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에제키엘서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함께 3대예언서라 불립니다. 이러한 말은 예언서의 크기에도 있지만 이 예언서들이 신학적 영성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에제키엘은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의 예언자였고 이 둘은 서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에제키엘이 사라질 무렵(571년 이후) 제2이사야가 존재했었을 것입니다. 이 세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종교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함께 존재했던 사람들이고 조국과 운명을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조국과 관련한 영웅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무기가 아니라 “말씀”을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해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들의 구심점인 성경을 만들고 성전을 재건합니다.
에제키엘은 조국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바빌론의 유배지에서 바라보며(1차유배 후 10년 동안), 그리고 587년 이후에는, 폐허가 된 조국과 뿔뿔이 흩어진 동족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는 부즈라는 사제의 아들입니다. 예언자이면서 사제인 그는 탈혼 상태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면서,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멸망해가는 세계와 새롭게 일어나는 세계의 중간에 선 예언자였습니다.
46-33.에제키엘서 ; EZEKIEL; ΙΕΖΕΚΙΗΛ (약칭 에제/Ezk)
1.예언자 에제키엘 인물 소개
에제키엘은 히브리말로 “하느님이 강하게 하신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유다 임금 여호야킨과 귀족들과 더불어 1차 유배 때 끌려간 걸로 보아 명문가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익명 속에 감추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살았습니다. 그는 예언자일 뿐 아니라 사제이며 신학자입니다. 유배지의 자기 집에서는 원로들을 모아놓고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합니다(8,1; 20,1).에제키엘은 네 동포 유배자들에게 가서 일러라.라는 사명을 받습니다(3,11). 그는 일차적으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유배자들은 유배살이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조국의 땅을 그 무엇보다도 더 많이, 더 간절히 그리워하였습니다.
2.에제키엘의 활동시기
①에제키엘은 BC 597년 첫 유배시 바빌론에 와서 593년에 소명을 받고 약571년까지 예언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겠습니다(2차 바빌론 유배는 587년 8월). 에제키엘서에 의하면제 삼십년 넷째 달 초닷샛날계시를 받고 예언자로 부름을 받습니다(1,1). 1장2절에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 오년이라는 다른 연대가 나오는데 3세기의 오리게네스 교부 때부터, 1장1절의 삼십이라는 숫자가 에제키엘의 나이를 가리킨다는 믿을 만한 추측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추측이 맞을 경우, 에제키엘은 25살 때 여호야킨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온 것이 됩니다. 이 유배의 햇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시간의 기준이 됩니다(1차 유배 BC 598/597년;2열왕 24,10-16)
②에제키엘은 '네 동포 유배자들에게 가서 일러라.'라는 사명을 받고(3,11) 조국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유배지에서 바라보며(1차유배 후 10년 동안), 그리고 587년 이후에는, 폐허가 된 조국과 뿔뿔이 흩어진 동족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에제키엘은 집도 가지고 있었는데(8,1) 키루스의 귀환칙령이 반포 되었을 때 유배지의 사람들이 일시에 바빌론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유배생활 50년 동안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에제키엘은 유배 제 오년에 유배자들과 함께 크바르 강가(바빌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줄기)에 있다가, '하늘이 열리면서 …환시를' 보게 됩니다(1,1). 유다인들은 '텔-아비브'라는 마을에 배치되어(3,15), 水路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1⎯24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틀을 이루지만,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관심의 초점입니다. 여기에서 에제키엘의 '두 무대 활동 가설'이 나오는데 에제키엘이 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후기에는 바빌론에서(또는 그 반대로), 혹은 이 두 곳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일차적으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 예언자입니다(3,11).
④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에제키엘은 오로지 바빌론 땅에서, 그것도 텔 아비브라는 도시 가까이에서 예언 활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하며, 예언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첫 번째 팔레스티나 침략 때에(기원전 598년), 그러니까 예루살렘 함락 이전 바빌론으로 압송되었다고 봅니다.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환시는(8,1)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곧 에제키엘의 유배 제6년, 곧 기원전 592년으로 표기되어 있고, 솥에 관한 신탁은(24,1) 제9년, 곧 기원전 589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해 12월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⑤에제키엘 예언서도 다른 예언서들과 함께 유배에서 돌아온 BC500년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에제키엘 예언서는 구약성경의 3단계편집 중 2단계에서 완료됩니다(대략 BC 3세기 초반). 예언서 전체는 BC 2세기말까지 최종 편집 되었습니다.
3.역사적 배경; 바빌론유배지
①신바빌론 제국
고대 바빌로니아제국은 BC 1895년부터 1595년까지 약 300년간의 시대를 말합니다. 제국의 이름은 수도 바빌론에서 유래하며 지금의 이란․이라크지역입니다. 고대 바빌론제국은 BC 1595년 히타이트에게 멸망하고 히타이트는 아시리아에 패망합니다.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가 아시리아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BC 612 메디아(Medes)인과 함께, 수도 니네베를 파괴하여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제국의 패권은 바빌로니아로 돌아오면서 신바빌론제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다는 BC 587년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멸망하고, 바빌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는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②바빌론유배와 흩어진 이스라엘
이스라엘민족의 바빌론 유배시대는 기원전 587년부터 약 50년간입니다. 722년 아시리아에게 먼저 멸망한 북부이스라엘 지역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많은 이교인들이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지 않은 남왕국의 유다인들은 대부분 굶주렸거나 처형되어 죽었고, 지배국(바빌론)이 노예로 삼거나 필요에 의해 땅을 분배해주고 잔류시킨 남아있는 유다인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이 잔류민과 후에 유배에서 돌아온 자들 간의 재산분쟁은 귀향 후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조국의 멸망 후 이집트로 갔는데 후에 안티오코스시대의(그리스) 대량 이주민과 합류하여 이집트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를 구성하였습니다.
③유배지의 이스라엘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배자들은 사제,귀족,장인 등 귀족층이었고 이들은 일정한 거주지를 배당 받은 것 같고 나름대로의 공동생활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에즈 8,17) 유배지에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유배기간 중에 전승들이 보존되고 사제 에즈라를 중심으로 성서 편찬이 진행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흩어졌습니다. 그러한 비극 속에서 제2이사야,예레미야,에제키엘 등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유배를 징벌로 받아들이게 되고 정화의 과정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닥쳐온 시련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구했으나 고난이 언제 끝날지는 정녕 알 수 없었습니다.
4.에제키엘서의 전체구조
이 예언서는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주제가 직접 관계가 없는 여러 갈래로 전개되기도 하고, 일관성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글을 기록한 에제키엘의 제자들은 논리성에는 별 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스승의 신탁들을 토막내거나 같은 신탁을 되풀이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들은 때로 서로 직접 관련이 없는 신탁들을 인위적인 연결 고리로 묶어 놓기도 합니다. 예컨대 21장에서는 “칼”이 서로 무관한 단락들을 잇는 ‘연결 고리’로 쓰입니다. 곧 주님의 칼(6-12절), 잘 갈아 날이 선 칼(13-22절), 바빌론 임금의 칼(23-32절), 암몬인들을 치는 칼(33-37절) 등이 그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또 같은 신탁을 여러 번 되풀이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예컨대 ‘주님의 의로운 길’에 대한 생각은 18,1-32와 33,10-20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옵니다. 에제키엘 스스로도, 자신이 이미 쓴 문장들에 갖가지 세부적인 내용들을, 그리고 기존의 장들에 갖가지 단락들을 때로는 너무 많이 채워 넣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애초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환시 이야기라든가(1─3; 8─11장) 예언 몸짓에(4,4-17) 관한 내용 등을 보충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이 예언서를 읽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세 단계의 간단한 구조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제1부]예루살렘 멸망 이전 1─24장
①환시와 소명: 1─3장
②예루살렘의 심판: 4─24 장
그는 주요한 역사적 줄기를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 나가는데, 16장과 19장의 배경이나 이민족들에 관한 신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2부]이민족들에 관한 권고와 심판 25─32장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은 예루살렘의 비극적 사건과 연관이 되는데 슬픔에 빠진 유다인들을 조롱하는 민족들에게도 징벌이 예고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류의 원조와 에덴동산(28장), 우주의 나무(31장), 저승의 세계와(32장) 같은 신화적인 요소를 상기시키는 무한하면서도 점점 사라져 가는 내용들을 포함한 풍부한 자료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3부]예루살렘 멸망 이후 33─48장
①구원 예고: 33─39 장
②새 예루살렘: 40─48장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선 무시무시한 적대자들을 거슬러 싸우는 하느님 백성의 궁극적인 전쟁 이야기가 펼쳐지며(38─39장), 이어서 하느님 백성의 새로워진 미래 수도가 될 높은 산의 윤곽이 드러납니다(40─48장).
이 3부의 세 단계는 전체적으로 첫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곧, 심판의 예고→약속의 예언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5.에제키엘예언자의 특징
①에제키엘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천성이 변화무쌍하고 생각이 풍부하며 복잡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 하느님 백성의 운명을 밝혀 주는 소중한 영적 체험을 했던 사람을 증언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에제키엘서의 특이성이라 하겠습니다.
②그는 규범과 규정 속에 사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것을 초월하는 예언자입니다. 탈혼 상태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면서,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에제키엘의 정신적 차원은 유식함과 교양 면에서도 비상하게 다양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환시를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자기 집에 앉아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는 환시를 보기도 합니다. 이런 특이한 현상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으로는 에제키엘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에제키엘은 어떤 학자가 지적하였듯이, 가슴 속에 두 가지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환시들을 자신의 이성과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도바오로처럼 하느님의 세계와 그분의 계획에 깊이 관여된 인간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내적인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심리적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③에제키엘은 예언자들 가운데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정열과 감정을 억제하는 절제된 감정이 기이한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했으므로 세인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접한 내적 긴장감으로 육체의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고 상징적인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라고 외칠 때마다(3,11), '가시로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합니다(2,6). 그렇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언자가 만일 악인에게 경고하기를 게을리 하면, 적절한 질책이 없어 죽어가는 이 악인의 죽음에 대해서 에제키엘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3,18). 이렇게 예언자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영감만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예언이라고 선포합니다. 백성의 죄악을 치유하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평화의 메시지만 공포하는 예언자들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13장).
6.에제키엘서의 신학
에제키엘은 바빌론 땅에서 예언 활동을 펼치지만, 그는 본디 사제였던만큼 제사와 전례와 규정과 성소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 정신을 끝까지 지켜 나갑니다(40─48장).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갑자기 뒤바뀐 곳이 바로 그 바빌론 땅입니다. 에제키엘의 삶과 자세를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 영광의 현현(顯現)으로서, 이것이 사제인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서, 이것이 멸망의 선포자 에제키엘을 구원의 예고자로 변화시킵니다.
1) 하느님 영광의 현현
① 주님의 영광에 대한 환시
에제키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영광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납니다.
❶1,4-28; 주님발현의 환시
⑴그는 무엇을 본 것인가? 먼저 폭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구름 한가운데에서 번쩍거리는 불이 보이고,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들이 나타납니다. 이 날아다니는 네 생물은 궁창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위에는 어좌 하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어좌에는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인 채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본 주님 영광의 모습입니다(1,4-28).
⑵이 “생물”에 대한 서술은 당시의 벽화와 장식품과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언자는 이런 것들을 이미 팔레스티나에서(몸은 사자, 머리는 숫양이나 사람, 날개는 독수리 모습을 한 가공의 짐승들을 조각한 상아 세공품들이 지중해 해안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또는 특히 유배지에서 보았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저마다 얼굴 넷을 가진 신적 인물들의 상(像)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어, 에제키엘이 본 환시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로써 바빌론의 신화에서 따온 환상적인 네 짐승들에 대한 긴 서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⑶예언자는, 바빌론인들이 우주의 모든 힘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겼던 이 짐승들을 주님을 섬기는 존재로 배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각을 일으킬 듯한 바퀴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도 나름대로 주님의 영광이 어떤 곳으로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⑷에제키엘에게도 “영광”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뜻합니다. 그것은 여러 상징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과 성성(聖性)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예언자의 눈으로, 광채를 내는 현상 속에서 직접 볼 수 있었고, 인간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한 형상을 지녔고, 자립적이며, 거의 인격화한 존재로 나타납니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서술의 새로움과 대담성을, ‘모습, 형상, 형상을 한 것, -와 같다, -처럼 보이다’ 등의 이른바 비유적 표현 방식으로써 완화시키려고 합니다. 곧 하느님의 근본적인 초월성과 그분께서 당신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 그분께서 성소에 계시다는 확신과 그분의 영광이 불충한 예루살렘에 곧 닥치게 될 멸망으로 소멸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❷3,23;예언자의 소명에 관한 환시
3,24그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시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라.25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제 밧줄로 묶여서 사람들에게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구절에서 그나마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언자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수많은 선포를 하거나 침묵을 지킬 때에도 또 백성 가운데에 있거나 들로 나가거나 고집스럽게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거나 밧줄로 묶여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❸8,1 우상숭배에 관한 환시
❹10,1;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환시
❺43,2;주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오는 환시
② 환시를 통한 합리적 반성
❶에제키엘서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에제키엘이 환상적,영감적인 것과 함께 합리적인 반성에도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성실하게 생각하고 모든 결론들까지도 설명하려는 욕구를 그만큼 강하게 가진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그는 듣지 않는 자들을 향해 설교해야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환시의 의미까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❷환시에 대한 에제키엘의 설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봅니다. 예언자는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와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을 봅니다(11,22.23).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거처인 시온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유다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결별의 동기를,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소를 더럽히고(8장),이교의 제사에 눈길을 돌렸으며(6,3.6.13; 16,16; 20,28.29),마음에 우상(14,1-8)들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❸이스라엘의 죄악은 또한 백성이 일상생활에서 저지르는 부패와 부정과 부도덕이기도 합니다(18,5-9; 22,3-12.23-30;성소에서 사용되던 성찰의 형식). 그는 이스라엘의 배신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 세대의 배신일 뿐 아니라 순종에 대한 심각한 무능력, 아니 이스라엘이 탄생하던 첫 날에 이미 드러났던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❹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사를 에제키엘도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합니다.
⒜하느님의 자기계시 ➜ ⒝불순종 ➜ ⒞진노 ➜⒟ 용서
❺에제키엘은 죄를 폭로하는 옛 예언자의 직분을 새로운 관점에서 계승했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인간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아마 그의 선임자들에게서보다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실정은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기에서 종지부를 찍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2)죄에 대한 비유형식의 예언들
①예언자는 이 주제를,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버려진 아기의 비유' 에서 전개시킵니다. 이 아기는 피투성이로 들판에 버려지지만, 주님께서 발견하여 살려주시고 양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종국에 가서 '뻔뻔스러운 창녀'로 전락하고 맙니다(16장 전체).
②에제키엘은 오홀라(북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오홀리바(남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라는 두 여자의 歷史로써, 이 주제를 되풀이하여 설명합니다(23장). 결국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빠져버린 이 추잡한 부정의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또한 당신 뜻에 따라 당신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저버린 유다 임금들이 저지른 죄악입니다(21,30-31).
③예루살렘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이고 어머니는 헷 여자로서, 이교도적인 배경에서 생겨났습니다(16,3.45). 예루살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배신은(20장) 결국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이 이해한 파국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배신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풍부한 예증들은 16장과 20장, 23장의 광범한 역사적 회고들에서 예거됩니다. 이 예증들은 사제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것이 이집트의 해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하고 당신을 알려주셨지만(20,5), 이스라엘인들의 이집트 체류는 탈출 후에도 그 무엇으로도 포기시킬 수 없는, 우상숭배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20장).채찍에 맞는 것이 아프다고 부르짖으면서도 이집트적 문화에 빠져버렸습니다.
3) 예루살렘의 멸망
백성의 죄악은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는 이 심판이 다가옴을 보고서는, 말과 행동으로써(4─11장) 그러한 사실을 지칠 줄 모르고 예고합니다. 이 예고는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불에 타버렸으며, 생존자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침까지 계속됩니다. 그들은 고통과 절망이 너무나 커서,'우리의 죄와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스러져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33,10), 그리고'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37,11)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4) 개별화 설교 18장
①에제키엘은 결정적인 멸망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파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쳐 죽이는 동안, 홀로 남은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아, 주 하느님! 예루살렘에다 이렇듯 화를 쏟으시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두 파멸시키실 작정이십니까?”’(9,8)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 주 하느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마저 완전히 없애려 하십니까?”’(11,13)
이 메시지는 진실한 자들의 자성을 촉구했고 그로 인하여 신앙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결단을 요구하는 새로운 각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공동체는 낡은 전통이 와해된 이후에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살아남으려면 개인의 결단으로 돌아서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②에제키엘은 18장에서 옛 체제(단체적 숙명론)을 반대하는 자들의 고난을 다룹니다. 이 집단은 자신들의 조상의 죄로 자신들을 처벌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 과거를 통한의 눈물로 돌아본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운명에 처해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단체로 살려주시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숙명론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그들과 함께 이 문제들을 철저하게 숙고하고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서 직접 관여하신다는 명제로 응합니다. 아버지의 악행이 아들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막을 수는 없고, 아들의 악행이 아버지의 義에 도움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생활 안에서 공통수치를 찾아내지 않으십니다. 악한 자에게는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18,1-4)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18,32)
③‘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유명한 개별화의 설교 18장은 집단적 속박과 숙명론적인 감정에서 개인을 해방하여 성전례 없이도, 성전 없이도 개인이 성의를 다하여 하느님을 찾는다면 유배생활, 또는 어떠한 상황이든 하느님이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33,20)
5)고난 받는 종
①에제키엘은 전적으로 새로운 예언에 돌입합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공중(公衆)을 향해 선포했고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은 각자(골라서) 알아들어야 했습니다. 에제키엘에 와서는 한 세대가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이 각자 하느님께 참여해야한다는 문제가 지금까지 몰랐던 예리함으로 제기되었습니다.
②하느님 앞에 각기 처해진 사정에 의해 상대해야 한다는 과제가 예언자에게 지워진 것입니다. 에제키엘의 노력은 특별히 사람들이 도피하고 있는 종교적 안정성과 인위적인 의로움의 문제를 숙고하게 된 것입니다. 에제키엘에게 확고한 방향을 준 것은 다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말하여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33,11)
③이제 에제키엘의 牧者적 책임은 그가 한 개인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한 개인의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어떠한 방식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의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ετος;위로,변호,중개,협조)라는 개념에 일치할 것입니다. 이러한 한 개인의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예언자는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탄식하여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괴로워하며 탄식하여라”(21,12).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표적이 되어야하고, 이스라엘의 고난을 몸으로 실현해야합니다. 이러한 파악은 이사야서 53장의 ‘주님의 종’ 사상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6) 구원의 선포
①이마에 표가 있는 자
지금까지 불행의 예표로서(12,6)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예고해야 했던 예언자는, 이제 구원의 선포자로 변모합니다. 이전의 신탁들에도 위로의 말마디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심판과 멸망에서 살아남을 '남은 자들' 의 주제가 여러 구절에 나타나지만 9장에서는 이 주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처형되기 전에, 구분해내는 작업이 선행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아마포를 입은사람)....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에제 9,4-5; 묵시 7,2-3참조)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을 세례의 인호로 이해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마에 도장을 받은 사람들도 고난을 겪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②말라버린 뼈
유다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멸망 뒤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임은 분명하지만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만으로써는, 유배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파수꾼'인 예언자 에제키엘은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올라섭니다(13,5 참조). 폐허 위에 올라서서 전혀 새로운 시작을 선포합니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바싹 말라버린 해골들이 살이 붙으며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장면입니다.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간 줄어들고 또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생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해골더미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시어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거대한 맥락에서의 희망입니다.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37,1-14)
7) 새 생명
①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지만(11,23)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소생합니다(37장).이제 하느님의 구원사건은 사람들의 내부에서 시작 될 것입니다(36,24-28). 유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은 백성,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납니다. 그것은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시는 주님께서(12,25.28; 17,24; 22,14; 36,36; 37,14)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6,24-28)
②에제키엘이 자신의 선포를 훨씬 더 동적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적 개인주의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에서 구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이 예언자에게서 논리적으로 더욱 명백하게 수행됩니다. 즉 구원을 받는 자들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돌아온 자들입니다.
③공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은 성전을 암시적으로 떠납니다(11,22). 이것이 예언자가 본 바로는 재앙과 구원사이에 있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구원사의 결정적인 것을 사람들의 내부에서 성취시킬 것입니다. 하느님 구원행위의 목표는 여기에서도, 계명들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한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입니다. 이 창조는 지금까지의 범죄를 씻고 용서하는 제거작업과 연결되어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관여함으로서 순종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에제키엘이 심판을 때로 분명하게 정화(淨化)심판으로서 이해한 사실(20,37; 22,17; 24.11)은 이 권유에 일치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에 근거하는 신앙이었습니다.
④새롭게 정화되고 개혁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이 주어진다는 희망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집결시켜 주었고 암흑의 시기를 견디며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여기에서 하느님의 영(靈)의 수여가 첨가됩니다. 이러한 개인 성결(聖潔)은 단순히 내적인 것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에 의해 인지되어야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7.궁극적 전망
①예언 활동을 마치면서 에제키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선 그는 이 백성이 '마지막 때'에(38,8) 모든 원수들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됨을 봅니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스라엘과 맞선 적군 앞에는 마곡 땅의 임금 곡이 서고, 그 뒤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 서있습니다(마곡의 곡은 예루살렘을 공격할 적 연합군을 상징하는 단어이다.묵시 20,8).
이스라엘은 이들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멸망시킵니다. 이렇게 승리한 이스라엘이, 역시 새롭게 된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리라고 예고합니다. 이 땅은 엄격히 수학적으로 경계가 그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분할됩니다(47─48). 그리고 생명에 가장 중요한 물은 이 땅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성전에서 흘러나옵니다(47장; 묵시22,1-2참조;묵시록에서는 생명의 물이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②이 성전은 매우 특별한 장소로서, 바로 이곳에서, 성전으로 돌아온 주님의 영광을(43,1-12) 찬미하는 전례가 모든 규정에 따라(40; 46장) 거행됩니다. 그리하여 성전은 이제부터 이 새로운 백성이 영위하는 삶의 진정한 중심이 됩니다. 그곳이 어떤 신비의 심장부가 되는 것입니다(48,35;예언서의 마지막 말 '이 도성의 이름은 이제부터 야훼삼마;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
③에제키엘의 선포는 하느님을 알도록 하는데 집중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지막 목표는 만민이 하느님을 알고 찬미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36,22-23).
<예언서④ 에제키엘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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