려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12,5). 결국, 훨씬 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고자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침착하게 제 길을 묵묵히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15,19-21). 예레미야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예고한 재앙이 실현되는 현실을 목격할 것이며,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반성할 것입니다. 훗날 몇몇 의식 있는 신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신탁만이 아니라 그의 직분에 관계된 전승들을 수집할 것이고, 그는 결국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9.예레미아서의 구성
①제1부 1─25장 
유다를 거슬러 행한 예레미야의 신탁과 상징적 행동의 기록입니다.
예레미야서 제1부의 구성과 관련하여, 바룩이 기록으로 남겼으나 여호야킴이 태워 없애 버린 뒤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을 더 적어 넣었다.”(36,32)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완된 형태로 다시 작성된 두루마리에 관한 일화는 성경 주석가들의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두루마리는 기원전 605년 이전에 발설된 위협 신탁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아마도 예레미야서 1─25장에 취합된 자료에 삽입되었을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본문들을 식별해 내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일치된 견해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문제가 복잡한 까닭은 1─25장이 친저성에 전혀 문제가 없는 운문체 신탁들 외에도 때로는 장 전체를 차지할 만큼 비교적 긴 형태의 산문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이 산문들이 어휘나 신학 사상에서 ‘전기 예언서’라 불리는 작품들 속에 흩어져 있는 역사에 관한 대서사시, 곧 이를 유배 시대 동안 기술한 신명기계 편집자들의 작업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예레미야의 친작으로 간주할 수는 없겠지만, 후대의 편집자들에게서 다듬어진 예레미야의 신탁들을 대신한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②제2부 26─45장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구원의 신탁, 예레미야의 예언직에 관한 기록.
❶29장;바빌론으로 보낸 편지
이 편지는 기원전 597년 유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보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배자들은 현재의 절망스러운 상태와, 그들 가운데 있던 예언자들이 고취시키고 유지해 나간 희망, 곧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 사이에서 혼란을 거듭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의 유배 생활이 지속될 것이라고 하며, 유배 생활이라는 새로운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앞날에 대해 너무 편협한 민족주의적, 정치적인 개념을 벗어나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먼 미래의 귀환에 대한 전망을 고수하면서도(29,10-14.32),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고국에 남아 있는 동족들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로 생각하지 말고(16-20절), 주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20절) 헛된 생각을 접고 새로운 ‘조국’(바빌론)에서 정착해 살라고 권고합니다(4-7절). 이 편지는 유다 역사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 줍니다. 곧, 디아스포라 유다교의 대헌장이 벌써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이 29장은 예루살렘과 포로들 사이에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❷36장;신탁들을 바룩이 두루마리에 적고 이 두루마리는 왕과 대신들 앞에서 읽혀집니다.
❸32―35,37―44; 예레미야가 치드키야 임금과 겪은 갈등, 그리고 도성이 함락된 뒤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서 펼친 활동상의 기록입니다.
❹예레미야 예언서 제2부에서 예언자의 직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들은 줄곧 바룩의 작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기록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매우 상세하고,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분명해 보일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은 바룩이 받은 사적 신탁으로 마감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다고까지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저자는 아마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을 것입니다(43─44장 참조). 
③45장;바룩에 대한 신탁
내용 면에서 이 신탁은 예레미야가 치드키야와(34,1-7) 에벳 멜렉에게(39,15-18) 전했던 신탁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신탁들을 같은 시기의(기원전 588-586년)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입 부분은(45,1) 이 신탁이 기원전 605년에 발설되었음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후대의 편집 결과에 속할 것입니다. 바룩 서기관은 분명히 정치적 야망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나, 기원전 605년의 사건이나(예레미야의 신탁을 공개적으로 낭독: 36장) 기원전 587-586년의 사건을(이집트 강제 이주: 43장) 겪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끝났음을 인정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바룩에게 예레미야는 적어도 목숨만은 건지리라는 주님의 계획을 전하면서 그를 위로합니다.
④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한 신탁  46,1―51,64(25,15-38의 서문 포함) 
❶칠십인역에는 이민족들을 거스른 신탁이 25,13 바로 다음에 삽입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배열은 더 오래된 본문의 두루마리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이사야서 1─39장, 에제키엘서,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등 다른 여러 예언서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민족들을 거스른 신탁은 이스라엘을 거스른 신탁과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신탁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❷46장; 이 민족들에 관한 신탁 
이집트가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에게 패배합니다. 카르크미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성읍으로서 오늘날 제라블루스라 불리는 시리아와 튀르키예 사이의 국경 도시입니다. 기원전 605년 아시리아를 도우려고 바빌론 군대를 치러 갔던 이집트 군대는 바로 이곳에서 패배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⑤부록 52,1-34: 
❶2열왕 24,18―25,30에서온 역사적 문헌, 예루살렘의 함락을 다룹니다. 
❷52장은 열왕기의 기록을(2열왕 24,18─25,30) 약간 바꾸어 반복합니다. 이 장은 예레미야의 예언 설교들이 실현되었음을 드러내려고 이 자리에 배치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서 39장의 최종 편집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10.예레미야서의 신학적,영성적 특징
① 2,1-13에서 하느님은 먼저 사랑의 시대를 회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땅에 정착한 이래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모든 예언은 이 역석절인 점에 집중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타락은 배신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②유명한 성전설교에서(7,1-15) 하느님께서는 성전도 이미 수호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설교로 예레미야는 여러 가지 위험에 놓입니다. 이전의 예언자들도 적대자들의 분노에 내맡겨져있었으나 예레미야의 경우 더 위협적인 처지였습니다. 19,10에서 예언자는 ‘옹기장이가 다시는 주워 맞출 수 없게’ 옹기단지를 깨뜨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대도(代禱)를 금하십니다(7,16). 그러나 18,1-11은 옹기장이 손 안에 있는 진흙처럼 하느님께서는 언제든, 어느 나라든, 뽑고 허물고 없앨 수 있으나 돌아서면 마음을 바꾸신다는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③예레미야의 고백록(11,18-23; 12,1-6; 15,10-21; 17,12-18; 18,18-23; 20,7-13.14-18)은 양식과 내용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예언자 자신과 하느님과의 마음의 대화들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들의 하느님에 대한 비상한 친밀성은 예레미야적인 예언자적 실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은총에 회의합니다. 그 자신이 위험 중에 외롭게 내맡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대답은 엄격합니다. 그는 아직 시련의 시초에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께서 해결책을 제공했다는 단서도 없고 이를테면 이사야처럼 산헤립이 돌연히 물러간 일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문장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와 함께 20,7-날마다 놀림감이 되고 폭력을 당하는 침울한 감정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느님 만남입니다. 특수한 방법으로! 그는 견딜 수 없는 임무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그럴수록 그의 마음에 이미 들어온 말은 불처럼 그의 마음을 태웁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20,9)
그는 불나비였습니다.
④예레미야는 그의 많은 질문에 대해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고백들은 예레미야서 해석의 중심에 속합니다. 겹겹이 절망으로 점철된 암담한 길만이 놓여있을 뿐이나 이 모든 문장이 하느님과의 특별한 친밀성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 이 ⎯겹겹이 절망으로 점철된 암담한 길⎯ 이 이스라엘 예언의 중심으로서 어떤 신학적 위치에 놓여지는가? 이 예언서의 포괄적인 문맥을 감안할 때 비로소 반성(反省), 말하자면 문제 제기적인 반성이 차지하는 넓은 영역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질문, 의혹 등에서 반성의 깊은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더불어 이전의 예언자들 역시 무의식의 차원에서 영적인 교감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한 단순한 전달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예언자들 자신이 깊은 영적인 영역에 돌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고독을 감수하면서.
⑤예레미야에게는 자신과 그의 예언직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편에는 옛 예언자들과 같이 순종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단순히 순종하는 것이 예레미야에게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묻고 또 묻고 그리고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의 예언직에 대한 인간성, 그가 받은 상처, 신의 뜻에 대한 민감한 반응 등은 현대인들과 나누어 가지기에 충분합니다. 
⑥예레미야서 내에 예레미야의 이 중개자적 수난이 어떤 의미인가를 말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충실한 사람을 그 자신이 살아서는 알아낼 수 없었던 암흑으로 인도하여 그를 좌초하게 하고 그리고 숨을 거두게 한 것도 하느님의 비밀에 속할 것입니다. 그는 수난 받는 종이었습니다. 
  
11.바룩 설화(36―45)  
예레미야의 일련의 고백들과 함께 수록된 것이 여러 가지 예언자의 선포에 곁들여진 바룩설화입니다. 바룩을 이 기록의 저자로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정확한 정보 때문입니다.그는 냉철하게 그 운명을 추적하고, 예레미야가 이집트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예레미야는 이 기록이 완결되기 전에 죽은 것 같습니다. 바룩은 모든 사건들을 아주 측근에서 같이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목적으로 이 사건들을 문서로 기록했는가?예레미야의 권고는 가능한 한 빨리 바빌론에게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38,17). 예레미야가 공적으로 선언한 이 신념이 이 예언자의 수난의 이유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엘리야에게처럼 까마귀도 이 예언자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는 완전히 적대자들에게 내맡겨져있었습니다. 어떤 희망적인 탈출구가 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고대에있어서 이러한 문장은 참으로 예외입니다. 이 문장에는 어떤 영웅적인 가치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절망 이외에 어떤 극적인 이룸도 없는 이 문장은, 바룩 자신에게 예레미야가 자신의 고통을 말했을 것이고 바룩은 그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결단하시고 예레미야가 동참했던 파국이 우연이 아니라, 이 파국에 하느님의 의지가 확연하게 작용하고 여기에 한 인간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수난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세우신 것을 스스로 파기해야하는 아픔을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바룩설화의 마지막은 바룩에게 주는 생명으로 끝납니다(45,5). 그는 살아서 예레미야가 직접 체험한 하느님의 아픔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2.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
옛것과 새 것 사이의 단절은 예레미야에게 더 심각했고 더욱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릇은 깨졌습니다. 옛 언약은 파기 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본질적으로 옛 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 새 언약이 따르는 이유는 계시된 언약의 불완전한 면이 지적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깨어졌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탈출전통으로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듣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들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면, 새 계약은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사람이 듣고 들은 말씀을 순종하는 과정을 철폐하고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의 마음과 교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의 마음에 그 언약을 심어주십니다(31,31-34). 그러한 면에서 예레미아서는 신명기를 넘어섭니다. 
언약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순종의 문제는 인간의 뜻이 다른 뜻과 부딪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의 대립이 해소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에 하느님의 뜻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계약이 깨어지고 드러나는 것이 새로운 인간상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31,31-34)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옛 계약’ 파기를(32절)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나서(34절) 체결하실 “새 계약”은, 시나이에서 내리신 계명과 이에 대한 맹세를 수정하거나 순전히 영적인 새로운 경신례로 이루어지는 계약이 아닙니다. 이 계약은 오히려 이전의 계명과 맹세가 이제는 ‘그들의 깊숙한 곳에’, 곧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짐으로써 체결될 계약입니다(잠언 9,1-6; 아가 8,2; 이사 48,17; 51,7; 54,13; 55,3; 로마 8,2; 1코린 9,21 참조). 이렇게 새로운 인격을 형성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 없이도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의 완성을 보증하는 성찬을 제정하실 때 이 예언 말씀을 참조하십니다(루카 22,20; 1코린 11,25). 히브 8,8-12는 새 계약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 31-34절을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추방된 자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며 예루살렘은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새 언약이라는 말로 종결을 보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하느님에게 영구히 돌아옴을 뜻할 것입니다. 이 돌아옴은 개인주의화 된, 내면화 된 돌아옴이 아니라 본래의 순수성으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원칙적으로 이 돌아옴은 이사야, 호세아와 같이 구원에 속합니다. 바빌론제국의 새로운 공동체에서도, 21세기의 공동체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본래의 순수성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구약46권 기본정보[8] 예언서② [예레미야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